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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36화 (36/227)

36화 유적지 (5)

와장창!

막혀 있던 통로의 끝자락, 촘촘히 쳐져있던 녹슨 철창이 남자의 발길질에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에일이 허리를 숙인 채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천장이 무너져 내린 마지막 방에서 통로에 진입한 뒤,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발이 나와 처음으로 닿은 곳은 바닥이 아니라 높게 솟아 있는 기둥의 위.

통로의 끝자락과 이어진 두터운 기둥은 허름한 겉모습에도 굳건히 서 있었다.

넓은 기둥이긴 해도 발을 잘못 디뎠다간 추락사할 만한 높이, 하지만 그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이건…….”

입을 쩍 벌린 에일이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유적의 내부,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방의 벽들엔 정체모를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중앙엔 거대한 피라미드가 그들의 앞에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없었지만 바닥과 벽에 서린 은은한 푸른빛이 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긴 대체 뭘 하는 곳일까요…….”

뒤이어 나온 알리사도 그와 똑같은 반응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 던전, 특별한 아이템이 잠들어 있는 유적, 퀘스트와 연관된 장소.

이곳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혹은 세 가지 모두 포함되는 장소인지, 당장은 알 수 없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웅장한 모습에 잠시 굳어 있던 에일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일단 내려가 보죠.”

기둥 위에 가만히 있어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다.

거대한 이곳의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피라미드로 인해 사각지대가 더 많았고, 직접 살펴봐야 뭐든 간에 감이 잡힐 것이었다.

둘은 울퉁불퉁한 기둥을 타고 조심스레 내려갔다.

중간중간 홈이 파여 있는지라 잡거나 디딜 곳은 충분했다.

혹시 몰라 내려가면서 미리 아래를 살펴봤지만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고, 방금 전처럼 갑자기 움직여 습격해 올 만한 석상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타악!

먼저 내려선 에일이 한쪽 무릎을 꿇어 바닥을 살폈다.

수북이 쌓여 있는 먼지와 여기저기 퍼져 있는 이끼는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오래된 공간이라는 걸 알려줬다.

“분명 처음 발견되고서 몇 명 정도 방문자가 있었다는데 아무런 흔적이 없네요. 아무래도 여기는 저희가 새로 발견한 모양이에요.”

최초 발견자가 올렸던 게시글 속에서도, 그리고 그 뒤에 재미 삼아 방문한 몇몇 사람들의 글에서도 이런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그는 보스인 거인 석상이 작동하지 않아 진짜 입구를 발견하지 못했고, 마지막 방에 있던 가짜 입구로 들어가 다른 공간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마 속임수로 만들어 둔 공간일 것으로 보였고, 지금 있는 공간의 규모를 보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거 좋은 소식인걸요?”

에일의 말에 알리사는 유쾌하게 반응했다.

이만한 장소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것은 위험성을 감안하더라도 플레이어에겐 대박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고작 20레벨 대의 몬스터가 나왔던 곳인 만큼, 발견 시기가 너무 늦어 원래의 값어치만큼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하더라도 아직 저레벨 유저인 그들에게 있어서, 상황이 잘만 맞아떨어진다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둘은 본격적으로 주변을 돌며 조사를 시작했다.

이 정체모를 거대한 피라미드 안으로도 진입해 봐야겠지만, 그러기에 앞서 먼저 바깥쪽부터 살펴보았다.

숨겨진 아이템이나 장소에 대한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런 문자 체계는 본 적이 없는데…….’

에일이 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보며 생각했다.

다른 게임이라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배경이나 기초 설정이라도 워로드에서는 퀘스트 진행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당연히 에일은 그런 워로드의 세계관 속 이종족들의 문자부터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 문자에 대해서도 대략적이나마 모두 눈에 익히고 있었다.

뜻까지 완전히 해석하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어떤 문자인지는 알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문자는 아예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런 피라미드 유적이 중앙 지역에 있는 것도 그렇고……. 영 감이 안 잡히네.’

사각뿔 모양의 피라미드 양식 건축물.

워로드 내에서 흔한 형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태 발견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 모두 서부 사막 지대와 관련 있었을 뿐, 그 외의 지역에서 이런 형식의 유적이 발견된 것은 그가 알고 있기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부 지역과 뭔가 관련이 있다는 건가.’

거대한 워로드의 대륙에서는 북부, 서부, 남부, 동부 모두 척박한 미개척지였다.

왕국이 자리 잡은 중앙 지역에 거의 모든 유저가 몰려 있었고,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 역시 중앙에만 존재했다.

아직 선점당하지 않았을 아이템 혹은 새로운 지역에 흥미가 있는 탐험가들이나 보물사냥꾼들이 주로 미개척지로 향할 뿐, 대부분의 유저들은 잘 짜여 있는 중앙 지역의 인프라를 포기하고 그런 오지로 향할 리 없었다.

그나마 북부 쪽은 현재 손꼽히는 거대 길드 하나가 직접 나서 개척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서부는 오히려 길드나 유저들에게 쫓기는 악질 범죄자들이 주로 몸을 피신하는 용도로 쓰여 무법지대 그 자체라고 봐도 좋았다.

