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퀘스트 인 (2)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띠링!
통화가 끊겼고, 우진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이불 위에 툭 던지며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후우…….”
꽤나 오래 해 온 편의점 알바를 이번에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전업 플레이어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으니, 아르바이트야 당연히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땜빵이 들어오기 전까지 최소 2주 정도는 일을 계속해야 할 줄만 알았는데, 다행히 점장님에게서 바로 빠져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마침 주변에 사는 조카가 알바 자리를 구하고 있었다길래, 일할 사람을 바로 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달려야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이 마음 편히 해결되자, 우진은 의지를 불태웠다.
워로드에 투자한 시간은 결코 배신하지 않았고, 반대로 투자한 시간이 적을수록 경쟁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한다.
이제 당분간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 대부분을 워로드에 전념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적당한 운동 시간을 곁들여야 한다는 건 잊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였지만, 워로드 역시 결국엔 체력 싸움이었다.
하루 종일 접속기에 눌러앉아 있다가 몸이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데스 페널티를 몇 번이나 받는 것보다도 치명적이었다.
가혹한 노가다와 그에 따른 플레이 타임을 버틸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쯤은 길러 놔야 했다.
일단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게임사에게 보상으로 받은 돈 덕에 금전적인 여유는 있다는 것이었다.
편의점도 그만둔 마당에 그 돈이 없었다면 캐릭터를 성장시킬 시간도 없이, 생계를 이어나가느라 미친 듯이 빡빡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상황에서 1억 원만으로는 앞으로의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고, 결국 제시간 안에 워로드에서 성공을 해야 했다.
우진이 살고 있는 이 비좁은 원룸 방 역시 아직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직접 벌어들이고 있는 수익이 없는 만큼, 우진은 아직 이곳을 벗어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긴 했는데… 미리 들어가 있을까.”
시계를 확인한 우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파앗!
워로드에 접속하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울창한 수풀과 나무였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산 중턱 아래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에일은 목적지가 위치한 미도나 산에 올랐고, 예정대로 하드록 동굴의 입구에서 접속을 종료했었다.
그리고 접속을 재개하자 동굴 입구엔 에일뿐만이 아니라 여러 유저들이 있었는데, 사냥을 한 뒤 재정비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혹은 파티원을 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하나 끼어 있었다.
“미리 와 계셨네요?”
“아, 에일 님. 입장 전에 준비해 둘 게 있어서요.”
알리사가 반갑게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나 일찍 들어온 참이라 있을 줄은 몰랐는데, 더 일찍 들어와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보니 이런저런 도구를 늘여 놓은 채 조그만 솥 안에 무언가를 팔팔 끓이고 있었다.
“이건 뭐죠?”
“여기 받으세요. 하드록 동굴은 특히 어둡다고 들어서요.”
[묘안의 비약(일반)]
[복용 시, 30분간 어두운 환경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눈을 밝혀 준다.]
[훌륭한 품질로 제작되어 효과가 증가한 포션입니다.]
에일은 그녀가 던져준 포션 세 병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자 투명한 병에 담긴 황금빛 액체가 보기 좋게 찰랑였다.
“이건… 혹시 연금술 배우셨어요?”
“네, 이것저것 손을 댔죠. 워로드는 굳이 사냥이 아니더라도 다른 컨텐츠들까지 다 흥미롭더라고요.”
알리사가 싱긋이 웃으며 솥을 저었다.
워로드에서는 선택 가능한 직업에 별도로 대장장이나 상인, 연금술사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가지는 직업과는 별개로 모든 초식 컨텐츠들을 예외 없이 즐길 수 있었고, 무역이나 무기 제조, 그리고 지금 그녀가 보인 연금술도 마찬가지였다.
전투를 위주로 플레이하는 유저도 상점을 차릴 수 있었고, 철저히 상인으로 활동하며 상단에 가입한 유저들도 남들과 똑같이 전투직과 스킬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중요한 건 플레이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며 플레이를 하냐는 것이다.
어느 한쪽에 치중하면 반대쪽 면에 대해선 비교적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에일은 요리를 비롯한 자잘한 곁가지 컨텐츠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이상, 다른 곳에 쓸데없이 한눈을 파는 것은 안일한 짓이자 지나친 사치였다.
하지만 알리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묘안의 비약이라면 연금술 2랭크 때부터 만들 수 있는 물건일 텐데…….”
“네, 맞아요. 얼마 전에 2랭크가 돼서요.”
그녀의 말에 에일은 속으로 감탄했다.
얼핏 보기엔 낮아 보이는 숫자였지만, 기술 레벨 중에서 2랭크는 꽤나 높은 수치였다.
특히 연금술이라면 까다롭기로 유명해 아직 8랭크 유저도 나오지 않았는데, 시작한 뒤 마을에 틀어박혀서 그쪽 컨텐츠를 위주로 최소 며칠은 파고든 수준이었다.
만약 사냥을 하며 중간중간에 조금씩 곁들인 것일 뿐이라면, 18레벨 전후에 2랭크를 찍기란 결코 불가능했다.
레벨업과 사냥에 집중한 에일의 모든 생활 컨텐츠 레벨이 0랭크인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치이익!
마침 연금술 도구 안에 담겨 가열되고 있던 액체가 끓어올랐고, 그녀가 제작하고 있던 또 다른 포션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알리사는 재빨리 완성된 액체를 병에 담았고, 새하얀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였다.
겉으로 보기엔 무슨 포션인지 영 알아챌 수 없었다.
에일이 호기심이 일어 물어보려는 찰나, 갑자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혹시 두 분뿐이신가요?”
