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신성모독자 (3)
끼이익.
무너진 마을 창고의 잔해 속을 뒤지자 바닥에 깔려 있는 널빤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널빤지를 옆으로 치우자 아래로 향하는 깊숙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에일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고, 습한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굉장히 오래된 듯한 동굴 곳곳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횃불들이 알맞은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지하 던전이라고 보기엔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았고, 깊이도 얕았다.
구불구불한 길을 어느 정도 지나자, 하나뿐인 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석문과 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좀비 두 마리가 있었다.
녀석들은 에일을 보자마자 곧바로 달려들었지만, 에일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질 뿐이었다.
일반 몬스터 사냥도 어려운 축에 속하는 워로드의 특성상, 5레벨이나 차이 나는 몬스터 두 마리라면 굉장히 불리한 싸움이었음에도 에일은 편하게 풀어 나갔다.
“여기가 맞겠지…….”
진득한 피가 묻은 장검을 한차례 부드럽게 닦아 낸 에일이 입구를 막아선 커다란 석문을 바라봤다.
비교적 오래전에 봤던 내용이라 이런 석문 뒤에 있는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석문에 손을 대자, 커다란 돌이 드르륵 옆으로 움직이며 열렸다.
내부는 마치 무협지 속의 폐관 수련실 같은 음침한 석실이었는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하게 생긴 도구들과 책들로 가득 찬 마법사의 서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석실의 한가운데에 있던 남자가 검은 기운을 발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이곳에 발을 들여!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격분한 남자의 정체는 네크로맨서 라트마, 폐허 아래에서 나타나는 15레벨대 보스 몬스터였다.
이 마을을 페허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스토리가 있는 만큼, 관련 퀘스트가 있기는 하지만 퀘스트를 주는 NPC의 거리도 멀고, 중간 과정이 너무 오래 걸려 넘어가는 게 나았다.
[이단을 발견하였습니다!]
[교리를 어기고 사악한 어둠의 힘에 손을 댄 이단과 마주하였습니다. 그들이 죗값을 치르게 만드십시오!]
[임무에 실패할 경우 커다란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패시브, ‘증오의 칼날’이 발동됩니다!]
시스템 알림음이 울리자 에일은 라트마를 바라봤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이단자임을 알리는 섬찟한 문양의 ‘이단의 징표’가 찍혀 있었다.
보통 종교계에서 사용되는 이단이라는 말은 같은 종교 안에서 잘못된 교리를 따르거나, 가르침을 왜곡하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지만, 빛의 교단에서는 조금 다른 범주로 쓰이고 있었다.
그들이 따르는 빛의 신이자 세상의 창조주인 ‘루’에게 있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미 그녀의 신도나 다름없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었고, 직접 신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나 심지어 동물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기본 교리인 ‘정의’에 어긋난 행동을 일삼는 자는 모두 이단으로 낙인찍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판을 내렸다.
굉장히 독특하고 또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지만, 문제는 그것을 여신이 흡족해하며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이성이 없는 몬스터라 해도 악한 짓을 벌이고 다닌다면 가차 없이 이단의 표식이 찍히기 마련이었는데, 마을을 통째로 무너뜨린 네크로맨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빛의 교단을 따르게 된 이상, 이단의 징표가 찍힌 적을 마주치면 즉석에서 퀘스트가 부여되었고, 반드시 지정된 상대를 처단해야 했다.
만약 이단을 보고도 위험할 것 같아 모른 척 싸움을 피하기라도 했다간 굉장한 폭으로 여신의 총애 스탯이 떨어져 복구하기 힘든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은 퀘스트를 부여하는 시스템, 혹은 여신의 변덕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곤 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예외 없이 무조건 처치해야 한다고 보는 편이 나았다.
쿠웅!
네크로맨서 라트마가 회갈색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찍자, 어두운 파장이 석실을 메웠고 전투에 돌입했다.
[몬스터와의 레벨 차이가 심해 디버프 ‘위축’ 상태에 빠집니다!]
[흑마법으로 인해 디버프 ‘정신붕괴’ 상태에 빠집니다!]
[흑마법으로 인해 디버프 ‘공포’ 상태에 빠집니다!]
사방으로 뻗어져 나간 어두운 파장은 에일에게까지 미쳤고, 흑마법에 노출된 그에게 여러 디버프가 적용되었다.
