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사도 (4)
‘마… 말도 안 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가 경악했다.
시시각각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는 자신의 체력바와 주변에 쓰러진 유저들이 교차해 가며 그의 시야에 마구 들어왔다.
고작 두 명의 유저에게 여섯이나 되는 숫자가 압도당한 것이다.
특히 장검을 든 남자는 혼자서 넷을 상대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가 멀리서 보스몬스터를 잡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막상 직접 코앞에서 마주해 보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번에 방어구 장비 세트를 맞춘 게 불과 몇 시간 전.
실제 현찰까지 동원해 가며 경매장에서 큰돈을 들여 구입에 성공했고, 아직 뿌듯한 감정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었는데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벌써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게다가 힘들게 올려 놓은 레벨이 다운되고 남은 돈까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자 남자는 고함을 치며 검을 힘껏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변변찮은 발악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푸욱!
장검에 복부를 관통당한 남자는 바닥에 축 늘어졌고, 절망감을 느낄 새도 없이 강제 로그아웃당했다.
“음… 나쁘진 않네.”
마지막으로 남았던 유저를 해치운 에일이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세 배나 되는 인원을 그야말로 압도한 모습.
이번에 새로 얻은 사도 전용 스킬을 시험해 보기 위해, 유저 하나쯤은 생포해 두면 좋았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사도’의 능력을 얻은 에일이라 해도, 여럿을 상대하는 만큼 적당히 봐주며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넷이나 죽이고 신앙심과 광기 스탯을 충실히 쌓았으니 만족했다.
더군다나 마지막 보상까지 확실하게 그에게 들어왔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여섯 명의 유저 모두를 죽이십시오(6/6)]
[여신의 총애 +0.21% (현재 52.07%)]
[빛의 교단 공헌도 +300]
[신앙심 스탯 +2.2]
‘그나저나 실력이 대단한데…….’
옆에 서 있는 알리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에일이라고 해도 지금 시점에 유저 여섯을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모두 PVP 경험이 많지 않은 데다가 호흡을 맞춘 적도 없었고, 칭호와 패시브 효과가 적용되는 ‘이단’ 상태가 된 것, 그리고 보스를 위해 마셨던 도핑 포션의 효과가 남아 있던 것 덕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후방에서 지원해 준 치유사의 존재였다.
그녀는 앞으로 나선 에일에게 정확히 필요할 때마다 힐을 줬고, 동시에 후방을 노리던 유저 둘을 동시에 상대했다
그덕에 에일은 가벼운 타격은 무시해 가며 과감하게 상대의 수를 줄여 나갈 수 있었고, 후방에 있던 알리사는 스태프로 두 유저를 아예 마무리까지 해 부담을 훨씬 줄어들게 해 줬다.
‘혹시 부캐인가……?’
확실히 그녀는 범상치 않은 실력자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고레벨인 유저가 부캐릭터를 파서 저레벨대에서 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워로드에서 세컨드 캐릭터 육성은 그리 흔치 않았다.
실력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한 워로드의 상황상, 보통 캐릭터 하나 키우는 것도 바쁜 데다가, 부캐를 키울 캐릭터 슬롯을 늘리려면 꽤 많은 비용을 게임사에 지불해야 했다.
심지어 비용을 지불하고도, 동시에 두 캐릭터를 육성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꼼수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페널티가 많이 붙어 있었고, 특이한 취향의 컨셉 유저가 아닌 이상 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죽일 필요까지야 있었을까요…….”
널브러져 있는 유저들의 시체를 본 알리사가 말했다.
원래 싸움에 참가할 생각까지는 없던 그녀는 싸움이 시작되자 유저들이 자신에게까지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길래, 얼떨결에 맞상대를 한 것이었는데 그대로 유저를 둘이나 죽여 버렸다.
그녀의 경험상 PVP에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 꺼림직하긴 했다.
“어쩔 수 없죠. 같은 사냥터에 있다간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보스몹을 잡아서 아이템을 독식한 저는 기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걸요. 여기서 정리를 하고 가는 편이 나아요.”
“하긴… 그렇죠.”
에일이 적당히 둘러대자 알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사람한테 여신이 퀘스트를 줬다며 설명하기엔 곤란했다.
이제 다른 누군가가 금지된 폐허에 발을 들이기 전에, 유저들의 시체를 파밍할 시간이었고, 분배에 대해서 논해야 했다.
이미 지인이거나 파티인 상태라면 역할이나 지분에 따라 적당히 분배량을 조절할 수 있겠지만, 이번은 아무런 안면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
정확한 지분을 따지기도 애매한 데다가 합의된 바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싸움인 만큼, 분배 비율을 조정했다간 괜히 상황이 지저분해질 수 있었다.
이럴 때는 굳이 얼굴 붉히지 않고 반반으로 나누는 게 가장 깔끔…….
“아이템은 에일 님이 다 가져가세요. 저는 얼떨결에 휘말린 거라 챙기기도 뭐하네요.”
“예?”
시체들 앞에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에일이 놀라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에요, 정말 필요 없어요. 애초에 이러려고 싸운 것도 아니고.”
유저를 잡고 아이템을 파밍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지 모두 양보하겠다는 그녀의 말.
하지만 아무리 에일이라도 눈앞에 널브러진 여섯 유저의 전리품을 홀라당 혼자서 먹어 버리기엔 양심이 찔렸다.
혼자 싸웠던 것도 아니고 도움이 컸던 만큼 뭐라도 해 주는 게 양심적인 게이머의 도리.
마침 좋은 생각이 난 에일은 인벤토리에서 스태프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정말 저 혼자 이걸 다 먹기는 뭐하고… 이거라도 받으세요, 그럼.”
