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적지 (4)
공헌도 상점.
오직 신앙을 가진 유저들만이 쓸 수 있는 특수 상점이자, 교단을 통해 얻은 공헌도를 사용할 수 있는 창구였다.
동시에, 유저들이 이런저런 페널티들을 감수하고도 게임 속에서 신을 믿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원래 공헌도로 아이템을 구매하려면 각 도시에 위치한 해당 신의 신전을 찾아가야 했지만, 에일은 사도의 자격으로 어디에서나 이용이 가능했다.
[검색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에일이 손을 휘젓자 눈앞에 수백, 수천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의 아이템들이 주르륵 늘어졌다.
평범한 수준의 치유 포션부터, 상위 도핑 물약, 장비 아이템, 각종 마법 스크롤, 기타 소모품들과 당장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잡템들까지.
원래는 교단 내 지위에 따라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이 제한되어 나타나야 했지만, 가장 높은 지위인 ‘사도’ 에일에게는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교단이 섬기는 여신에게 직접 인정을 받은 유일한 존재니 당연했다.
공헌도만 충분하다면 무엇이든 구매가 가능한 위치.
[보유 공헌도: 605]
에일의 공헌도는 605, 레벨 대를 생각하면 상당한 숫자였다.
만약 PVP와 보스 사냥을 통해 다수의 이단과 신성 모독자를 잡지 않았더라면, 또 여신이 직접 내린 퀘스트를 받지 못했더라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수치였다.
에일은 상점창이 나타나자마자 곧장 미리 생각해 놨던 아이템을 선택했다.
보스를 앞에 둔 상황에 여유롭게 쇼핑이나 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구매가 완료되었습니다!]
[상급 추방 스크롤 - 16Lv]
[공헌도, 600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에일이 주저 없이 고른 물건은 바로 마법 스크롤.
그중에 앞에 붙은 ‘상급’이라는 수식어는 스크롤의 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밸런스를 해치지 않기 위해 기본적으로 공헌도 상점에서 구매한 대부분의 소모성 아이템은 레벨에 따라 효과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해진 같은 레벨 대 사이에서도 효력에 따라 등급이 나뉘었고, 최하급부터 특급까지의 등급이 존재했다.
똑같은 효과를 지닌 스크롤이라도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는 만큼, 에일은 다소 큰 지출을 감안하고 많은 공헌도를 사용해 상급 스크롤을 골랐다.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보스 상대로 할 땐 이 정도쯤은 써줘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휘리릭!
스크롤이 바닥에 넓게 펼쳐졌고, 그 위에 에일이 손을 올렸다.
그가 선택한 아이템은 신성 마법, ‘추방’이 담긴 스크롤.
악마나 언데드 계열의 몬스터, 혹은 빛의 교단이 지정한 이단에 한해 강력한 데미지를 입히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원래 석상을 상대로는 효과가 없을 테지만, 조금 전 사용한 ‘이단 지정’ 스킬과 시너지가 맞아떨어져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파아앗!
에일이 펼쳐진 스크롤 위에 손을 올리자, 그 안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거인 석상에게로 뻗어졌다.
빛에 감싸진 석상은 충격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녀석의 표면이 끓으며 흘러내렸고, 실제 체력상으로도 상당한 데미지를 입고 있었다.
빛이 유지되는 동안 지속 피해와 방해 효과까지 적용되니, 둔화 저주와 합쳐져 전황을 반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저건…….’
알리사가 갑자기 등장한 스크롤과 상위 신성 마법에 놀라 바라봤지만, 지금은 신속한 행동이 우선이었다.
그녀는 에일에게 마저 치유를 걸어줘 체력을 모두 회복시킨 뒤, 거인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빙 돌았다.
에일 역시 단번에 박차고 나가 녀석을 몰아붙였다.
상급 추방 마법의 지속 시간은 25초.
그 안에 최대한 해결을 봐야 했다.
카가가가각!
거대한 석상이 발악하며 마구 날뛰었고, 주위 기둥과 바닥을 박살내며 침입자들을 노렸다.
하지만 방해 효과에 둔화 저주까지 당한 녀석의 움직임으로는 그들을 정확히 노릴 수 없었다.
거기다 추방 마법이 거인 석상의 단단한 표면을 녹여 방어도까지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았고, 보스 공략은 더욱 가속화됐다.
거인이 거칠게 날뛰는 난장판 속에서도 끊임없이 데미지를 넣고 있는 에일과 정확히 그의 반대편을 돌며 거드는 알리사의 움직임.
양옆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에 석상의 체력은 처음의 기세와 달리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추방 마법이 끝날 마지막 시점.
쿠웅!
굳건하던 석상의 한쪽 다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대로 녀석의 체력 게이지는 어느새 한 자릿수 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일은 이제 완전히 끝을 내려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녀석이 여태껏 보이지 않던 두 번째 패턴을 드러냈다.
콰앙!
순간 거인 석상이 새빨개진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땅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로 인해 생겨난 충격파가 내부의 모든 기둥을 박살냈고, 요란한 진동이 방을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궁!
천장에 급격하게 생겨나는 균열과 그로부터 떨어지는 파편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에일과 알리사는 서둘러 거인으로부터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석상이 행동을 멈췄어요.”
알리사가 거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주먹으로 바닥을 한 차례 내려친 녀석은 그 자리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기술의 반동인지 마지막 체력을 소모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당장 놈이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 위험해 보이는데요.”
에일이 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거인 석상이 발산한 마지막 광역기에 기둥이 모조리 무너진 탓에 방 전체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중이었다.
