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퀘스트 인 (8)
“끄응…….”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던 알리사가 부스스 일어났다.
갑자기 방의 바닥이 한꺼번에 무너지더니 지하 아래로 깊숙이 떨어지는 걸 느꼈는데 어디론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은 그녀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더듬었다.
그러자 엎어져 있던 에일도 일어나 그녀를 발견했다.
“알리사 님?”
“에일 님도 무사하셨네요. 다행이에요.”
“네, 그런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니…….”
알리사가 주섬주섬 인벤토리를 뒤졌다.
화륵!
그리고 기름이 발라져 있던 간이용 횃불에 불꽃이 붙었다.
횃불에 붙은 불은 주위를 환하게 비췄고,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커다란 동굴의 광경을 그대로 들춰냈다.
“여긴 대체…….”
죽은 사람의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작은 언덕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엄습해 왔던 고약한 악취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의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나리오 퀘스트 발생!]
[제한 시간 내에 던전을 무사히 빠져나가십시오.]
[남은 시간 ‘0:29:58’]
딱딱딱!
사방에서 뼈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골이 된 망자, 스켈레톤.
놈들이 주변 공간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시나리오 던전이었나…….”
에일이 검을 들며 중얼거렸다.
시나리오 던전.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닌 던전 안에서 별개의 시나리오가 진행되며 그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방식의 던전이었다.
일반적인 던전에 비해 보상은 컸지만 까다로운 경우가 많았다.
왜 저레벨 보스인 가하르가 물리 내성 같은 흉악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난이도가 그렇게 높았던 것인지 확실히 이해가 갔다.
알리사는 재빨리 주변의 몬스터들에 대한 정보를 읽어 들였다.
“불완전한 스켈레톤……? 레벨은 높지 않아요.”
“숫자가 좀 많긴 한데, 정리하고 가도록 하죠.”
화르륵!
에일이 성화를 활성화하자 장검에 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하얀빛은 주변을 더욱 환하게 밝혔고, 휘두르는 검의 궤적에 따라 강렬한 불길이 일며 몬스터를 쓸어버렸다.
녀석들은 언데드답게 신성을 띈 불꽃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부실한 해골들이라 그런지 타격계 공격에 더욱 큰 피해를 입는 모양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아 쉽게 끝나지는 않았지만 둘은 놈들의 숫자를 빠르게 줄여 나갈 수 있었다.
가하르를 상대하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콰직!
스태프를 휘둘러 마지막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박살낸 알리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칙칙한 동굴의 넓은 방 안은 모두 정리가 된 듯 보였지만, 유일한 통로로 보이는 한쪽의 공간이 뚫려 있었다.
들려오는 딱딱거리는 소리로 보아 너머엔 다수의 해골 몬스터들이 포진해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불빛에 반응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에일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중에 보이는 반응도 그렇고, 그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다가 횃불을 킨 동시에 일제히 움직이는 걸 보아, 언데드 주제에 밤눈이 어두운 모양이었다.
“느긋하게 사냥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네요.”
빠져나가라는 지시가 즉석에서 퀘스트로 발생했고, 시간 안에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무언가 감당 못 할 이벤트가 발생할 수 있었다.
여태 단 한 번도 공략된 적 없는 던전인 만큼 그들로서는 안전하게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최우선으로 여겨야 했다.
몬스터들의 숫자와 주어지는 경험치는 일반 던전을 웃도는 수준이었지만, 주어진 시간은 고작 30분.
쓸데없는 욕심은 접어 둬야 할 때였다.
치이익!
둘은 횃불과 성화를 동시에 꺼뜨리며 어둠 속에 동화되었다.
물론 스켈레톤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어느 정도 피하는 대신, 그들까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바로 입구 앞에서 만들어 두었던 묘안의 비약.
포션을 삼키자 어두운 동굴 내부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고,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수준까지 되었다.
“자, 시작해 보죠.”
* * *
콰직!
일행은 어둠 속에서 눈먼 스켈레톤들을 농락하며 박살냈다.
물론 놈들은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도 반응해 몰려들곤 했지만, 어둠 속에서 한데 엉켜 허우적거리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종종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많은 숫자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런 지점들은 적당히 몸을 숨기며 피해 갔다.
그렇게 그들은 복잡한 동굴 내부를 샅샅이 뒤져가며 출구를 찾았고, 바위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파앗!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남은 시간 ‘0:04:11’]
동굴을 빠져나오자마자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적지 않은 양의 골드와 경험치가 들어왔다.
최대한 빨리 빠져나온 것인데 남은 시간은 불과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역시 갑자기 나타났던 중간 보스 격의 몬스터가 어둠 속을 훤히 간파하며 애를 먹게 한 탓에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얼굴이 새까맣게 칠해진 에일과 알리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지만 곧 자신의 얼굴도 똑같을 거란 걸 깨닫고는 웃음을 꾹 참았다.
‘역시 산맥 바깥까지 와버린 건가.’
에일이 시선을 올리자 던전에 진입하기 위해 힘겹게 올라갔던 산맥의 가파른 비탈길이 쭉 펼쳐져 있었다.
