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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이단심판관-12화 (12/227)

12화 신성모독자 (4)

드드드드!

위쪽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에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지만, 에일은 급하게 움직이려 하지는 않았다.

당장 동굴이 무너질 일은 없었고, 전리품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본 에일은 먼저 라트마의 시체로 다가갔다.

방금 뿔뿔이 재로 흩어져 흔적만 남은 자리였지만, 남겨 둔 아이템과 돈을 챙기는 데는 별문제 없었다.

-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라트마의 스태프(상급)]

[찢어진 로브 조각 x 11(일반)]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빛 스킬북]

[6실링 14 크론]

이번 사냥터에서 좀비들을 잡고 챙긴 돈이 모두 합쳐 4실링이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큰돈.

거기에 마법사용 스태프가 상급 아이템으로 나왔다.

저레벨인 게 아쉽기는 하지만 무려 보스의 이름이 수식어로 붙어 있는 데다가 상급 장비 아이템인 만큼, 경매장에 올리면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에일의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겉면이 오래된 가죽으로 된 낡아빠진 책이었지만, 유저가 스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아이템이었다.

그를 내려다본 에일은 주저 없이 그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은은한 하얀빛이 내뿜어져 책을 감싸더니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질긴 피부(하급)]

- 적의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피부를 단련해 단단하게 만듭니다.

- 방어력이 3(레벨 비례)만큼 증가합니다.

“…….”

하지만 잠시 설명창을 내려다보던 에일은 들고 있던 스킬북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지금 나타난 스킬을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대로 스킬북을 활성화시켜 배웠다면, 당장 방어력을 올려 주는 패시브 하나가 추가되어 이래저래 여유가 생겼겠지만, 문제는 배울 수 있는 스킬의 수가 레벨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낮은 성능과 등급인 데다 상위 스킬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종류의 패시브도 아니었고, 10레벨에 하나씩 오르는 스킬 보유 수만 차지해 다른 기술을 배울 수 없게 만들 뿐이었다.

아무 스킬이나 닥치는 대로 마구 채워 넣는 짓은 실패한 육성의 망캐가 되는 지름길이었다.

물론 배운 스킬을 제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스킬로 교체하는 비용이 굉장히 높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 뭐…….”

입맛을 쩝 하고 다신 에일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그의 얼굴엔 실망한 기색이 거의 없었다.

주어지는 스킬이 랜덤으로 정해지는 워로드의 스킬북에는 모두 각각에 더 좋은 스킬을 얻을 확률이 높은 ‘잠재력’이라는 게 붙어 있었는데, 잠재력 등급에 대해선 겉으로 띄는 빛의 색깔로 구별할 수 있었다.

먼저 쓸 만한 스킬을 줄 확률이 가장 낮은 하얀빛 스킬북부터 차례대로 주홍빛, 붉은빛, 보랏빛, 검은빛 순이었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스킬을 줄 가능성이 높은 황금빛 스킬북까지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높은 등급의 스킬을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평범한 유저들이라면, 하급 스킬이라도 초반에는 감사히 챙겨 가겠지만, 에일은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에일에게 버림받아 땅바닥을 구른 스킬북은 유저 간 교환이 불가능한 아이템인 만큼, 스르륵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뭐, 당장 수확은 기대 이상이었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에일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슬슬 둘러봤다.

마법사의 연구 겸 수행 석실인 이곳은 빼곡한 서재와 어질러진 탁자, 그 외에도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아이템 파밍.

에일이 게임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서재를 줄줄이 쏟아내며 쓸 만한 아이템이나 값나가는 골동품들을 찾았고, 항아리란 항아리는 모조리 깨부수며 구석 자리에 박혀 있는 은색 상자를 끌어내 뒤졌다.

그렇게 몬스터의 남은 살림살이를 풍비박산 내 버리며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다 챙겼다.

“오케이, 하나 발견!”

* * *

“끄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사냥터, 금지된 폐허에 울려 퍼졌다.

사냥터에 넘쳐나는 좀비들을 뚫으며 달아나던 그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필드 보스 몬스터에게 쫓기다 결국엔 잡혀 버렸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전 정보도 없던 유저 한 명으로서는 마땅히 상대할 방법도 없었고, 그저 죽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낡은 건물 위에서 숨어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진짜 트래구울이잖아?”

“젠장, 대체 어떤 자식이야?”

유저 몇몇이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곳 주변에서 사냥을 하던 예닐곱쯤 되는 유저들은 갑자기 나타난 강력한 보스 몬스터를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피신한 상태였고, 비상사태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거 주변에 있는 고레벨 유저가 소식 듣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은데…….”

“혹시 누구 인맥 있는 사람 없어? 아니면 같은 길드원이라거나.”

“그게… 내가 길드에 들어 있기는 한데 다들 거리가 멀어서…….”

“에이 씨, 간만에 널널한 사냥터에서 꿀 좀 빨고 있었는데!”

한 유저가 분통을 터트렸다.