“에일 님, 뭔가 찾으셨어요?”

“아니요, 전혀요.”

“저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래도 직접 들어가 봐야겠네요.”

둘은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한 바퀴 빙 돌았지만 새로운 아이템이나 확실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

이제 안쪽으로 향해야 했고, 피라미드 내부와 통하는 통로는 정면에 있던 하나의 입구뿐이었다.

“이렇게 생긴 던전들은 보통 꼭대기에 뭔가가 있던데…….”

“하하, 이만한 크기면 돌파하는 데 거의 며칠은 걸리겠는데요?”

에일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1층에서 출발해 빙 돌면서 한 층씩 올라간다고 가정하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 그냥 돌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할 것으로 보이니 하루 이틀 안에 끝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나마 식량은 충분히 챙겨놔서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드드드드!

그들이 입구의 앞에 서자 이미 반쯤 열려 있던 석문이 완전히 아래로 내려갔다.

바깥과는 다르게 새롭게 발견된 내부는 오래되었을 뿐 부서진 흔적은 거의 없었는데, 입구가 이미 열려 있던 것에 조금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하지만 일단 내부로 진입했고, 그곳에서 뜻밖의 광경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건……?”

그들이 입구 안으로 들어선 뒤, 첫 번째 방과 마주하자마자 웬 커다란 머리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간 몬스터의 등장인가 싶어 흠칫 물러났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바닥에 널브러진 두 개의 석상.

머리를 들이민 채 엎드려 있는 녀석들은 이미 온몸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서 쓰러진 상태였다.

앞서 만났던 보스 몬스터가 무색해질 정도로 거대한 모습.

하지만 놀란 것과는 별개로 놈이 갑자기 다시 움직이거나 공격해올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고작 둘이서 여기까지 살아 들어오다니, 잘 통과했어. 솔직히 큰 기대는 안했는데… 다시 봤네.”

부서진 석상의 머리 위에 올라타 앉아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그들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블러디 핸즈의 세베라 로기아였다.

“설마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에일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너희가 저 뒤에 발을 들였다간 꼼짝없이 죽었을 테니까.”

“죽는다니, 저 안에 뭐가 있길래 그러죠?”

알리사가 나서 물었다.

하지만 세베라는 빙글 웃을 뿐 뭐라 답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표정에 알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굴의 도적단들은 처리했다. 하지만 카사노란 녀석은 안 보이던데? 정보가 확실하다더니 우리를 속인 건가?”

에일이 따지듯이 세베라에게 말했다.

의뢰 목표만큼 중요한 사전 정보가 잘못된 것은 사기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런 부분까지 어물쩍 넘어가주다간 NPC에게도 얕보이기 마련이었다.

인공지능답지 않게 악한 녀석들이 넘쳐나는 워로드에선, 잡다한 일들을 맡으려는 유저를 기꺼이 호구처럼 굴리려는 NPC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런 의도는 없었으니까 진정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너희를 뭘 믿고 일을 맡기겠어.”

세베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일순간 눈빛이 바뀌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지. 우선 여기 있는 석상들부터 확인해 봐. 너희를 위해 남겨 놓은 게 있으니까.”

그녀는 양쪽에 쓰러져 있는 두 석상을 가리켰다.

석상들에게는 아이템을 루팅할 수 있는 빛이 서려 있었다.

녀석들을 쓰러뜨리고 난 뒤, 일부러 전리품을 남겨 놓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둘은 미심쩍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각자 석상에게 다가가 남겨진 전리품을 확인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스킬북×2]

“이건……!”

아이템을 루팅한 에일과 알리사의 눈이 동시에 동그랗게 커졌다.

보랏빛이 감도는 스킬북, 그것도 석상마다 두 개씩이나 놓여 있었다.

총 네 개의 스킬북이 그들의 손에 들어왔고, 파격적인 아이템에 혹시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무려 저번에 트래구울을 처치하고서 얻은 붉은빛 스킬북보다도 한 단계 높은 물건.

그야말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번 의뢰의 보상이야. 원래 주려던 보상은 아니었지만 필요 없는 스킬북이 나와서 말이지. 그냥 버리기도 아까우니까.”

석상 위에서 다리를 까닥이던 세베라가 훌쩍 뛰어 아래로 내려왔다.

“여기 문지기 둘을 잡는데 꽤 골치를 썩였거든, 은신이 안 먹혀드는 바람에 시간도 많이 잡아먹어 버렸고.”“골치를 썩였다니? 블러디 핸즈의 지부장이 고작 20레벨 대 몬스터에 고전할 리가… 잠깐, 설마?”

그녀의 말을 곱씹던 에일이 순간 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이 상대했던 석상들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한 가지 가설이 번쩍 떠올랐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심하게 부서져 있던 석상들.

만약 처음부터 저레벨의 몬스터가 아니라, 단지 훼손과 오랜 세월에 힘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을 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세베라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에일이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

스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더 깊은 통로를 향해.

“역시 눈치가 빠르네. 그래, 이곳은 흔해빠진 던전이 아니야. 210레벨 대의 고대 던전, 왕의 무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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