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퀸즈 블론드 (5)
“아니, 정말 저를 죽일 생각이에요? 도시에서 같은 유저를 죽이면 경비병한테 끌려가는 거 몰라요? 그쪽도 무사하진 못할 텐데…….”
트릭시가 반쯤은 따지듯이 따박따박 말했다.
상대가 얌전히 놓아줄 생각이 없는 걸로 보이자, 조금 더 강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하지만 에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굴 호구로 보나… 먼저 범죄를 저지른 사람한테 하는 보복 공격은 아무 영향 없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의 말에 트릭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괜히 초보들이나 낚을 얕은 수를 던져 상황이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봐주세요. 정말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네? 진짜 돈이 없어서 그랬어요.”
트릭시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미인 소리를 들으며 커 왔던 그녀였고, 남자들은 언제나 그녀에게 껌뻑 죽어 넘어갔다.
하지만 물론, 에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됐고요, 그냥 죽읍시다.”
[화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화… 화형?”
그녀의 앞에도 시스템 메시지가 떴는지, 깜짝 놀라 펄떡 뛰었다.
‘막상 화형을 하자니 불을 붙일 만한 게 없는데…….’
에일은 잠시 멈춰 서서 고민했다.
당장 적당한 땔감과 불씨를 구하러 상점에 갔다 와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그때, 메시지들이 추가로 나타났다.
[심판대의 위치를 지정하십시오.]
눈치 빠른 에일이 한쪽 바닥을 가리키며 메시지를 누르자, 기다란 나무 기둥 하나가 바닥에서 불쑥 솟아났고, 그 아래엔 건초들이 수북이 나타났다.
딱 봐도 불을 지피기에 좋아 보이는 재료들.
‘아하, 이 정도 편의는 봐준다 이건가.’
에일이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
다만 그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스킬을 탐구하고 있을 동안, 그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트릭시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자… 잠깐만, 무슨 짓을 하려고!”
“선택을 안 하시길래 제가 골랐죠. 무난하게 화형으로 갑시다.”
화륵!
갑자기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이 에일의 손에 나타나 쥐어졌다.
기겁을 한 트릭시가 몸부림치건 말건 에일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건초 위의 기둥에 칭칭 묶었다.
그러자 완전히 잘못 걸려 버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야, 이 변태 자식아! 이거 안 놔!!”
“그러게 누가 다른 유저 돈을 훔치랬습니까?”
“그냥 컨텐츠잖아! 도적이 도둑질했는데 뭐!”
“나도 이게 컨텐츠라서. 그것도 아주 중요한 메인 컨텐츠.”
말투를 싹 바꾼 에일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녀가 컨셉대로 도적이라 도둑질을 하는 것이라면, 에일은 이단심판관이라 이단을 불태우는 것일 뿐이었다.
거기다 여긴 단순히 재미 삼아 하는 일도 아니었고, 무려 두 개의 전용 스탯을 올릴 수 있는 중요한 컨텐츠였으니 그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타악!
에일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횃불을 다시 집어 들었고, 천천히 반응을 즐기며 건초에 불꽃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트릭시는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단단히 고정된 통나무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어설픈 협박 같지는 않았고, 진짜 이대로 죽일 생각으로 보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죽음도 아닌 화형으로 불살라 버릴 생각이라니, 트릭시는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소리쳤다.
“자, 자자… 잠깐! 잠깐만!”
그러자 횃불을 쥔 채 뻗어오던 에일의 손이 겨우 멈춰 섰고, 트릭시는 그 틈을 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다간 워로드의 죽는 법 중 최악이라는 화형에 당해, 끔찍한 꼴을 당할 게 뻔했고 무슨 수라도 써야 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데스 페널티를 모두 떠안을 수는 없었다.
“훔쳐 갔던 돈 다시 돌려줄게! 그게 목적이지? 다시 돌려줄 테니까 굳이 서로 손에 피 묻히고 원한 가지지는 말자고. 응?”
“훔쳐간 돈이라… 그 정도로는 부족한데.”
