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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8화 (18/227)

18화 퀸즈 블론드 (1)

푸욱! 찌이익!

에일이 능숙하게 검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고, 시체를 찌르고 가르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는 보스 몬스터 트래구울의 시체를 해체하는 중이었고, 반대편에는 알리사가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트래구울의 시체 주변엔 겁을 먹은 건지 좀비 녀석들이 얼씬거리지도 않아, 편히 앉아 쉬거나 해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엄청 능숙하시네요. 많이 해 보신 것처럼.”

“이거 시작하고서 많이 해 보긴 했죠. 그러고 보니 아까 그 궁수 시체에서는 쓸 만한 거 안 나왔나요?”

“장비 아이템 두 개가 나오긴 했는데, 제가 착용할 만한 건 없어서… 상점에 적당히 팔면 될 것 같아요.”

알리사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래로 떨어져 죽은 궁수는 아예 그녀 혼자서 잡아낸 놈인데 에일이 날름 챙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가죽옷에 활잡이라 에일 자신이 쓸 만한 아이템이 나올 확률도 없었고, 등을 떠밀어 가며 양보에 성공했다.

푸욱!

해체용 칼을 다시 한 차례 찔러 넣은 에일은 그녀의 실력을 다시 상기했고, 자연스레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다.

“혹시 부캐를 키우고 계시는 건가요? 치유사로 궁수를 잡은 데다가 근접 클래스 둘을 혼자 상대한 걸 보면, 절대 처음 하는 실력 같지는 않던데.”

“하하, 아니요. 워로드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 그러면…….”

단박에 상황이 이해된 에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로드는’ 처음이라는 말.

그렇다면 워로드가 아닌 다른 가상현실게임 출신이라는 소리였다.

“어느 게임에서 넘어오셨어요?”

“그게… 트리나무요.”

알리사가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러자 에일도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아……! 트리나무라…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죠.”

“아마 안 좋은 쪽이었겠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녀의 물음에 에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현실게임 트리나무.

이쪽 업계에서는 흔치 않은 방면으로 악명을 떨치던 물건이었다.

가상현실게임 시장이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초창기에 등장한 트리나무는 경쟁작들에 비해 꽤나 호평받던 퀄리티와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심심하면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버그가 문제가 되었다.

경쟁이 치열해질 것을 우려한 개발사가 급하게 게임을 내놓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엄청난 수의 버그가 발생한 것이었다.

부랴부랴 보강 업데이트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지며 생각도 못한 버그가 생겨났고,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 김해승이라는 메인 디렉터까지 퇴사하며 혼란을 겪게 되니 게임의 평가가 대단히 낮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뒤로는 급한 구멍들을 막아가는 방식으로 어떻게 연명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리막길을 걷던 트리나무는 워로드의 등장으로 완전히 폭망했고, 지금은 점유율 0.01% 이하로 내려가 서버 종료를 앞둔 게임이었다.

“하하… 그래도 재밌긴 했어요. 업데이트마다 생기는 버그도 나름대로 컨텐츠로 즐기기 시작하니까 재밌더라고요. 해탈이라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그동안 게임에서 쌓아 온 추억이 있으니까 쉽게 못 떠났죠.”

알리사가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대세를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다른 게임에서 굉장히 늦게 워로드로 넘어온 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대도시까지 텅텅 비더니, 이제 곧 마지막 남은 서버까지 닫는다고 하고… 그래서 이곳으로 넘어왔죠. 할수록 느끼는 건데 워로드는 참 대단한 거 같아요. 이야기는 미리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 퀄리티라니… 경쟁이 치열한 건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게임 같아요.”

“확실히 그렇긴 하죠.”

에일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뉴월드, 아르메니아, 이스트혼 등.

호평을 받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수많은 가상현실게임들이 있었지만, 워로드의 등장 앞에서 모두 무너졌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게임성과 완성도에 각 게임의 유저들, 그리고 랭커들까지 모두 밑천을 버리고 워로드로 넘어왔다.

그로 인해 경쟁이 몇 배로 치열해지는 동시에, 화제성과 규모도 그에 맞춰 올라섰고, 게임 시장은 수십 배 성장했다.