좀비들의 끔찍한 외양에 적응이 돼서 사냥 속도가 슬슬 붙으려 하자마자 난데없이 사냥터를 점거당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트래구울이 있는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다른 유저는 대담한 제안을 해 왔다.

“그냥 우리가 나서서 도전해 보는 건 어때?”

“…뭐라고?”

“그러니까 트래구울 저 녀석을 우리가 직접 잡아 버리자고. 까다로운 놈이기는 해도 이 정도 인원이면 충분할 거 아냐.”

분명 이곳 ‘금지된 폐허’는 대부분의 유저에게 기피되는 사냥터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기꺼이 발을 들인 이들은 다들 나름 본인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제안을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리야. 레이드 전에 호흡을 맞춰 보기는커녕 이제 처음 서로 얼굴을 맞댄 사람도 많은데, 이대로 도전했다간 개죽음밖에 안 돼.”

“그래, 까닥 잘못해서 죽었다간 장비도 떨구고 48시간 접속 페널티라고.”

“…레벨도 떨어지고 말이야.”

혹여 들킬까 숨죽여 숨어 있는 유저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의 답답함과 원망은 곧 다른 이에게 향했다.

“대체 어떤 자식이 이런 짓을…….”

“잡히면 바로 죽여 버리겠어.”

필드 보스 몬스터, 트래구울.

흉악한 시체 덩어리 같은 모습에 겉엔 두터운 갑피까지 두르고 있는 녀석은 금지된 폐허 지하에 있는 네크로맨서 라트마를 잡으면 나타나는 보스 몬스터였다.

이제 막 15레벨에 근접한 초심자들이 감당하기엔 워낙에 까다로운 몬스터인 탓에 트래구울을 직접 처리할 게 아닌 이상, 라트마 역시 건드리지 않는 게 ‘금지된 폐허’ 사냥터의 암묵적인 룰이자 기본 매너였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속도도 빠른 데다가 활동 범위에 별다른 제약이 없어 지금처럼 사냥터 전역을 못 쓰는 상황이 오곤 했다.

“이봐, 여기야! 잡았어!”

“빨리 따라와, 이 자식아!”

아래층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두 유저가 한 남자를 붙잡고 끌고 왔다.

라트마에게 향하는 던전 입구에 비매너 유저의 정체를 확인하러 갔던 유저들이었다.

“뭐야, 저 녀석이야?”

끌려오는 남자의 얼굴을 본 유저들이 수군거렸다.

이름부터 확인하려 정보를 열람하려 했지만, 비공개되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벌써 정보를 비공개 처리해 둔 걸 보니 역시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비매너 유저다웠다.

“음… 다들 여기 모여서 뭐 하세요?”

멋쩍은 표정의 에일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뻔뻔한 태도에 유저들은 격분했다.

“이게 지금 누구 탓인데……!”

“누군 못 잡아서 안 잡고 있던 줄 아나!

“됐어, 그냥 저 자식 잡아서 손해나 메꾸자고.”

한 남자가 검을 뽑으며 성큼성큼 다가섰다.

사냥을 못 해 손해 본 경험치와 아이템을 PK로 조금이나마 메꿀 생각이었고, 물론 가장 주된 이유는 민폐를 끼친 대상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자… 잠깐, 다들 진정하세요! 아직 저분 이야기도 안 들었잖아요.”

갑자기 흉흉해진 분위기에 성직자 같은 하얀 로브 차림의 여자가 나서서 그를 말렸다.

물론 정말 워로드의 일곱 가지 신앙 중 하나를 따르고 있는 성직자인 건 아니었고, 단순히 치유사 클래스의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지금 이 상황에 이야기를 뭘 들어?”

“실수… 일 리는 없겠지만, 혹시 근처에 트래구울을 잡을 만한 지인분이 계실 수도 있으니까요.”

일리가 있는 여자의 말에 칼을 뽑아 든 남자도 멈춰 섰고, 모여 있던 유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모았다.

이곳 사냥터의 암묵적인 룰은 어디까지나 ‘트래구울을 잡을 수 없을 경우’ 라트마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저 거대한 보스 몬스터를 해치워 버릴 수 있는 인맥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렇게 시비가 걸릴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에도 에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어! 뺀질거리게 생겨 가지고는!”

“당장 죽여, 그냥!”

분개한 유저들이 에일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에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지인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잡을 거니까요.”

“푸하하, 저걸 잡는다고? 미안하지만 우린 안 도와줄 건데. 죽고 싶으면 너 혼자 가서…….”

“도와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에일이 남자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잡고 있던 팔을 뿌리치고는 건물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어… 어딜……!”

“다들 방해하지 말고 거기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세요.”

에일이 팔을 휘휘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대로 은근슬쩍 도망가는 건 아닌가 싶어 유저들이 뒤쫓아 가려는 순간, 갑자기 에일이 커다랗게 소리를 치며 몬스터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자 트래구울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고, 움찔한 유저들은 재빨리 벽뒤로 숨어 숨을 죽였다.

비매너 유저가 아니라 미친 유저였던 건가 싶은 그 순간, 에일이 품에서 아이템들을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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