“어라?”
건네받은 아이템을 확인한 알리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에일이 지하에 있던 네크로맨서 라트마를 잡고서 얻은 무기 아이템이었다.
“이런 걸 줘도 돼요?”
“그럼요.”
그가 건네준 ‘라트마의 스태프’는 순수 메이지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 계열 클래스 공용 무기였고, 치유사도 사용가능했다.
저레벨대이긴 해도 엄연한 보스 네이밍 무기이니 성능이나 부가 옵션도 만족스러울 것이었다.
예상대로 알리사는 꽤 좋은 반응을 보였고, 에일의 입장에서도 유저 전리품을 반반으로 나누는 것보단 상급 스태프 하나로 퉁 치는 게 금전적으로 이득이었다.
“감사해요.”
“제가 더 감사하죠.”
합의도 끝났겠다, 에일은 본격적으로 유저들의 아이템을 챙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번엔 15레벨을 넘어서고 어느 정도 파밍이 되어 있는 유저들이라 그런지, 기본 아이템밖에 없던 뿔토끼에게 죽었던 유저와는 이야기가 달랐다.
초보자에게 지급되는 기초 장비가 아닌 다양한 장비 아이템들과 회복 포션 여럿, 사냥을 하면서 모았던 잡템, 두둑한 동전 주머니까지.
레벨 업을 위한 경험치까지 꽤나 오른 걸 보면,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를 잡은 것 이상으로 짭짤하게 챙긴 에일이었다.
괜히 워로드 내에서 유저를 상대로 한 PK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상대에게 다시 보복당할 위험성을 감수하고도 그만한 보상이 들어오니 많은 유저가 꼬이는 것이었다.
물론 몬스터를 잡았을 때와는 또다른 PK 특유의 쾌감만을 좇아서 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높은 보상을 노리고 손대는 이들이 많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 바닥에 뻗어 강제 로그아웃당한 이 녀석들은 재수가 없어 그쪽 영역에 손을 대자마자 에일과 알리사에게 걸린 것이었지만, 수준급의 실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언젠가는 역관광을 당할 때가 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초반부터 PK에 맛을 들리기 시작하면 성장의 기본인 사냥은 뒷전으로 내팽개치고 그 레벨대에 정체되기 십상이었다.
그때 루팅이 모두 끝났고, 이제 얻은 장비아이템 중에서 직접 장착할 것들을 선택할 때였다.
단검, 스태프, 양날 도끼 등 이번에 그가 얻게 된 무기 중에 에일에게 맞는 종류는 하나도 없었지만, 방어구는 무기에 비해 비교적 종류가 적었다.
더군다나 여태껏 방어구는 기본 지급 아이템으로 사냥하던 그인 만큼, 이들이 마침 딱 알맞은 시점에 건네준 장비들을 거를 이유가 없었다.
이단심판관이 선택할 만한 방어구 세팅은 보통 중갑과 경갑, 가죽 계열 중 하나였는데, 에일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일단 중갑은 내 취향이 아니고.’
주로 단단한 탱커 계열의 직업이 선택하는 중갑 방어구는 방어력은 높아져도 속도가 느려졌다.
비교적 수동적인 면을 띠고 있는 방어구였기 때문에 시작이 늦은 만큼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할 에일의 입장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아닌 데다가, 답답한 속도의 플레이 방식은 그가 질색을 했기 때문에 세 가지 중 가장 먼저 기각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빠른 속도가 장점인 가죽 방어구를 입기엔 곤란했다.
이유는 바로 가죽 계열의 가장 큰 약점인 낮은 방어도.
근접 딜러로서는 불가피하게 맞을 수밖에 없는 회피 불가기에 취약해져, 데미지 흡수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된다.
앞에서 데미지를 흡수하며 어그로를 끌어 주거나, 뒤에서 보조하며 회복을 시켜 주는 팀원들이 있다면 모를까, 레이드든 PVP든 주로 솔로 플레이 위주로 활동할 에일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제외된 것들을 빼면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적당한 방어도와 속도, 양측 모두를 보장해 주는 경갑 계열 방어구였다.
머리, 상의, 하의, 장갑, 신발.
마침 딱 다섯 피스의 경갑 아이템이 마련된 상황이었고, 에일은 재빨리 아이템들을 장착했다.
[같은 종류의 방어구를 장착해 경갑 세트 효과가 적용됩니다!]
[민첩성 +3%, 방어력 +10%]
세트 효과가 확실히 적용되었음을 확인한 에일은 설정을 조작해 걸리적거리는 투구의 겉모습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다른 장비는 해당 없는 사안이었지만, 투구만큼은 실제로 장착했더라도 외양상 보이지 않게 설정을 건드릴 수 있었다.
머리에 쓰는 장비의 경우, 시야를 일부 가리는 것도 몇몇 있다고 들었기에 에일도 보이지 않게 설정했다.
물론 멋이나 분위기를 위해 모자를 보이도록 하거나, 탱커 계열의 클래스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을 때 동요하지 않고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투구가 보이도록 설정을 해 놓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철저히 유저 개인의 취향일 뿐.
세세한 부분에도 민감한 랭커들 역시 별 신경 안 쓰고 활성화시켜 놓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루팅과 설정을 끝낸 에일은 혹여 자리를 비운 동안 트래구울의 사체를 건드린 유저들이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대부분의 유저에게 외면받는 기피 사냥터 ‘금지된 폐허’인 만큼 주변에 다른 유저는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여기 있던 여섯… 아니 떨어져 죽은 궁수까지 일곱이 강제 로그아웃당하고 나서 사냥터 안에 있는 유저라고는 에일과 알리사가 전부 같았다.
“그럼 이제 내려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