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퀘스트 인 (6)
촤아악!
뒤로 훌쩍 물러난 에일이 바닥을 끌며 멈춰 섰다.
정확히 공격을 적중시켰고, 일시적인 경직을 먹이는 데도 성공했지만 일단은 여기까지였다.
추가타를 더 넣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욕심 부리지 않았다.
‘후, 적혀 있던 대로 마나 소모량이 엄청나네.’
자신의 남은 마나량을 확인한 에일이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고작 회피 스킬 하나를 사용했을 뿐인데 최대치였던 마나가 사분의 일가량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가 마력 스탯에는 아무런 투자를 안했던 탓도 있었고, 스킬이 그 성능만큼이나 마나가 많이 필요한 녀석이란 점도 있었다.
“이건…….”
그 모습을 목격한 알리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방금 에일이 사용한 기술은 분명 희귀 등급의 스킬, 역극.
그녀 또한 알고 있던 스킬이었다.
레벨 10에 배우는 첫 번째 스킬부터 희귀 등급을 손에 얻었다니, 절대 운이 좋은 정도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아아아!
가하르가 뼈밖에 안 남은 입을 쩍 벌리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감탄이나 대화를 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놈이 휘두르는 대검을 다시 한번 피한 에일은 앞으로 뻗은 녀석의 다리를 타격했다.
온몸이 뼈밖에 남지 않은 살점이 없는 상대라 베어 내는 건 무리였고 충격을 가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 했다.
하지만 부차적으로 감겨오는 가하르의 사슬을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바로 녀석이 육중한 대검을 한 손만으로 휘둘렀다는 점.
자유롭던 가하르의 왼팔이 뻗어졌다.
빠악!
육중한 주먹에 얻어맞은 에일은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순간적으로 반응한 에일이 급하게 몸을 틀기는 했지만, 끝에 걸쳐진 다리가 완전히 골절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게임이 끝난 건 아니었다.
츠츠츠!
하얀빛이 그를 감싸더니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알리사의 치유 스킬이었다.
거의 피격당함과 동시에 들어온 힐링은 가하르가 미처 접근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치명타 한 방에 끝날 수 있는 위험한 적을 상대하는 만큼 알리사도 항상 상황을 주시하는 중이었고, 언제나 에일의 체력을 100퍼센트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끔 적당한 치유 스킬을 걸어 줬다.
키리리릭!
늘어져 있던 사슬이 길게 휘둘러졌다.
처음만 해도 알리사에 관심 없던 가하르는 그녀가 치유를 시작하자 그쪽이 성가셔진 모양이었고, 정확히 그녀가 있는 방향을 노렸다.
콰아앙!
두터운 사슬은 역시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자랑하며 일대를 박살냈다.
방어력이 부실한 로브를 입은 데다가 체력 스탯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 치유사가 저 공격에 휘말렸다간 한 방에 즉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사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단 한 걸음만을 슬쩍 움직여서 여러 갈래의 사슬을 모두 피해냈다.
그녀 양옆으로 아슬아슬하게 파헤쳐진 땅.
그 위에서 침착하게 서 있는 알리사의 모습은 미리 정확히 사슬의 경로를 계산하고 있던 것이라고밖엔 볼 수 없었다.
파앗!
그 틈에 뒤에서 뛰어오른 에일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정통으로 일격이 들어갔고, 등 뒤를 얻어맞은 녀석은 앞으로 기우뚱 휘청거렸다.
이 정도 거체를 가진 몬스터에게 이끌어낸 반응으로는 훌륭했다.
‘…뭐지?’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가하르의 남은 체력을 확인하자 조금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세 번이나 성공적으로 일격을 가한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적은 수치였다.
몬스터와의 레벨 차이가 엄청난 것도 아니었고, 이번에 구매한 장검도 평균을 가뿐히 넘어서는 물건.
고작 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설마… 물리 공격 내성인가?’
에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만약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번 보스는 최악의 상대였다.
물리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는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마법사를 대동해야 공략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보스 중에서도 흔치는 않은 괴악한 특성이었다.
특히 당장 장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공격 수단이 없는 에일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치유사인 알리사가 나선다 해도 물리적 타격밖에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철저히 힐러 계열인 치유사라도 해도 보조 공격 마법을 나중 가서 익힐 수 있었지만, 지금 레벨 대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카가가각!
에일은 다시 한번 안으로 파고들어 가하르에게 공격을 가했다.
역시나 체력이 떨어지는 양은 미미했다.
이 정도 데미지 수치라면 물리내성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어렴풋이 의심만 하고 있던 알리사도 가하르의 특성을 완전히 눈치챈 듯 그를 쳐다봤다.
“물리 내성인 것 같은데 이번 공략 가능할까요?”
“예, 해봐야죠.”
에일이 장검을 바짝 움켜쥐었다.
다른 상황도 아니고 여기까지 와서 놓칠 수는 없었다.
콰과과과과!
이쪽 사정 같은 건 봐주지 않는 놈의 공격은 점점 더 거세졌다.
‘이거 어떻게든 해결해야 되는데.’
에일이 놈의 공격을 피해 가며 머릿속으로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당장 데려올 수 있는 마법사도 없었고, 임기응변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만한 지형지물도 없었다.
‘역시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나…….’
내성이라고는 해도 면역이 아닌 이상 데미지는 들어갈 테였고, 더욱 많은 타격을 가하면 그만.