에일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이 고생을 했는데 고작 원금만 돌려받고서 끝낼 수는 없었다.
약간의 추가 보상이 필요했고, 중간에 시선을 옮겨 슬쩍 횃불을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트릭시는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 알았어! 그러면 두 배… 내가 잘못했던 거니까.”
죽는 족족 주변에서 부활하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워로드에서의 목숨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죽음엔 언제나 혀를 내두를 만한 강력한 페널티가 뒤따라오는 탓에, 단순히 게임 속이라는 걸 플레이어들도 알면서도 목숨을 진짜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거기다 트릭시는 완전 미친놈에게 걸려 버려서 악명 높은 화형에 당해 버릴 위기에 처했으니, 그녀의 입장도 꽤나 긴박해진 상황이었다.
“흐음…….”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에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훔친 돈의 두 배라면 무려 60실링.
그만한 보상이 있다면 이대로 용서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그 정도면 할 만하지.”
“휴, 그나마 말이 통하는 녀석이라 다행이네. 그러면 이것부터 빨리 풀어줘.”
“아니, 난 이미 한 번 당했던 몸인데 또 뒤통수를 맞으면 어떻게 하라고. 당연히 네 쪽에서 먼저 돈을 건네야 하지 않겠어?”
에일은 장검을 들어, 트릭스의 한 손만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야… 진짜 약속 지켜야 한다? 여기서 이거 받고도 죽이면 정말 사람도 아닌 거 알지……?”
“난 한번 말한 건 무조건 지켜. 누구하곤 다르게.”
에일이 호언장담했다.
그러자 트릭시는 잠시 갈등하며 그를 바라봤다.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나 말투도 그렇고.
알고 있던 사이는 아니더라도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최소한 믿을 수는 있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에이씨… 알았어. 여기.”
탐탁지 않은 표정의 트릭시가 품속에서 동전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은화가 한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열어 건넨 액수를 확인한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60실링이 맞았다.
“이제 빨리 풀어줘.”
“잠시만… 앗, 실수.”
에일이 횃불을 놓쳐 아래로 떨어뜨렸다.
화르르륵!
떨어진 횃불에서 마른 짚단으로 불이 옮겨붙는 건 순식간이었고,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치 기름이라도 뿌려 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화염이었고, 잠시 어리둥절하던 트릭시에게도 아찔할 정도로 화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야… 야이……! 미친놈아!!”
“미안.”
에일은 진심을 담은 듯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이건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단지 손이 미끄러졌을 뿐.
* * *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형벌 선고’에 따라 지정된 형벌을 성공적으로 집행하였습니다. 스킬의 효과로 스탯 보너스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여신의 총애 +0.31% (현재 52.38%)]
[빛의 교단 공헌도 +70]
[신앙심 스탯 +2]
[광기 스탯 +2]
사도 전용 스킬 ‘형벌 선고.’
스킬을 통해 선고한 형벌에 맞춰 이단의 처형 집행에 성공한다면, 이단을 처단할 때 증가하는 스탯인 신앙심과 광기의 증가량이 두 배 상승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형벌 선고 스킬의 효과였다.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 생포해야 하고, 정해진 형벌에 따라 처벌을 수행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일반 이단 사냥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성장이 가능한, 그야말로 굉장한 메리트를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다.
더군다나 총애 수치와 교단 공헌도까지 원래의 수준보다 크게 증가했으니, 워로드의 그 어떤 성장 지향 스킬도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가치가 월등했다.
[화형 집행으로 인해 심판관의 공격력이 60분간 10% 증가합니다. (최대 24회, 시간 중첩 가능)]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닌지, 에일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비록 이미 도시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활용할 여지는 없었어도, 이단을 처형함으로써 60분 동안 지속되는 공격력 버프를 받았다.
처형 방법에 따라 버프 종류가 여러 가지로 갈리는 모양이었다.
사냥터의 일반 몬스터들은 이단이나 신성 모독자로 지정이 안 되는 만큼 쉽게 적용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60분이면 굉장히 준수한 시간인 데다가 중첩까지 가능했으니, 사냥터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유저만 있다면 굉장히 유용할 건 확실했다.
