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퀘스트 인 (4)
[레벨이 올랐습니다!]
도적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나자, 에일의 레벨이 올라갔다.
에일은 14레벨에 다다랐고, 도적 넷의 루팅 아이템을 모아 정리해 보자 그들이 꽤나 많은 가치의 재화를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했지만, 예상대로 동 레벨 대의 일반 사냥터에 비해 훨씬 나은 경험치와 보상이 주어졌다.
파아앗!
알리사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에일의 체력이 주르륵 차올랐다.
도적의 단검에 묻어 있던 독으로 줄어들었던 체력이 모두 회복됐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할 만한 것 같네요.”
“시간제한이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죠?”
“네, 차근차근 잡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아이템의 루팅도 끝나자 둘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통로에 놓여 있는 횃불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고, 기껏 준비해 두었던 묘안의 비약은 무의미해졌다.
그래도 하드록 동굴을 빠르게 돌파하게 해 주었으니 손해 본 것은 아니었다.
도적들은 대부분 둘이나 셋으로 무리지어 다녔고, 이후로도 안정감 있게 사냥을 해 나갈 수 있었다.
가끔씩 숫자가 많아지기도 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이었다.
역시나 파티 사냥에서 능숙한 힐러의 존재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알리사의 힐을 받으면서 전투에 임하면 웬만한 체력 손실은 감수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둘의 체력을 체크하며, 언제나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오는 힐링은 아예 죽을 일이 없는 게 아닐까 싶게 만들 정도였다.
그렇게 놈들의 패턴에 적응하고 막힘없이 쭉쭉 나아가자, 어느 순간 알기 쉽게 직선형이었던 동굴 구조는 복잡하게 바뀌었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목에 중간중간 나타나는 커다란 공간들은 복층으로 되어 있거나, 도적들의 주둔지처럼 구조물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괜히 두 가지 선택지를 언급한 건 아니었군.’
세베라가 퀘스트를 주기 전 언급했던 부분.
몰래 잠입해 타깃인 카사노를 암살하거나, 혹은 마주치는 녀석들을 모두 죽이거나.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어느 쪽이든 가능한 던전의 지형지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퀘스트로 생성된 인스턴스 던전인 만큼 당연히 몬스터의 리젠은 없었고, 최단 거리 루트를 택하면 빠른 퀘스트 완료도 가능했다.
하지만 에일과 알리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 번만 입장할 수 있는 퀘스트 전용 인스턴스 던전.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차근차근 나아가면서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와 아이템을 모두 챙겨 갈 생각이었다.
즉, 이 던전 안에 있는 도적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없애 버리겠다는 것.
그렇다.
대놓고 정면 돌파하면서 적들을 싸그리 몰살시키더라도, 목격자만 없다면 그게 바로 암살이었다.
* * *
왕도 아스칼론.
워로드 전체를 대표하는 수도이자, 다른 영지들과는 달리 길드가 아닌 왕가가 직접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리고 그 이름과 상징성에 걸맞게 워로드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도시이기도 해 언제나 수많은 유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왕도의 거리엔 평소보다도 훨씬 많은, 어마어마한 수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 광경을 담기 위해 세계 각국의 정규 방송 취재진들까지 다수 포진해 있었고, 넓은 길거리를 양옆으로 가득 메운 유저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라도 있는 듯 설레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심지어 멀쩡한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서서 구경하다가, 집주인 NPC에게 걸려 두들겨 맞으며 쫓겨난 유저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나… 나타났다!”
“꺄아아악!”
저 멀리서부터 말을 탄 행렬이 보이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로브나 갑옷, 무기와 심볼, 마갑까지.
모두 칠흑같이 검은빛으로 통일한 복장인 그들은 6대 길드 중 하나인 나이트메어의 랭커들이었다.
워로드를 좌지우지하는 최대 세력의 정예 인력인 만큼 실력과 명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그들을 직접 보기 위해 이렇듯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적으로 쏠린 건 대열의 가장 앞이었다.
그들의 선두엔 무심한 표정의 한 여자가 있었는데, 짙은 흑발과 그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러나 죽은 듯이 착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로 인해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흘러나오는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길드원들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통일된 장비들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최고 수준의 레벨과 등급을 가진 아이템들이었다.
부분 부분이 사납게 찢어져 있는 망토는 거친 느낌을 물씬 주었고, 쫙 빠진 가죽 갑옷은 날렵한 그녀의 인상을 돋웠다.
검집에 꽂혀 있는 단검을 제하고도 허리춤엔 철그렁거리는 사슬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는데, 단순 치장용이 아니라 그녀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상징 중 하나였다.
그녀의 이름은 카린.
워로드 도적 랭킹의 압도적 선두이자, 전체 랭킹 4위에 달하는 최상위 하이 랭커였다.
무엇보다도 6대 길드 나이트메어의 길드장이라는 그녀의 위치는 다른 랭커들과는 격이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워로드 위에 군림하는 여섯의 정점 중 하나.
그녀는 워로드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 플레이어였고, 이쪽 거리를 채운 이들 태반이 그녀를 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은 제각기 떠들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 댔지만, 카린은 그런 풍경을 익숙하게 받아넘기며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유저에게는 보이지 않는 플레이어 전용 홀로그램 화면.