실력과 집중력만 받쳐 준다면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단을 상대로 데미지를 25퍼센트나 증폭시켜주는 ‘증오의 칼날’ 패시브를 보유한 덕에 놈의 체력 바가 꿈쩍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물론 말로 떠드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방식으로 무식하게 돌파하려면 난이도가 몇 배나 어려워진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까득.
에일이 검을 바로 쥐었다.
* * *
콰앙!
“크윽……!”
휘둘러진 사슬에 빗겨 맞은 에일이 한참을 튕겨 나갔다.
날아간 궤적 그대로 벽에 부딪히며 2차 피해를 입었고, 주르륵 줄어든 체력은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만약 사슬에 맞자마자 알리사가 치유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게임이 끝났을 것이다.
‘이제 겨우 30퍼센트.’
놈의 체력을 확인한 에일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한 개체를 상대하는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 사투를 벌였지만, 이제까지 진행된 진도가 겨우 삼분의 일 수준이었다.
사실 물리 내성을 가진 적을 상대로, 꾸역꾸역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결과였다.
‘이거 큰일인데…….’
잡몹도 아닌 보스를 상대로 이렇게 싸움을 길게 가져가니,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넉넉히 준비했던 알리사의 마나 포션도 몇 개 남지 않았다고 신호를 보내왔고, 놈의 체력은 거의 70퍼센트가 남아 있었다.
스스스!
넓은 방 안에 갑자기 검은 안개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올라온 안개는 얼핏 보기에도 수상쩍은 기운을 풍겼다.
“두 번째 페이즈인가……?”
츠츠츠츠!
방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검은 돌.
그것에서부터 새까만 빛이 사방으로 뱀이 흘러가듯 뻗어나갔고, 땅이 쩌저적하고 갈라졌다.
갈라진 땅에서는 팔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시체들이 하나둘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돌의 힘을 받아 망자들이 부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방으로 수십은 되어 보이는 숫자.
보스의 체력 상태도 지지부진한데, 소환된 일반 몬스터가 수십이니 상황이 훨씬 더 암울해졌다.
애초에 이 던전은 설계 자체가 두 명이 쉽게 공략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알리사도 그를 깨닫고는 재빨리 소리쳤다.
“에일 님, 더는 무리에요! 이번 던전은 포기하는 게…….”
“아니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분명 훨씬 어려워졌을 상황.
하지만 에일의 입가엔 오히려 회심의 미소가 띄워졌다.
답이 없던 상황에서의 변수는 오히려 새로운 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사방에서 울부짖던 몬스터들 중 하나가 에일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는 뒤를 돌아 놈을 단칼에 베어 냈다.
목을 베인 망자는 뒤로 벌러덩 쓰러졌고, 그에 따라 에일의 경험치 바 끝부분이 주르륵 차올랐다.
보스가 패턴으로서 소환한 녀석이라도 엄연한 몬스터 취급이었으니 경험치가 자동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자 에일의 눈앞에 기다리고 있던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됐다……!’
마침 다음 레벨까지의 경험치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던 에일이 방금 몬스터를 잡아냄으로서 레벨이 올랐다.
이제 그의 레벨은 15.
새로운 기초 스킬을 습득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레벨 15를 돌파하였습니다! 기초 직업 스킬이 한 가지 활성화됩니다. 습득할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성화(기초)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좋아.”
순식간에 손을 놀려 스킬을 배운 에일은 미소 지었다.
이단심판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스킬, 성화.
그 진가가 드러날 시간이었다.
에일은 검을 들어 두 손가락을 그 위에 올렸고, 기다란 검신을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자 그의 장검에서 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화르르륵!
매끄럽게 뻗은 검신에서 하얀 불꽃이 붙어 타오르는 모습은 넋을 놓고 보게 될 만큼 아름다웠고, 일반 불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빛을 내뿜어 어두웠던 주변을 환하게 밝힐 정도였다.
하지만 자기 의지가 없는 시체들은 여전히 그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들었다.
콰아아!
에일은 불꽃이 붙은 검을 휘둘러 시체들을 갈랐다.
놈들의 신체를 절단하는 동시에 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엔 하얀 불길이 거세게 일었고, 주위에 있던 녀석들까지 함께 불태웠다.
신성과 화염 속성을 동시에 지닌 공격은 두말 할 여지없이 모든 언데드들의 천적.
강력한 데미지가 들어갔고, 시체들이 바스러졌다.
불꽃 속에 드러난 에일의 모습에 가하르마저 순간 멈칫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장 정신을 차린 가하르는 대검을 휘둘렀고, 난폭한 사슬이 그를 뒤따랐다.
카가가각!
대검과 사슬은 에일이 서 있던 주변 바닥을 산산조각 내며 위력을 뽐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에게 닿지는 못했다.
마나는 포션으로 미리 채워 뒀고, 거리도 충분히 좁혀진 상태.
파앗!
역극을 사용한 에일은 순식간에 옆으로 돌아 놈의 등 뒤에서 붕 떠올랐다.
가속은 충분히 붙었고, 알맞게 뒤로 빼둔 검을 앞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크아아……!”
가하르가 처음으로 고통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검에 베인 부위엔 하얀 불꽃이 타올랐고, 녀석에게 지속적으로 화상과 신성 피해를 입혔다.
녀석 역시 언데드인 건 마찬가지인 데다가, 성화로 인한 피해는 물리 내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법 피해였다.
공격 한 번에 주르륵 줄어든 녀석의 체력바가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 이 길었던 레이드를 끝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