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유적지 (3)
드드드득!
에일과 알리사는 커다란 문 틈 사이를 막은 잔해를 치우며 두 번째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미로에서는 예상대로 여기저기 놓인 악마 모양의 조각상들이 튀어나와 몬스터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투명화 포션의 효력 덕에 놈들과 아무런 마찰 없이 무사히 통로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석상들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깨달아 괜히 사서 고생을 해 버렸다.
둘 모두 투명화된 상태라 서로가 보이지 않아, 미로 속을 헤맬 때 소통할 방법이 없어 굉장히 난처했고, 뜻하지 않게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면 서로의 &팔을 잡아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중간에 놈들의 특성을 깨닫고 나서야 대화를 하며 길을 찾아 움직였지만, 상당히 애를 먹었던 점이었다.
아마 끝까지 몰랐다면 문틈을 막은 잔해를 치우는 데에서도 소음이 발생할까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이곳이 마지막 통로인가…….’
안으로 들어선 에일이 주변을 바라봤다.
미리 추측한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통로였는데, 직접 보는 모습으로는 통로라기보다는 홀에 가까워 보이는 굉장히 넓은 원형의 방이었다.
빛바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깨져 있는 바닥, 촘촘하게 들어선 기둥들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거인의 석상.
동굴에서 상대한 보스 가하르처럼 엄청나게 큰 정도는 아니었지만,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에일보다도 두 배는 커 보이는 키였다.
이전 통로의 녀석들과 똑같이 엉망으로 부서져 있는 석상은 군데군데 깨진 흔적 말고도 머리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에일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드드드득!
딱딱하게 굳어 있던 거인이 번쩍 눈을 뜨더니 팔을 들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까지와는 달리, 불과 한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26레벨의 망가진 고대 거인 석상.
상태창을 확인하자 그들에 비해 레벨이 상당히 높은 녀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직접 공격을 가했을 때 표기된 체력 바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따로 시험해 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견적을 내기는 무리였지만, 딱 봐도 손쉽게 끝날 것 같은 녀석은 아니었다.
“그냥 상대하지 말고 지나가죠.”
혹시 몰라 알리사가 조그맣게 말하자, 에일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그녀도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고, 말없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깨어난 거인 석상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말소리를 못 들을 가능성이 컸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선 확실하게 해 두는 편이 좋았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잠자코 지나가려는 에일과 알리사는 거인 석상과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게 옆으로 슬쩍 돌아 빙 둘러갔다.
하지만 몸을 삐걱이던 거인 석상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움직이더니, 그들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려찍었다.
‘무슨……!’
콰아앙!
강하게 내려쳐진 석상의 주먹이 그들이 지나던 바닥을 움푹 파헤쳐 놓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내던진 둘은 겨우 휘말리지 않고 주먹을 피했지만, 방금 건 명백히 자신들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이었다.
마치 그들이 있던 위치가 훤히 보이기라도 하듯이.
“왜지……?”
장검을 빼든 에일이 중얼거렸다.
분명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말소리조차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그 잠깐의 속삭이는 대화를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망가진 석상 주제에 감각이 특출할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녀석에게 감지와 관련된 특성이 있다고 봐야 했는데, 이 정도 레벨 대에 그런 옵션이 붙어 있는 몬스터는 여태껏 존재한 적이 없었다.
탐지 능력은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간 다음부터나 몬스터에게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능력 중 하나였다.
“흐억……!”
그렇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시점, 갑자기 알리사가 그를 뒤에서 잡아당기자 에일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로 딸려 갔다.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석상이 휘두른 주먹에 방 안에 있던 기둥 하나가 박살났고, 기둥의 파편들이 에일이 있던 곳을 사납게 덮쳤다.
하지만 둘은 미리 몸을 빼낸 덕에 그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에일은 녀석의 주먹이 엉뚱한 곳으로 향하길래 잠시 방심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설마 기둥을 부수면서 생기는 파편을 무기로 사용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싸워야겠네요.”
투명화가 통하지 않는 이상 싸우지 않고 석상을 따돌리기란 무리처럼 보였다.
어떻게 이 방을 지나 유적 내부로 도망친다고 해도 녀석이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스르륵.
마음이 맞은 둘은 거의 동시에 포션의 효과를 해제해 투명화를 풀었다.
어차피 녀석이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면 투명화는 서로의 위치를 모르게 만들어 방해만 될 뿐이었다.
때마침 거인의 석상은 주변을 요란하게 부숴가며 파편을 쏘아냈다.
대부분의 공격은 알리사에게 향했다.
먼저 파티의 힐러부터 노려 제거하려는 듯한 전략.
돌로 된 머리조차 없는 녀석답지 않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었다.
하지만 알리사는 쏟아지는 수많은 파편들 사이에서 무난하게 몸을 놀려 공격들을 피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확보된 상황에 불규칙하게 날아오는 파편 정도로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다.
거기다 그녀가 시간을 벌어준 사이, 에일에게는 자연히 수를 정리할 여유가 생겼다.
재빠르게 떠오른 견적들이 그의 머릿속을 여러 차례 오갔다.