그 안엔 이번에 일어난 퀸즈 블론드의 화형 사건을 담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나이트메어가 소유한 영지 중 하나인 퀸즈 블론드에서 일어난 사건.
그리고 처참히 화형대에서 불태워진 유저의 모습은 처형이 이루어진 해당 영지의 주인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나쁘지 않은 전략이네.”
마지막 사진을 확인한 카린이 피식 웃었다.
불길에 타버린 시체와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화형대 자체도 그렇고, 무엇보다 화형 뒤에 그가 벌인 짓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마치 타고 남은 흔적처럼 새까맣게 그린 교단의 상징은 이 일을 벌인 자의 광기를 보여 주며 섬뜩한 광경을 연출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연히 아무 생각도 없이 벌인 일은 아닐 테고…….”
머리가 좋은 녀석이었다.
악역이라고 해도 캐릭터나 컨셉을 하나만 잘 만들어 두면 커다란 화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해당 유저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확률이 높았다.
게임 속에서는 굳이 도덕적 관념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데다가, 관심을 모아 스타덤에 오르기만 한다면 방송에 진출하건, 길드의 스카웃 제의를 받건, 혹은 직접 길드를 만들어 내건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유저들의 관심을 처음 끌어당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성공만 한다면 이름값을 올리는 데 이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다.
“뭐, 사실 별건 아닙니다. 이번에 꽤 이슈가 된 사건인데 저희 영지에서 일어난 일이라서요. 알아만 두시라고 말씀드린 거죠.”
카린의 옆에서 대검을 차고 있는 남자, 람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역시 세계 랭킹 3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하이 랭커였고, 워로드에서 대놓고 컨셉을 잡은 자들이 나타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워로드를 개발한 게임사에서 다양한 컨셉 플레이를 적극 권장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온갖 컨셉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고, 그 미친 여신 ‘루’를 따르고 있는 빛의 교단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은?”
카린이 화면을 휙 넘기며 물었다.
그들의 길드 마스터는 쓸데없는 화제 거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표정으로 보아 다행히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망자의 탑을 습격했던 길드의 배후가 드러났습니다.”
“하, 누가 그런 짓을 벌였을지야 뻔하지.”
“뭐… 확실한 물증까지 나왔으니까요. 길드장께서 예상하신 대로 여명에서 벌인 짓입니다. 다른 길드를 고용해서 들키지 않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지만, 저희 쪽에서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190레벨 대의 주요 사냥터 중 하나인 망자의 탑.
효율이 워낙 좋아 보스 레이드나 퀘스트를 병행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레벨업의 속도가 보장된 곳이었다.
레벨을 올리기 점점 까다로워지는 상위권 유저들에게 있어선 가뭄의 단비 같은 곳.
이처럼 중요한 사냥터의 경우, 주변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형 길드들이 나서 따로 관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망자의 탑 역시 필드를 차지한 나이트메어 길드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사흘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습격이 있었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산하 길드원들이 암살당했다.
거기다 녀석들은 대범하게도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탑 내부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길드원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힌 뒤 도주했다.
워로드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난 뒤, 6대 길드를 향한 공격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걸 생각하면 이만한 사건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린을 포함해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놈들을 고용한 배후를 아주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바로 그들과 철천지원수 지간인 ‘여명’ 길드.
이곳에 정착하기 전, 무려 1세대 게임인 ‘뉴월드’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두 명문 길드는 유래 깊은 갈등 관계를 맺고 있었고, 워로드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갈등이 이어졌으니 감정의 골이 깊게 파여 있었고, 누구 하나가 끝장나기 전까지는 원만한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으로 끝내자니 나이트메어가 6대 길드 중 한축을 차지하고 있듯, 여명 또한 그와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쉽게 해결될 리가 만무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선 몇 번의 전면전과 끝없는 소규모 국지전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다른 6대 길드와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당히 협의만 맺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번에 드러났다시피, 그들은 다시 한번 약속을 어겼다.
“이번 회의에서 정식으로 항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됐다. 아무 소득 없는 말싸움만 이어질 뿐이야.”
카린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왕도 아스칼론의 중앙 회의장.
대중들에게는 주기적으로 6대 길드장들이 모여 정상 회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유명한 장소였다.
지금도 정상 회의가 예정되어 6개 세력이 일제히 모이고 있었고,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수 있었겠지만 카린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분명 ‘정상 회의’는 표면적으로 거대 길드 간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접경 지역 분쟁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개최되었지만, 실상은 그저 형식적인 이벤트일 뿐, 실질적으로 해결되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막대한 돈을 사용해 왕가의 회의장을 대여하고, 이만한 거물들이 귀중한 시간까지 써 가며 주기적으로 모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이 회의가 가지는 화제성과 상징성, 그 두 가지 때문이었다.
평소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랭커들이 수도에 한데 모여 절대 길드들의 위용을 과시했고, 여타 길드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인식을 세간에 퍼뜨려 주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막대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람빅이 슬쩍 던지듯이 물었다.
그들의 길드 마스터가 이런 일을 그냥 넘길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새파란 신입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카린은 싸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만히 넘어간다면 길드 이름에 먹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 그대로 되갚아주는 게 우리의 방식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