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퀸즈 블론드 (2)
퀸즈 블론드와 듀벨.
대륙 중심부 근방에 있는 두 개의 도시였지만, 지도상으로는 보이는 것만큼 마냥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도시는 아니었다.
거리 자체는 가까운 편일지 몰라도 얇은 산맥이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고, 시메이 산맥을 통하지 않으려면 옆쪽으로 나 있는 험난한 숲으로 빙 둘러가야 해 시간을 꽤나 많이 소모해야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옆을 통하지 않고 산맥을 넘어간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문제는 해당 산맥에 110레벨 대의 몬스터가 득실거린다는 것이었다.
그런 괴물들을 무사히 뚫고 지나가는 건 둘에겐 당연히 무리였다.
그나마 금지된 폐허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어 동선 낭비는 없었지만, 옆을 빙 둘러 숲을 통해 간다면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오늘 남은 시간 안에 퀸즈 블론드에 도착하기엔 무리였다.
“나왔네요.”
갈라져 있는 나무 표지판을 본 에일이 말했다.
금지된 폐허를 빠져나와 그동안 대로를 따라 걷던 알리사와 에일은 두 가지 갈림길이 나타나자 자리에 멈춰 섰다.
위험을 감수하고 산맥을 넘을 것인지, 옆으로 빙 돌아 숲을 지날 것인지.
이제 그들도 여느 유저들이 했던 것처럼 두 개의 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오른쪽 길로 가죠.”
“…네?”
에일이 말하자 알리사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오른쪽 길이라면 시메이 산맥으로 통하는 방향이었다.
당연히 안전한 크센츠 숲을 통해 이동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에일의 선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숲으로 가면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요. 제 계획은 오늘 안에 퀸즈 블론드에 도착해서 퀘스트 아이템에 대해 알아내는 거였거든요.”
“하지만 몬스터가 나오잖아요. 전 호위를 고용할 돈은 없는데…….”
그들의 레벨은 고작 13, 그리고 18레벨.
이 정도 차이면 단순히 주의를 하거나 지형을 외운다고 어떻게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워로드의 난다 긴다 하는 하이 랭커들을 데려온다고 해도 이런 조건으로는 산맥을 조금도 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110레벨 대의 몬스터가 나타나는 산맥을 자력으로 뚫고 지나가기란 불가능한 만큼, 그들이 산맥을 통해 갈 유일한 방법은 다른 고레벨 유저의 보호를 받으며 건너가는 수밖에 없었다.
굳이 상인이나 초식 유저들이 아니더라도 저레벨 유저를 상대로 한 호위업은 꽤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산맥 입구에서 호위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고용할 돈이 문제였다.
110레벨 대의 몬스터를 상대로 경호가 가능한 유저라면 한두 푼으로 해결될 게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본업을 통해 경제적 여유가 넉넉해 현질에 자유롭거나, 전문 무역 상단 정도는 되어야 부담 없이 그들을 고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저레벨 유저에 불과한 그들은 당연히 무리였다.
그리고 그건 에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도 그럴 돈은 없어요. 하지만 호위가 없어도 충분히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있죠.”
자신 있게 말한 에일은 먼저 오른쪽 길목으로 빠져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기심이 동한 알리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쪼르르 그의 뒤를 따라왔다.
설마 그만한 실력을 보여 줬던 에일이 아무 대책도 없이 바보 같은 선택을 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산맥이 있는 방향으로 길을 걸어가면서도 에일은 계속해서 눈을 돌렸고, 얼마 안 가 산맥에 붙어 있는 독특한 생김새의 커다란 바위 두 개를 발견했다.
마침 찾고 있던 지형을 발견하자 에일은 대략적인 거리를 재가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쌍둥이 바위 아래에서 산맥을 따라 좌로 250미터가량… 이라고 했었지.’
에일이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지도 속 목적지에 다다르자, 그는 울창하게 얽혀 있는 수풀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던 그 안엔 조그만 틈새가 있었고, 숨겨져 있는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세상에…….”
뒤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알리사는 멍하니 주위를 바라봤다.
푸른빛으로 가득 찬 동굴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산맥 반대편까지 이어지는 동굴입니다. 가는 동안 마주칠 몬스터도 없고요.”
“이런 곳은 대체 어떻게…….”
알리사는 듀벨에 도착한 뒤 주변 지리에 대해 나름대로 이것저것 찾아봤지만, 이런 장소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에일은 우연히 찾은 것도 아니고, 미리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곳을 찾아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동굴에 대한 정보는 정보 공유 사이트 ‘워스팟’에서 다이아몬드 등급만 열람할 수 있는 게시판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워로드가 출시된 지 1년.
그 긴 기간 동안 실제 플레이엔 손도 대지 못하던 에일은 워로드에 대한 것들을 뒤져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만큼, 커뮤니티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정보 공유 사이트에 모조리 가입해 있었다.
더군다나 워로드에 관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뭐든지 찾아보며, 이것저것 알아보고 가끔가다 답답한 부분들은 깔끔하게 정리해서 게시물을 올리기까지 하자 등급은 자연히 수직 상승하게 되었고, 아무나 열어 볼 수 없는 정보들의 열람 권한까지 얻게 되었다.