“그러면 트리나무에서 랭커이셨겠네요?”

“프리스트로 랭킹 안에 들기는 했어요.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역시…….’

예상대로 알리사의 범상치 않은 실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트리나무의 전문 힐러직인 프리스트로 공식 랭킹 안에 이름을 올릴 정도라면 굉장한 실력자였다.

가상현실게임 속 플레이어의 실력은 보통 게임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편이었고, 다른 게임에서 실력자였다면 워로드에서도 마찬가지일 확률이 높았다.

지금의 워로드 랭커들도 과거엔 대부분 다른 게임에서 랭킹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상관관계가 있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는 에일 님은요? 다른 게임에서 유명한 랭커이셨을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워로드가 첫 가상현실게임이라서요.”

에일이 사실대로 답했다.

하지만 알리사는 당연히 웃음을 터트리며 믿지 않았다.

“에이, 설마요.”

“정말이에요. 여태까지 사정 때문에 가상현실게임을 못하고 있던 게 인생에서 제일 큰 한이었는데요.”

“정말요? 의외네요.”

알리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게 반응할 뿐, 그녀는 여전히 에일의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타 게임의 랭커였던 알리사의 눈썰미는 어설픈 유저들과는 달랐고, 트래구울을 공략하는 장면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이 굳이 밝히지 않으려는 걸 보아, 그에게 어떤 사연이라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넘어갔다.

뭔가를 더 캐묻는다고 바뀌는 게 있지도 않을 상황이었으니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일단 죽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여기는 벗어나야겠죠.”

컴퓨터 너머로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한 번 농락을 당하고 나면, 열이 뻗쳐올라 다른 게 손에 안 잡힐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직접 들어가 경험하는 가상현실게임에서 PK를 당하고, 이틀이나 접속 페널티를 받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아는 친구를 불러 복수를 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고, 아예 제3자인 고레벨 청부업자에게 의뢰를 맡길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죽인 일곱 명의 유저 중 길드에 소속된 녀석도 하나쯤은 있을 테니,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여러모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트래구울에게 퀘스트 아이템을 얻어서 일단 퀸즈 블론드 쪽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어? 저도 그쪽으로 가는데, 목적지가 같네요.”

알리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애당초 치유사인 그녀가 파티원도 없이 혼자서 이곳에 온 이유도 퀘스트 진행을 위해 불가피하게 찾은 것이었고, 그 퀘스트의 완료 지역이 바로 퀸즈 블론드였다.

“그러면 같이 가실래요?”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동행을 제안해 왔다.

하지만 에일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빛의 교단 소속이에요.”

“아, 정말요?”

알리사가 예상 못 했다는 듯이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뿐, 여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눈길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에일은 오히려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교단 소속인 게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흐음, 그게 문제가 될 일인가요? 저는 천주교인인걸요. 중요한 건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의미 있다고 봐요.”

그녀의 말에 에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루와 그 신도들의 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그녀의 제안이 갑자기 철회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건 변치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건 자신의 선택이었는데, 방금의 레이드와 싸움에서 느꼈듯이 치유사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것도 타 게임 랭커 출신인 데다가, 혼자서도 근접 클래스 유저 둘을 상대할 만한 전투실력까지 지닌 치유사라면, 오히려 파티와 길드들이 돈이나 분배 비율을 더 얹어 주고서라도 못 데려가서 안달 낼 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일은 오히려 조건을 한 가지 달았다.

“잠깐이라면 괜찮지만, 사정이 있어서 길게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제 에일은 본격적으로 랭커들을 추월하기 위해 작업에 들어갈 것이었고, 느긋하게 다닐 여유는 없었다.

물론 랭커 출신인 알리사가 민폐가 될 만큼 뒤쳐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이제 폐인 짓에 가까워질 자신의 루틴에 맞춰 따라오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런가요?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좋아요.”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에일이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음에도 기분 나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고, 에일도 쥐고 있던 해체용 칼을 몬스터의 시체에 꽂아 넣은 뒤, 손을 마주 내밀었다.

“잠깐이지만, 잘 부탁드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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