사도 전용 스킬이라길래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아무리 하급의 싸구려 스킬이라도 최대 스킬 한도에 영향을 주지 않고서 추가된다면. 모두가 얼마를 지불하든 간에 받으려 했을 텐데, 이런 걸 공짜로 두 개나 받았으니 굉장한 이득이었다.
‘소득도 짭짤하고.’
자신의 보유 금액을 확인한 에일이 씩 웃었다.
훔친 돈의 두 배인 60실링을 받아 낸 데다가, 트릭시를 죽임으로써 아이템과 돈을 추가로 루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아이템 값을 못 받더라도 최소 1골드는 넘을 만큼 벌어들인 상황.
굳이 자신을 선택해 찾아와 준 도둑이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뒤처리를 어떻게 한다.”
에일이 다 타버린 화형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멀쩡한 건물의 옥상에서 갑자기 불을 지피고, 그 난리를 피워댔으니 뒤처리하기가 난감했다.
에일은 어떻게든 증거를 인멸해 보려 소매치기범을 묶었던 기둥을 뽑으려고 했지만, 정해진 시간 내엔 회수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화형대 밖으로는 시스템적으로 불이 번지지 않아 대형 화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뿐.
하지만 옥상에서 울려 퍼진 비명과 검은 연기를 보고 사람들이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느낀 에일은 누군가 이곳까지 올라오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뜨려 움직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
“와… 이거 진짜 미쳤네.”
자취방에서 엎드려 누운 채 노트북을 보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뒹굴뒹굴하던 그의 친구가 고개를 들이밀며 다가왔다.
“왜, 왜. 뭐 재밌는 거 보냐?”
“너도 한번 봐봐.”
남자가 화면을 돌리며 노트북을 옆으로 슥 밀었다.
워로드의 커뮤티니 내 한 게시글이 화면에 띄워져 있었는데, 사진 여러 장이 등록되어 있었다.
“뭐… 뭐야 이거…….”
친구는 눈을 비비더니 다시 사진을 들여다봤다.
얼핏 보기엔 수많은 사람들이 옥상 위에 몰려 있는 사진이었지만, 그 인파의 한가운데에는 화형대 위에서 타죽은 유저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그것도 퀸즈 블론드, 그 아름답기로 소문난 도시에서 벌어진 대참사의 사진이었다.
현재 퀸즈 블론드가 포함된 ‘에스마이어’ 지역 사건사고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의 사건이기도 했다.
“이거 그 미친 여신 따르는 자식들이 벌인 짓 아냐?”
“그래, 이런 짓을 벌일 놈들이라면 빛의 교단밖에 없지.”
“와…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 정도까지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친구가 혀를 내둘렀다.
인구수가 워낙 많은 워로드의 특성상 광신도나 살인마 같은 별별 이상한 컨셉들이 난무하긴 했지만, 설마 도시 한복판에서 이렇게 거창한 처형대까지 만들어 화형을 시켜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특히 가장 주목을 받은 점은 처형대 밑에 타버린 흔적.
타버린 화형대를 중심으로 바닥이 까맣게 그을려 강렬하게 새겨진 빛의 교단의 엠블럼은 희생자의 시체와 합쳐져 사람들에게 잊기 힘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저를 산 채로 잡아 태워 버린 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가며 바닥에 한 획 한 획 그려 놓았을 걸 생각하니, 광기의 여신 루의 신앙에 얼마나 심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막상 이 일을 저지른 에일은 흔적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었고, ‘형벌 선고’ 스킬이 적용되면서 벌어진 현상일 뿐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스킬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그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나 지금 닭살 돋은 거 보이냐? 이런 미친놈한테만 안 걸렸으면 좋겠는데…….”
“진심… 저런 자식이랑 마주치면 접속기 부숴서라도 강제 로그아웃할 거다.”
두 남자는 몸서리를 치며 야단을 떨었다.
당사자인 에일도 모르게 미치광이 이단심판관에 대한 악명이 널리 퍼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