“아, 네. 왜 그러시죠?”
“혹시 저도 파티에 함께 할 수 있나 해서요. 가능할까요?”
남자가 말하자 에일은 재빨리 그를 스캔했다.
두툼한 대검과 중갑을 두른 모양새를 보아 방어 쪽에 주로 투자한 전사 클래스로 보였다.
당장 보이는 수상쩍은 언동은 없었고, 그저 초보자 구역에 있는 유저치고 꽤나 눈썰미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에일과 알리사의 장비를 대강 훑은 뒤 연금술로 따로 포션까지 챙기는 걸 보고서, 그들을 이 근방에선 보기 힘든 실력자들이라고 판단해 파티 사냥에 합류하려는 모양이었을 터.
“죄송합니다. 파티원을 구하고 있지는 않아서요.”
물론 에일은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 사냥도 아닌 데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런 커다란 퀘스트에 끼워 넣을 수는 없었다.
처음 겪는 인던을 앞두고 파티원이 늘어나면 조금 더 안전해지기야 하겠지만, 이런 유의 게임에서 진짜 위험한 건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남자가 아쉬운 듯 체념하고 돌아가자, 에일이 알리사에게 말했다.
“그럼 입장할까요?”
* * *
효율이 나쁘지 않은 사냥터인 하드록 동굴 내부는 파티를 맺은 유저들이 여기저기서 사냥 중이었다.
몬스터들의 개체 수가 많아 더 빠르게 사냥을 할 수 있는 대신, 반대로 부담도 커지는 탓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최소 세 명 이상의 파티를 맺고 입장했다.
그에 비해 에일과 알리사는 단 두 명뿐.
하지만 동굴을 깊숙이 돌파해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둘의 실력 자체가 출중한 덕도 있었지만, 묘안의 비약을 마셔서 어두운 내부 지형이 훤히 보이는 데다가, 이곳 던전은 11레벨 몬스터가 주류인 만큼 나름대로 여유도 있었다.
키이이익!
푸욱!
몽둥이를 들고 있던 고블린의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복부를 장검에 뚫린 녀석은 축 늘어진 채 아이템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에일은 놈의 시체를 검에서 빼내 옆으로 휙 던져 버렸다.
그렇게 마지막 녀석이 죽자 주위엔 열한 마리의 고블린 시체가 널브러졌다.
분명 고블린들의 시체도 하나하나 해체가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을 뚫고 있는 것일 뿐이었고, 저레벨 몬스터를 상대로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는 없었다.
사람도 두 명이나 되는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 힐 필요하세요?”
“아뇨, 체력이라면 충분해요. 벌써부터 마나를 쓸 필요는 없죠.”
에일이 손을 저으며 답했다.
벌써 동굴의 반절 가까이 들어오며 고블린과 계속해서 맞부딪쳤지만, 아직 그의 체력은 90퍼센트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건 알리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로 후방을 신경 써가며 보호해 주지 않아도 몬스터를 척척 쓰러뜨렸고, 자신에게 힐을 쓰거나 포션을 마시지도 않았다.
둘 모두 어설픈 고블린 정도에게는 공격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말.
그런 그들을 뒤에서 잠시 쳐다보고 있던 한 파티는 멍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와, 저 사람들 뭐예요?”
“모… 모르겠네요. 움직이는 거 보면 장비빨도 아닌데 저 정도 실력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무래도 부캐 아닐까 싶은데…….”
“저기요!”
에일이 갑자기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파티원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시던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면 혹시 PK를 걸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던가…….”
“예? 아니요! PK라니 절대 아니죠! 어휴, 무슨 그런 소리를.”
손사래를 친 파티원들은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혹시나 시비라도 걸리거나 미리 위협 요소를 제거한답시고 싸움이 붙는다면 십중팔구 죽는 건 자기들 쪽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건너편 벽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에일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갔네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효과는 좋았어요.”
알리사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인스턴스 던전의 입구를 바로 앞에 둔 상황에서 계속 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 탓에, 몇 분 동안이나 제자리 사냥만 하고 있던 그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
여태 알려져 있지 않은 인스턴스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다른 누군가 보면 안 되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다.
같은 파티원이 아닌 이상 도중에 난입을 하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미지의 보상을 노리고서 입구 안에 진을 치고 있다거나 다른 유저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때문에 에일은 신중한 눈빛으로 주변을 한 차례 살피고는 사람이 없을 때를 틈타, 비좁은 바위 틈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유저들이 보면 벽에 박치기를 하려 뛰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부적을 지니고 있는 에일과 알리사의 눈에는 벽이 아니라 하얀 막처럼 생긴 결계와 뻥 뚫려 있는 던전 입구를 볼 수 있었다.
[인스턴스 던전 ‘음모자의 동굴’에 입장하였습니다.]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으로, 공략에 실패할 경우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화르륵!
에일과 알리사의 손에 하나씩 쥐여 있던 부적이 동시에 타올랐다.
다신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걸 보아, 부적은 한 번만 사용 가능한 입장권 같은 개념이었던 모양이었다.
타닥타닥 횃불 타는 소리가 앞에서 들려왔고, 그들의 앞엔 좁은 동굴의 통로가 나있었다.
“그래, 정말 그랬다니까?”
“흐하하하!”
통로 쪽에서 굵은 목소리의 남자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순식간에 기척을 죽인 에일과 알리사는 입구로 나오는 길목의 양쪽 벽면 뒤에 숨었다.
다가오는 이들은 정확히 둘.
각자의 무기인 장검과 스태프를 몸 쪽에 바짝 당겨들고서, 그들이 나오기만을 숨죽여 기다렸다.
말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