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이단심판관-9화 (9/227)

9화 신성모독자

“잠시만요.”

“네, 네. 편하게 구경하세요. 전 잠깐 창고에 물건 좀 넣고 올게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에 에일이 손을 올리며 말하자, 여주인은 방긋 웃으며 답했다.

곧바로 퀘스트를 깬 영향인지 한층 더 살갑게 에일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지하실 아래로 내려가자, 에일은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를 유심히 보았다.

기본적으로 워로드는 10레벨이 오를 때마다 보유할 수 있는 스킬 한도가 하나씩 올라, 유저 스스로 스킬북을 구해 스킬을 채워 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직업별로 공통적으로 있는 세 가지 기초 스킬은 첫 5, 10, 15레벨에 하나씩 활성화되어 골라 배울 수 있었다.

직업마다 엄청난 숫자와 다양한 계열의 스킬이 있는 워로드의 시스템상, 이 세 가지 기초 스킬이 각 직업의 특성을 정하고, 같은 직업을 가진 유저들을 묶는 공통점이라고 봐도 되었다.

그리고 에일에게도 첫 번째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흐음…….”

[성화(기초)]

- 여신의 뜻을 따르는 형벌의 집행자, 이단심판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불꽃입니다.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은 성화는 세상의 모든 악마와 이단자들을 불태워 심판하기 전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 무기에 신성, 화 속성을 부여하고 공격력을 대폭 증가시킵니다.

[증오의 칼날(기초)]

- 온몸을 적신 피와 역겨운 악취 속에서도 심판관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악인에 대한 증오입니다. 악한 자들을 멸하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 이단을 상대로 한 모든 공격의 데미지가 25% 증가합니다.

[광적인 순교자(기초)]

- 악한 자들은 세상에 공포를 뿌리고 다니지만, 여신의 숭배자들은 언제든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죽음의 두려움을 잊은 심판관들은 모든 악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 모든 종류의 심리적 상태 이상을 무효화합니다. 반대로 모든 적에게 주는 공포, 위축 등의 상태 이상 효과는 2배로 적용됩니다.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스킬들이 무슨…….”

하나하나 설명을 읽어 본 에일은 썩어 가는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기초 스킬 설명부터 컨셉들이 정말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게, 단단히 미친 집단이라는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히 좋아. 문제는 이 중에 뭘 고르냐는 건데.’

보통 이단심판관을 택한 사람들의 첫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대부분 이단심판관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성화’를 골라 무기에 속성을 부여하며 공격력을 높이는 쪽을 선택했고, 드물지만 다음에 향할 사냥터가 ‘이단’이 있는 곳이라면 ‘증오의 칼날’을 고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에일은 주저하지 않고 전혀 다른 스킬을 선택했다.

[‘광적인 순교자’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어려운 길을 택한 자

세력: 빛의 교단

레벨: 5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31(+7) 민첩: 24(+5) 체력: 25(+5) 마력: 20(+5) 신앙심: 1.1 광기: 0

패시브

[광적인 순교자(기초)]

액티브

N/A

‘좋아.’

첫 스킬이 생겨나자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광적인 순교자, 공포나 위축 등의 심리적 상태 이상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패시브로 PVP나 고레벨의 몬스터, 혹은 보스를 상대할 때 이만한 스킬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상태 이상 ‘저항’이 붙은 스킬이야 많았지만, 아예 ‘면역’ 혹은 ‘무효화’는 절대 흔한 스킬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성능과는 별개로 일반적인 사냥터 중 관련 능력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처음으로 선택할 만한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일은 자신이 향할 다음 사냥터에서 필요한 건 ‘광적인 순교자’ 스킬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보유 금액 - 4실링 94크론]

‘넉넉하진 않지만 필요한 물건들은 다 살 수 있겠어.’

남은 금액을 확인한 에일이 생각했다.

본래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금 같은 시점에서는 사냥만으로는 음식과 포션값에 쪼들려 돈을 모으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냥이 쉽지 않은 편인 워로드에서 평범한 유저들에게 포션 사용은 필수적이었고, 부족한 돈을 구하려 NPC 밑으로 들어가 알바를 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옆에서 돕다가 그게 적성이 맞다 싶은 유저들은 자연스럽게 생활 컨텐츠에 빠져들었다.