물론, 그에게 걸린 디버프들은 모두 심리적 요인에 기반한 것들이었고 별반 힘을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스킬, ‘광적인 순교자’의 효과로 모든 심리적 상태 이상 효과가 무효화됩니다!]
[디버프 ‘위축’이 해제되었습니다!]
[디버프 ‘정신붕괴’가 해제되었습니다!]
[디버프 ‘공포’가 해제되었습니다!]
“뭐… 뭐야?”
흑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자 기세등등했던 라트마는 당황해 흠칫 물러섰다.
상태 이상이 완전히 틀어막힌다는 건 사령술과 상태 이상 스킬이 주력인 그에겐 치명적이었다.
급해진 라트마는 재빨리 지팡이를 한 번 더 내려쳤고, 바닥을 뚫고 시체들이 기어 나왔다.
바로 위의 마을을 뒤덮고 있는 좀비들과 똑같은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몬스터가 스무 마리 넘게 나타났기에 보통은 버거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겠지만, 에일은 지금 나타난 좀비들이 마을에 있던 녀석들만큼 강하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즉석에서 급하게 소환한 좀비들은 비교적 약하다는 설정이 라트마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나타난 녀석들은 체력과 공격력이 낮아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촤악!
그를 증명하듯 에일은 장검을 휘둘러 가며 길을 막는 좀비들을 하나둘 쓰러뜨려 나갔다.
그러자 라트마는 재빨리 다음 스킬을 시전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라는 듯이 커다란 준비 동작을 취하는 것으로 보아 상태 이상 ‘광분’을 쓰려는 것처럼 보였다.
흑마법 계열의 광분은 마법에 당한 이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을 공격하게 만드는 강력한 저주 마법이었다.
전문 힐러조차도 15~20레벨대라면 아직 상태 이상 해제 스킬을 보유하기엔 이른 시점이었기에, 네크로맨서 라트마를 공략하는 데 있어 파티 플레이를 포기하도록 강제하는 요소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솔로 플레이 시에도 강력함은 여전해, 광분 상태에 빠지면 보스 몬스터인 라트마를 노리지 못하고 주변의 좀비들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충분히 할 만하다.’
하지만 에일은 오히려 미소 지었다.
[강력한 흑마법으로 인해 디버프 ‘광분’ 상태에 빠집니다!]
[이미 광기에 물든 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상태 이상 효과입니다!]
[디버프 ‘광분’이 해제되었습니다!]
“네놈은 대체 뭐 하는 녀석이냐!”
회심의 마법인 광분마저도 먹혀들지 않자 라트마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솔로 플레이어인 에일에게는 녀석의 광분 마법은 오히려 호재였다.
경우마다 다르다고는 해도 1인을 대상으로 설계된 보스는 당연히 그에 맞춰 밸런스가 설정되기 마련이었고, 이쪽 근방의 저레벨들에게 악명 높은 라트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초반부터 보스의 패턴을 낭비하게 만든 만큼, 아무런 방해 없이 잡몹들을 제거해 나가 상황에 제법 여유도 있었다.
퍼억!
막아서는 좀비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린 에일은 곧바로 라트마에게 달려들었고, 장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도 결코 얕볼 만한 수준의 몬스터는 아니었다.
라트마는 곧장 방어 마법을 펼쳐 그의 공격을 막아 냈고, 검은 막에 튕겨나간 반동에 에일은 뒤로 주르륵 땅을 끌며 밀려나갔다.
약간의 체력이 떨어진 걸 확인한 에일은 혀를 찼다.
라트마의 특징은 바로 흑마법과 저주를 퍼붓는 네크로맨서임에도 근접전에 능숙하다는 것이었고, 이를 혼자서 상대하는 초보자들의 입장에서는 난이도를 급상승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수정을 쓰면 훨씬 쉽겠지만… 지금 쓸 건 아니지.’
그에게 상대를 끝장낼 확실한 수단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체력도 최대치에 가까웠고, 위협적인 장면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기준에서는 5레벨 정도 차이 나는 일반 보스몹 정도는 되어야 객관적인 실력 파악이 되었다.
에일은 다시 한 번 달려들었고, 이번엔 검을 휘두르다 멈추고 한 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도 방어막을 펼치던 라트마는 에일이 공격을 도중에 캔슬하자, 방어 마법의 짧은 유지 시간으로 인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푸욱!
“크아악!”
