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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32화 (32/227)

32화 유적지 (1)

‘몰랐던 이유가 있었군.’

목적지인 블랑쉬 고원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에일은 남는 시간에 지하 유적지에 대해 직접 찾아봤고, 왜 자신이 유적지에 대해 전혀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인지 금세 납득했다.

고원 지하에 위치한 힐스베다 유적지는 6개월 전, 탐험을 위주로 숨겨진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한 유저가 발견한 곳이었다.

지하에 꽁꽁 숨겨져 있던 거대한 유적지.

당연히 대박의 기운을 느낀 유저는 이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놀랍게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쓸모없는 잡동사니들과 텅 빈 공간뿐.

아이템과 골드, 감정이 필요한 유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다른 퀘스트와 연관된 조그만 단서나 하다못해 워로드의 배경 스토리를 알 수 있는 조사거리조차 존재하지 않아 정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허탕만 치고 돌아간 유저는 시간만 소비했을 뿐 끝끝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커뮤니티에 한탄 글을 올렸고, 에일은 그 글을 찾아내 유적지와 엮인 사연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라…….’

사냥터와 퀘스트 장소, 채집터, 거주 지역조차 되지 못하는 장소.

보통 이런 종류의 유적들은 여행을 좋아하는 유저들 사이에서나 생생한 유적지와 정교한 유물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블랑쉬의 지하 유적은 그러한 용도로도 쓰이지 못했다.

유적지는 무언가에 의해 파괴되어 있었고, 남아 있는 거라곤 망가진 석상들이 전부였다.

볼거리가 없으니 사람들의 관심과 발걸음도 없었고, 에일의 머릿속에도 아무런 정보도 들어 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워로드에서 이런 유의 지형들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그 장소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추후 있을 사건이나 퀘스트에 연결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후자라고 봐야겠지.’

거물급 네임드 NPC가 아무런 용건도 없이 이런 곳에 직접 행차했을 리는 없다.

숨겨진 퀘스트가 있건 NPC 개인의 사연이 얽혀 있건 간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른 마차가 자리에 멈춰 서자 에일은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멋진 곳이네요.”

뒤를 이어 내린 알리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막히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여 있는 고원은 보고만 있는 것으로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푸른 하늘 아래에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초록빛의 평야에서 지하 유적지를 찾아내야 했다.

뭔가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지형이었지만, 워로드에서 그런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파앗!

에일은 품속에서 기록석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만들어냈고, 둘은 주저 없이 그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빛이 살짝 아래로 기울어진 걸 보아, 들었던 대로 지하에 위치한 건 확실해 보였다.

“도착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겠네요.”

“그건 어떻게 알죠?”

“빛의 세기로 가늠할 수 있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기록석의 빛줄기가 강해집니다.”

에일이 빛을 뿜어내는 돌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자 알리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봤다.

원래 기록석이라는 물건은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기록석 자체가 굉장히 값비싼 건 물론이고, 좌표를 등록하는 데에도 상당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지금처럼 유저들에게 고작 퀘스트 장소를 한 번 안내하는 데 사용되는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도 단순히 존재한다고만 들었지 자세한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에일은 기록석에 대해 따로 찾아보지도 않고서도 그에 대한 것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저번에 산맥을 넘는 통로를 찾아내신 것도 그렇고, 정말 많이 알고 계시네요.”

“뭐… 워로드에 관심이 많았었죠. 정작 플레이는 사정이 있어서 1년이나 늦어 버렸지만.”

에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그녀의 눈빛엔 자그맣게 이채가 서렸다.

“혹시 에일 님은 랭커가 될 생각이신가요?”

알리사가 질문을 던졌다.

어떤 일을 하건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려는 모습도 그렇고, 퀘스트와 사냥에 임할 때 더없이 진지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일반 유저의 플레이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맞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

에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단지 그 뿐만이 아니라 에일은 워로드 내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1년이나 늦은 지금 시점에 아무리 노력해서 최대한 따라잡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랭커들이 가만히 기다려줄 리도 없었으니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사도 시스템에 대해 모르고 있는 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어림도 없다며 비웃음을 사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인 알리사는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에일 님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 * *

기록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자 에일의 예상대로 오래 걸리지 않아 드넓은 고원의 한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한 빛이 아래를 가리키자 주변 땅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바위 아래에 단순히 작은 균열처럼 보이던 틈새에서 인위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균열 주변을 조금씩 파헤친 흔적과 함께, 딱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다.