콰르르르!
빠져나왔던 동굴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역시나 재입장 같은 건 불가능하게 만들어 두었고, 아마 시간 안에 빠져나오지 못했더라면 저 안에 깔려 그대로 사망했을 것이다.
‘뭐, 일단 필드로 나온 이상 뭔가가 더 있지는 않겠지.’
최소한 이번 던전의 공략은 이것으로 끝이 났고, 그로부터 챙길 만한 보상도 충분히 챙겼다.
이제 남은 건 세베라에게 돌아가 이번 퀘스트에 대한 설명을 듣는 일뿐이었다.
* * *
끼익!
문이 열리고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퀸즈 블론즈에 도착한 에일과 알리사는 다리 밑 블러디 핸즈의 아지트에 찾아갔고,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보초역의 조직원 덕에 별다른 문제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내부의 대략적인 구조와 세베라의 방 위치라면 이미 한 번 본 것만으로 완벽히 숙지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안내 없이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방에 다다르자, 정작 찾던 세베라는 없었다.
책상 위 서류 더미에 머리를 처박은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한 남자가 뒤늦게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두 분 다 처음 뵙는 분들이신데 여기까지 무슨 용건이신지요?”
“의뢰 건 때문에 이곳 지부장을 찾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찾아오실 거란 이야기는 먼저 전해 들었습니다. 에일 님과… 알리사 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말을 늘이면서 뭘 뒤적거리고 있나 했더니 그들이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 간단하게 작성했던 서류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세베라 님의 노예나 다름없는 루펜입니다.”
“아하하…….”
자기비하가 담긴 루펜의 말에 알리사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에일은 상대가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블러디 핸즈, 퀸즈 블론드 지부의 루펜이라면 말은 저렇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네임드 NPC였다.
지부장 중에서도 상당한 거물급인 세베라를 직속으로 보좌하며 오른팔 역을 맡고 있으니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신뢰하는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온갖 작업을 맡기며 부려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눈 아래로 주욱 늘어진 다크서클이 보였다.
“안타깝게도 세베라 님이라면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어디로 간 거죠?”
“블랑쉬 고원에 계십니다. 그쪽 지하 유적지에 볼일이 생기셔서 곧바로 돌아오시진 못할 겁니다.”
“으음…….”
그의 대답에 에일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번 퀘스트 조건이 엇나간 것에 대해 설명을 듣는 동시에 연계 퀘스트의 유무에 대해서도 확인하고 싶었는데 늦어질 듯했다.
다른 게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첨단 인공지능이 탑재된 워로드의 NPC들은 당연히 한곳에 틀어박혀 있지만은 않는다.
식사와 수면을 취하는 것은 물론 유저들과 다를 바 없이 생업을 이어가며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도 한다.
다만 이번에 문제인 점은 세베라가 향했다는 유적지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블랑쉬 고원이라면 이곳에서부터 멀지 않은 곳이란 건 알았지만, 유적지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가 나오는 사냥터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식으로든 쓸모가 있는 지역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는데, 갑자기 거대 조직의 지부장씩이나 되는 세베라가 그런 곳엔 왜 갔는지 의문스러웠다.
혹시 알리사가 알고 있나 싶어 시선을 슬쩍 흘렸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번에도 에일이 알고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빤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에일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흠흠… 이렇게 된 거 그냥 여기서 기다리죠.”
“그럴까요?”
어차피 이미 완료한 퀘스트의 보상을 받는 게 당장 시급한 것도 아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까지 가면서 동선 낭비를 할 바엔 도시에서 정비나 하면서 세베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루펜은 난색을 표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안됩니다!”
“안된다고요?”
“그게… 죄송하지만 세베라 님이 떠나기 전에 두 분께서 반드시 직접 자신을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왜죠? 시간이 오래 걸리기라도 하나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 분은 원래 이런 일거리를 많이 주셔서… 자자! 아무튼 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루펜이 무작정 그들의 등을 덥석 떠밀었다.
“자… 잠깐! 위치는 제대로 알려줘야……!”
* * *
덜컹!
등을 떠밀린 그들은 반쯤 쫓겨나듯이 바깥으로 내보내졌다.
아지트 입구가 있는 다리 밑을 지나 길거리까지 나온 그들은 블러디 핸즈에서 손에 쥐여 준 아이템 하나를 들여다봤다.
에일의 손바닥 위엔 푸른 문양이 빛나는 조그만 돌이 놓여 있었다.
“좌표가 적힌 기록석이에요.”
알리사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돌 위에서 뻗어진 빛은 희미하게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록된 목적지가 있는 방향으로 위치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뺑뺑이가 아니라 또 다른 연계 퀘스트였군.’
에일이 흥미롭게 기록석을 내려다봤다.
단순히 보상 수령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 아이템을 들려줄 필요도 없었고, 반드시 그들에게 먼저 찾아가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여태껏 발견된 적 없는 지형과 맞물려 있는 연계 퀘스트의 개념으로 보는 편이 맞았다.
“어디, 진짜 보상을 받으러 가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