짧은 대화 사이에도 앞뒤로 떨어진 커다란 파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게 해 줬다.
하지만 이제 와서 조짐을 알아챘다고 해도 이대로 방 밖으로 빠져나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방 전체가 흔들려 무너지지 않을 만한 위치도 없었다.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는 상황.
콰르르르!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고, 마땅한 대처를 취하기도 전에 천장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만한 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데에 휘말린다면 당연히 레벨이든 뭐든 상관없이 압사 확정이었다.‘아니, 겨우 26짜리 보스한테 이런 패턴을 만들어놔……?’
시시각각 쏟아지는 바윗덩어리들 사이에서 에일은 당황스러움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보통 이 정도 레벨의 보스를 상대하는 저레벨 유저라면 아직 가지고 있을 스킬이라고는 기초 스킬밖에 없는 데다가, 장착하고 있는 아이템도 특출한 효과가 없을 시점.
대응법도 거의 없는 저레벨 유저에게 이만한 패턴은 그냥 모르면 맞고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워로드가 던전과 보스별로 난이도가 천차만별이라 해도, 이만한 패턴들은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른 뒤에야 겨우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에일에게는 한 가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알리사 님!”
소리친 에일은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
“앗……?”
갑작스러운 힘에 스르륵 딸려온 알리사를 에일은 품속으로 힘껏 끌어안았다.
쿠구궁!
천장이 바닥 전체로 무너져 내렸고, 둘이 서 있던 곳 역시 떨어진 바위들로 겹겹이 뒤덮였다.
그리고 방 안은 고요한 적막이 가라앉았다.
* * *
“콜록콜록!”
알리사는 커다란 바위 틈 사이에서 겨우 머리를 빼냈다.
한차례 무너져 내린 방 안, 온통 날리는 먼지에 기침을 했지만 곧 차가운 공기를 폐 속에 불어넣을 수 있었다.
“후아!”
꾸역꾸역 기어오른 알리사의 뒤에서 에일도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기는 했지만, 이 두터운 바위들 사이에 깔렸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한 몸 상태였다.
꼼짝 없이 죽는 줄만 알았던 상황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에일이 끼고 있는 장신구들 덕이었다.
‘혹시 몰라 아껴 놓았길래 망정이지… 처음 공격을 막는 데 사용했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어.’
바위 위에 올라선 에일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검은 수정 장신구의 3피스 세트 효과, 모든 공격을 1회 무효화하는 것.
무너지는 천장 아래 깔리기 직전, 에일은 장신구 세트의 효과를 발동시켰고 그의 주변에 검은색 방어막이 나타나 충격을 흡수해 줬다.
석상을 공략하며 효과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녀석이 처음 보는 보스인 만큼, 미리 사용하지 않고 예상치 못한 패턴에 대비하려 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설마 이런 패턴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어쩌다보니 절묘한 수가 되었다.
츠츠츠.
알리사의 치유 스킬이 발동되어 둘의 체력을 회복되었다.
그리고 바위의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지하 유적지 전체가 무너진 건 아니었다.
방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만 했지 그 이상의 연쇄작용은 없었다.
이 정도 충격은 버틸 수 있게끔 설계를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듯했다.
“기껏 힘들게 잡았는데 보상은 물 건너갔네요.”
에일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처리한 석상은 움직임을 멈췄지만, 두터운 잔해 아래에 완전히 깔려 모습을 볼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이 잔해 더미 속에서 아이템을 루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하, 살아남은 것만 해도 어디에요.”
그녀의 말대로 방금의 상황에서는 죽음을 모면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템의 효과로 첫 타격을 무위로 돌렸다 해도 연달아 떨어지는 낙석에 당할 위험도 있었고, 목숨을 건졌다 해도 잔해 속에 파묻혀 꼼짝없이 갇힐 수도 있었다.
이렇게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행운이 따라줬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석상을 쓰러뜨린 경험치는 착실히 들어와 레벨이 하나씩 올라갔다.
물론 에일의 경우, 이단을 처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헌도와 각종 전용 스탯들까지 정상적으로 올랐다.
여태 모은 공헌도를 탈탈 털어 써버린 것은 아깝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아 데스 페널티를 피하는 것이었으니 스크롤의 값어치는 충분히 있었다.
“우선 다른 통로가 있나 찾아봐야 하는데…….”
이렇게 천장이 무너져 내린 상황에 원래의 통로는 당연히 꽉 막혀 있었다.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도, 반대편의 출구도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에일 님, 저기……!”
그때, 알리사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빽빽이 쌓여 있는 잔해들 위로 벽면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는 두터운 천장 속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을 위치였지만, 지금은 모조리 무너져 내린 탓에 모습이 드러난 작은 통로가 있었다.
딱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깔끔한 모양새를 보아 단순 균열로 인해 만들어진 구멍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고, 이 방을 건설하며 미리 만들어 둔 것이 확실했다.
마치 무너져 내릴 걸 예상이라도 한 듯한 통로의 위치.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양쪽으로 나 있었다.
유적 내부로 향하는 통로와 다시 밖으로 나갈 통로까지 지어져 있는 모습이었고, 그를 본 에일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애초부터 침입자와 함께 산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파수꾼이었다는 건가.’
지형 파괴를 전제로 한 모습.
시나리오 던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방식이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필드 던전은 결코 흔치 않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과 당혹스러운 패턴의 보스.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잔해 더미를 넘어 내부로 향하는 통로에 다가섰다.
이제 이 끝에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직접 확인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