에일의 검이 가슴팍에 박히자, 라트마가 입고 있던 로브 안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소환된 좀비들이 그를 구하려 사방에서 달려드는 동안, 에일은 추가 타격 서너 방을 먹이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잡몹을 제거해 나가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라트마는 어둠의 창을 소환해 에일에게 연달아 던졌다.
푹! 푹! 푸욱!
하지만 에일은 오히려 좀비들을 끌어당겨 방패로 삼았고, 녀석의 공격으로 귀찮게 하던 놈의 소환수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이런!”
역효과가 난 자신의 공격에 라트마는 허둥지둥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에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소환수 하나 없는 네크로맨서가 마법까지 방금 캐스팅하기 시작했다면 완전히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곤죽이 된 좀비들을 훌쩍 뛰어넘은 그는 다시금 장검을 휘둘렀고, 다시 한 번 날린 시간차 공격이 실드를 뚫고 적중했다.
캐스팅이 취소된 라트마는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반격했지만, 아무리 메이지치고 근접전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근접 전문 클래스에 전투 실력까지 우위인 에일의 검에 대항하기란 무리였다.
오래가지 않아 라트마는 바닥에 쓰러졌고, 경쾌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단을 처단하였습니다!]
[빛의 교단 공헌도 +35]
[신앙심 스탯 +1]
[광기 스탯 +1]
[여신의 총애 +0.16% (현재 50.27%)]
[더욱 강한 여신의 가호가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전투 관련 능력치, 일부 상승.]
레벨이 오르며 스탯과 공헌도, 총애 수치까지 늘어났다.
역시 이단의 징표가 찍혀 있는 보스를 하나 잡으니 본격적으로 이단심판관의 강점이 드러났다.
비록 다른 교단에 비해 총애 스탯의 관리가 힘들고, 여타 유저들에게 기피 대상이긴 했지만, 워로드의 모든 직업이 그렇듯이 단점이 있다면 그만한 장점도 있기 마련이었다.
총애 수치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이단심판관은 반대로 여신의 요구를 착실하게 이행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직업은 따라잡기 힘들 만큼 강력한 면모를 보였다.
딜링, 탱킹, 유틸리티 모두 준수했고, 근접 클래스치고 범위 공격 스킬도 많은 편이라 일 대 다 사냥도 거뜬했다.
방어력 관통 스킬도 적지 않게 존재하는 편이라 퓨어 탱커 같은 체력 돼지들을 잡아내는 것도 쉬웠고, 심지어 흔치는 않았지만 자가 회복 수단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스킬 구성이 훌륭한 데다가 총애 스킬로 인해 올라가는 깡스탯으로 스펙까지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 확실히 솔로 플레이에 있어서 이만한 직업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만능 캐릭터였다.
아직 상황이 상황인지라 확실한 방향성까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의 직성이 풀리기 위해선 일단은 어딜 가도 꿀리지는 않을 만한 육성 정도는 해 둘 생각이었다.
아무리 모니터 속의 온라인 게임과는 달리 직접 몸을 써야 하는 가상현실 게임이라 해도, 과거 랭커로서의 경험으로 게임 자체의 센스와 이해도가 높은 건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처음 접속한 이후로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워로드를 시작하기 전에 걱정했던 전투 실력 자체도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에일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광기 스탯도 올랐네…….’
6번째 스탯, 광기.
정체를 알 수 없던 광기 스탯도 신앙심 스탯과 함께 수치가 올랐다.
아무래도 이번처럼 이단을 잡을 때마다 올라가게 되어 있는 스탯 같았는데, 자세한 정체는 여전히 불명이었다.
[비활성화되어 있는 스탯입니다.]
“…뭐 어쩌라는 거야?”
어김없이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에일이 황당하게 쳐다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그때, 에일의 뒤편에 있는 라트마의 시체가 갑자기 들썩였다.
흉측한 모습으로 입을 쩍 벌린 그는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소리쳤다.
“난 죽음을 초월한 네크로맨서다……! 결코 죽지 않아!”
파스스.
발악하던 라트마는 기우뚱 넘어가더니 불안정하던 신체가 검은 잿가루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자 갑자기 위쪽에서 커다란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필드 사냥터가 위치해 있을 상층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떨림에 에일은 피식 웃었다.
“이제 본게임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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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현재 사도의 길을 앞두고 있습니다! (6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