당시 유적지를 찾아냈다는 유저가 그 안으로 들어간 흔적일 거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바위 뒤편에 위치한 데다가 내부가 굉장히 어두워서 바깥에서 구멍 내부를 살피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위치는 확실하고 입구도 발견되었으니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그 안으로 조심스레 에일이 먼저 발을 내딛었고, 알리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바닥에 엎드려 밀착한 채 그의 한쪽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낙사할 만큼 구멍이 너무 깊다거나, 내부에 내려서기도 전에 바로 공격할 만한 몬스터라도 있다면 서둘러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타악!

다행히 몸이 다 내려가기도 전에 발 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네, 문제없어 보입니다.”

바닥에 내려선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횃불을 꺼내 들어 불을 지폈고, 밝은 빛이 주변을 비췄다.

그가 내려선 곳은 커다란 바위 절벽의 위.

에일이 디디고 있는 자리의 바로 앞에는 크레바스처럼 가파른 절벽이 양옆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발을 잘못 헛디뎠다간 그대로 게임이 오버될 만큼 깊은 낭떠러지였다.

공포에 어느 정도 내성이 붙도록 플레이어의 감각이 조절되기는 하지만, 오금이 저리는 아찔한 감각만큼은 가감 없이 그대로였다.

‘이제 이걸 어떻게 내려간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일이 고민했다.

전문 탐험가가 아닌 만큼 탐험용 로프 같은 아이템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적당히 내려갈 만한 경로도 보이진 않았다.

그때 뒤따라 내려온 알리사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면 될 것 같네요.”

절벽 끝자락에 위치한 굵고 기다란 초록색 덩굴.

사람을 지탱할 만큼 튼튼해 보였고, 길이도 내려가기엔 충분해 보였다.

혹여나 횃불이 식물을 태울까 꺼뜨린 뒤에, 그들은 가파른 절벽에 늘어진 덩굴을 타고 내려갔다.

무성한 덩굴을 타고 짙은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지 않게 내려가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큰 실수 없이 주의하며 절벽을 내려갈 수 있었고, 곧 은은한 불빛이 비추고 있는 바닥과 마주했다.

“읏차!”

무사히 절벽의 아래에 선 에일은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우선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은은한 푸른빛 덕에 예상외로 횃불은 필요 없었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면서 대체 어디서 나온 불빛인 건가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빛이었다.

워로드의 오래된 지하 던전 혹은 구조물 중에 이런 케이스가 많은 편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실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굉장히 오묘하면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정확하게 찾아온 것 같네요.”

유적지의 입구를 마주한 에일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양옆으로 높이 치솟아 있는 거인 조각상들이 거꾸로 든 도끼를 땅에 댄 채 서 있었고, 그 가운데엔 웅장한 문이 위치해 있었다.

굉장히 오래된 듯 낡고 녹슬어 있었지만, 정말 사람의 손길로 만들어진 건지 의심이 갈 만큼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생긴 것으로는 고대 던전이라도 있을 법한 근사한 모양새였는데, 정작 아무것도 없는 빈 수레였다니 이것을 찾아낸 유저가 불쌍해질 정도였다.

아마 힘겹게 찾아낸 유적지에 대박을 직감하고 방방 뛰며 안으로 들어갔을 텐데, 정작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면 허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관련 NPC에게 푼돈이나 다름없는 정보료 조금 받은 것을 빼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걸 생각하면 인터넷에 푸념 글을 올린 것도 이해가 갔다.

에일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입구에 감탄하고 있던 알리사는 어느새 사진기를 꺼내 들어 주변 풍경을 담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사진기는 따로 구매해야 하는 아이템도 아니었고, 언제 어디서든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모든 유저에게 내장된 기능이라 에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다만 사진 찍는 취미 같은 건 없었기에 먼저 반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들어가 안을 살폈다.

입구의 안쪽은 기다란 일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유적지가 나타났기보단 유적지까지 통하는 통로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불과 통로에 들어왔을 뿐인데도 왜 사람들이 이곳을 찾지 않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단한 기세의 입구와는 달리 내부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최소 수백 년은 관리한 흔적도 없이 낡고 부서져 있으니 볼거리는 둘째 치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저 흔해빠진 지하 던전 같은 느낌에 존재하는 물건이라곤 양옆에 줄지어 늘어선 인간 모양 석상들뿐이었다.

하지만 그 석상마저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겨우 으스러지지만 않았을 뿐 원형을 알아보기엔 도저히 무리였다.

“쓸 만한 아이템도 없어 보이고… 이런 곳엔 뭐하러 온 거지?”

에일이 손을 뻗어 부서진 석상을 한 차례 쓸었다.

인적도 없고 몬스터도 없는 이곳에 세베라는 어째서 온 것인지, 또 왜 자신을 찾아오라 한 것인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아아!

“음……?”

저 안에서부터 낮게 불어온 바람이 에일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주변에 감돌았고, 손을 올려놨던 석상이 번쩍하고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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