워스팟, 레드에잇, 워벤 같은 대형 정보 공유 사이트들은 물론, 가입이 제한되어 적은 수의 특별 회원만으로 운영되는 WGN 같은 외국 사이트들까지 모두.
이번 왈로니 동굴도 원래대로라면 상급 약초재인 그란제브를 다른 유저와의 경쟁 없이 얻을 수 있는 유용한 장소로 공유된 것이었지만, 이처럼 경우에 따라 산맥을 탈 없이 지나가는 통로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에일은 통로를 지나가면서 간간히 보이는 약초들을 이동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몇 개씩 뽑아냈다.
상급 약초재라면 나름 값이 꽤 나가는 물건.
그냥 지나칠 이유가 없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20분쯤에 산맥 반대편에 도착할 겁니다.”
“빠르네요. 정말 오늘 안에 단서를 잡을 수도 있겠어요.”
퀘스트 아이템 ‘카사노의 밀봉된 편지.’
파티를 맺어 동행하는 만큼, 이 아이템으로 얻을 퀘스트는 공유해 진행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미리 나눠야 할 보상을 아깝다고 생각해 혼자 숨기며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퀘스트 아이템을 요구하는 의뢰 역시, 오히려 반복 퀘스트보다 못한 꽝이나 다름없는 경우도 많았다.
관련된 도시 위치만 나왔을 뿐, 무엇 하나 밝혀진 게 없었으니 시간을 갖다 버릴 게 아니라면 두 명이 조사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더군다나 랭커 출신이라면 이런 의뢰를 추적할 단서들을 알아보는 데 훨씬 능숙할 것이고, 어떤 난이도와 인원수를 요구하는 퀘스트가 나타날지 몰랐으니 이 정도가 여유치였다.
‘조건부 퀘스트라…….’에일은 잠시 인벤토리에서 붉은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를 꺼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에일도 약간은 이번 퀘스트에 대해 기대 중이었다.
아직 단서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음에도, 아이템을 얻은 전반적인 상황이나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촉을 자극했다.
‘쓸 만한 퀘스트가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 * *
동굴을 통해 빠르게 산맥을 관통한 에일과 알리사는 중간에 몬스터를 마주치지도 않고 무사히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평원 위로 곧게 흐르는 강을 따라 주욱 내려갔고, 어느 정도 걷자 저 멀리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에스마이어 지역의 아름다운 작은 도시, 퀸즈 블론드.
물론 작다고는 해도 워로드 세계관 내에서나 작은 편이지, 어디까지나 ‘도시’라는 명칭이 뒤에 붙은 만큼, 이곳 주위의 수많은 유동 인구를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큰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강을 잇고 있는 다리를 통해 반대편으로 넘어가자,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그 안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었다.
활짝 열려 있는 성문 앞에는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는 경계병이 창을 들고 서 있었는데, 보는 이에게 절로 위압감을 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경비병 NPC밖에 없던 듀벨과는 확연히 달랐다.
슬슬 거대 길드 간의 마찰이 자주 일어나는 세력 접경 지역에 온 만큼, 내부 치안 정도에만 필요한 일반 경비병이 아닌, 길드에서 고용한 수준 높은 정예병들을 세워 놓고 있었다.
하지만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 그것과는 별개로 도시 내부의 모습은 완전히 색달랐다.
도시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수로들은 퀸즈 블론즈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비교적 규모가 작은 대신 아름답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거리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리사가 눈을 빛내며 사진을 찍는 동안, 에일도 그 광경에 내심 감탄했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만 봤던 도시의 모습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알리사 님 여기서 완료해야 할 퀘스트가 있다고 하셨죠?”
“그렇죠.”
“그러면 일단 헤어졌다가 일을 마친 뒤에 다시 이곳에서 보도록 하죠.”
“네, 그렇게 해요.”
에일의 제안에 알리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에일은 인벤토리에 꽉꽉 들어찬 아이템들을 처분해야 하는데 다가 쓸 만한 장비 아이템도 구매해야 했다.
우선 갈라진 뒤 도시에서 서로의 일 처리를 마친 다음에, 퀘스트 아이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에일은 우선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처분하고, 무기를 구하기 전에 미리 자금을 모아두기 위해 상점부터 향했다.
가장 가까운 잡화점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염이 덥수룩한 털보 주인이 그를 맞이했다.
커다란 덩치 탓에 작은 손수건처럼 보이는 행주로 손을 슥슥 닦으며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이곳이 잡화점이 아니라 용병 길드가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긴 했지만, 에일은 내색하지 않고 인벤토리를 열어 물건들을 체크했다.
‘막피꾼들 덕에 포션은 충분하고… 일단 잡템부터 꺼내야겠군.’
에일이 꿈틀거리는 검은색 덩어리를 우르르 쏟아냈다.
혐오스러운 외양이긴 했지만 잡템 중에선 나름 값진 물건으로 ‘마력이 담긴 시체 덩어리’라는 상급 아이템이었다.
트래구울을 잡고 나서 얻은 것과 녀석의 시체를 다시 해체해 얻은 것까지 아이템이 수십 개가 넘었고, 일반 몬스터인 좀비들을 해체하고 얻은 썩은 살점과 퇴화된 뼈도 잔뜩 있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본 주인은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에일을 노려보았다.
“나더러 이딴 쓰레기들을 돈 주고 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