수를 확정 지은 에일은 우선 검을 뻗어 석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스킬.
‘이단 지정.’
치잉!
석상의 몸통 위에 섬뜩한 붉은빛 표식이 번뜩이며 나타났다.
이단임을 가리키는 빛의 교단의 낙인.
분명 그의 앞에 선 거인 석상은 이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단의 교리를 부정할 만큼 사악한 존재도 아니었고, 죽은 자가 되살아난 언데드도 아니었다.
단지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는 석상으로, 처음 마주했을 때도 녀석에겐 이단의 낙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도’인 에일의 전용 스킬, ‘이단 지정’이 있는 이상 그런 이야기는 무의미했다.
에일은 여신에게 사도의 자격을 받은 몸이었고, 이단의 자격조차도 ‘루’의 선택 없이 제멋대로 판명할 수 있었다.
실제 교단의 교리를 따르는지 아닌지, 선량한 자든 악인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사도가 죄를 뒤집어씌우면 그자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역시 보스 몬스터 판정이었군…….’
다행히 스킬이 먹혀들자 에일이 생각했다.
상대가 일반 몬스터인 경우 어떤 방식이든 이단의 낙인이 부여될 수 없기 때문에, 이단 지정은 오로지 보스나 정예 몬스터 혹은 플레이어를 상대로만 사용 가능한 스킬이었다.
석상이 추가 데미지를 받는 이단 상태가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였다.
검을 치켜든 에일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를 노린다거나 사선으로 움직이는 것 없이 굉장히 정직한 움직임이었고, 그에 걸맞게 석상 역시 정직한 공격으로 답해 왔다.
후웅!
에일을 향해 휘둘러진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이번엔 알리사도 그 모습을 보고서 놀라지 않았다.
파앗!
갑자기 사라진 에일의 모습.
희귀 스킬, 역극을 통해 석상의 등 뒤에서 에일이 나타났다.
하얀 불꽃이 붙은 장검의 칼날이 역극의 부가 효과인 가속까지 붙어 석상의 등을 강타했다.
콰득!
하지만 그가 원하던 시원시원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녀석의 방어력이 예상으로 높아 장검이 잘 박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검에 붙은 하얀 불꽃, ‘성화’만큼은 석상에게도 무시하지 못할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이단으로 지정된 거인 석상은 자연스럽게 ‘악’성향이 강제 부여되어 성속성에 큰 피해를 입었고, 무기에 화속성과 성속성을 동시에 부여하는 성화는 석상의 두터운 표면에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일의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콰악!
통곡의 단검이 석상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박혔고, 화면 구석에 놈이 걸린 디버프가 주르륵 올라왔다.
단검의 저주.
데미지 자체는 장검과 마찬가지로 얼마 들어가지 않았지만, 공격에 당한 석상의 움직임이 둔화되며, 에일에게서 받는 데미지가 증가한다.
이단을 대상으로 강력한 피해를 입히는 ‘성화’와 데미지를 증폭해주는 ‘증오의 칼날’ 스킬과 합쳐진다면 몬스터와의 레벨 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거인 석상은 그의 생각보다도 민첩했다.
둔해 보이는 덩치와 다르게 순식간에 돌아간 녀석의 허리는 어느새 에일을 향해 있었다.
역극 스킬엔 아직 약간의 쿨타임이 걸려 있는 상황.
콰앙!
주먹에 얻어맞은 에일이 한참을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고작 한 대를 얻어맞은 게 전부였지만 체력이 아슬아슬했다.
“퉷.”
에일이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둔화에 걸리고도 저만한 속도라니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만약 광기 스탯과 여신의 총애 버프로 에일의 전투 관련 스탯들이 뻥튀기되어 있지 않았다면 일격에 사망했을 지도 모르는 데미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해볼 만하다.’
피격과 동시에 연달아 들어온 치유 마법이 어느새 에일의 생명력을 60퍼센트 이상 채워 놓은 상태였고, 지속 회복까지 걸려 있어 빠르게 체력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체력을 회복시켜준 알리사는 다음 치유를 위해 마나 포션을 들이키고 있었다.
우선 방금 두 번의 공격, 그리고 한 번의 피격으로 확인을 해 본 결과.
거인 석상에게 피해가 어느 정도 들어간 것을 보니, 가하르와 달리 물리 내성 같은 괴악한 특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의 레벨이 이쪽에 비해 한참이나 높은 축이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26레벨 대의 다인 파티가 필요하도록 설계된 수준의 보스는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상대로 볼 수는 없었다.
동 레벨 대에서도 최소 중위권은 될 만한 스펙.
또 아무리 약하다 한들 26레벨의 보스가 평균 레벨이 고작 18밖에 되지 않는 2인 파티로 간단히 해결될 상대는 아니었다.
그를 증명하듯 아직 거인 석상의 체력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에일에게는 녀석에게 대항해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다른 카드가 있었다.
그동안 사냥을 해 오며 착실히 모아온 비장의 수가.
[사도 특전, ‘공헌도 상점’이 열립니다!]
[사도의 자격으로 지역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