연금술, 대장장이, 낚시, 농사, 무역 등등, 엄청난 종류의 비전투 계열 요소들도 굉장히 폭넓고 깊은 컨텐츠를 자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하게 사냥만 하는 유저들이 훨씬 적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에일은 처음부터 향한 곳이 가장 어려운 사냥터임에도 포션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데다가, 식량까지 몬스터에게서 일일이 얻어냈기 때문에 당장 빠져나갈 돈이 없었다.

게다가 보상이 좋은 편인 고난이도 몬스터를 잡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돈을 가진 남자의 시체에게서 포션까지 얻어내 쓸 수 있는 돈이 제법 있었다.

창고로 향했던 여주인이 돌아오자 에일은 전 재산을 털어 미리 생각해 둔 물건을 몇 가지 구매한 뒤 가게를 나섰다.

“그럼 가 볼…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시계를 확인한 에일이 진한 아쉬움에 한숨을 턱 내쉬었다.

다음 날도 출근을 나가야 하는 만큼, 더 이상 오래 플레이할 수 없었다.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기운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예전처럼 남아도는 게 시간일 때가 아니니까.’

메뉴를 활성화한 에일은 로그아웃 버튼을 눌렀고, 약간의 대기 시간 이후 접속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PVE(Player Versus Environment).

대부분의 MMORPG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든 컨텐츠를 뜻하는 단어로 쓰인다.

평범한 필드의 사냥터부터 시작해서 드물게 리젠되는 엘리트 몬스터, 철저히 숨겨진 히든 던전, 스토리가 담겨 있는 시나리오 던전, 유저가 입장할 때마다 새로이 해당 플레이어만의 공간이 생성되어 외부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스턴스 던전.

워로드엔 그 외에도 정말 수많은 종류의 PVE 컨텐츠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컨텐츠 중에서도 PVE의 진정한 꽃은 수십에서 수백 명의 공격대가 동원되는 필드 보스 레이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그를 반박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급조한 파티 몇 개로는 감히 마주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강력한 보스들이 필드 여러 곳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험난한 시련을 극복해 녀석들을 공략하는 데 성공할 경우 그에 걸맞은 보상과 명예가 공략자들에게 따라왔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이 대부분 녀석들에게서 나오는 만큼, 최고의 길드들조차 앞다퉈 경쟁하며 공략법을 찾아냈다.

그건 워로드의 12강 길드로 유명한 붉은 달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을 이끄는 길드장인 하만은 머리를 긁적이며 탁자 위에 올려진 지도를 내려다봤다.

“현재 인원은?”

“예정대로 레이드 참가자 110명 전원이 모였습니다. 장비, 버프, 도핑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단계입니다.”

“원래 따로 활동하던 레이드 1, 2군 팀을 합쳐서 온 거니까. 호흡 엇갈리지 않게 최대한 신경 쓰라 말해 둬.”

“호흡이라면 이틀 전부터 집중적으로 연습해 둔지라 문제없을 겁니다.”

“연습은 연습이고. 이런 무대에서는 항상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어.”

“길드장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한 길드원이 서둘러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러자 하만은 고개를 까닥이며 말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레이드 장소와 바로 근접한 위치인 카이아 북쪽 언덕에서 학살의 정찰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원은 총 여섯이었고, 신원도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위치에 집결 중인 빙해와 나이더스 길드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고……. 아무래도 레이드를 방해하려는 대규모 꼬장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뭐, 그 녀석들이 남 잘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지. 그 정도는 예상 범위야. 우리 쪽 동맹도 불러 놨으니 충분히 저지 가능해.”

그들을 방해하러 올 연합의 규모가 꽤나 커 보였음에도 하만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 정도 위험성은 레이드 계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인지한 지 오래였다.

‘건수가 건수인지라 나눌 몫을 크게 부른 게 아깝긴 하지만, 이번 레이드 성공만 한다면 다른 12강 길드들보다 한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2강.

비록 6대 길드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 밑에서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6대 길드의 밑에 들어가지 않고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굳건하게 구축한 12개의 길드를 통칭하는 표현.

하지만 붉은 달의 길드장인 하만은 그 표현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야망으로 가득한 남자였다.

어찌 보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 데다가 레이드 팀을 제외하고도 방어조까지 포함해 길드의 주력이 모두 모여 시도하는 만큼, 실패하게 된다면 타격은 뼈아프다.

하지만 길드장인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면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고, 안주하면 뒤처지는 게 바로 워로드의 세상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흑랑에서 도착했다고 합니다. 협력을 약속한 방어조는 모두 모였습니다.”

“좋아, 이대로 돌입한다.”

* * *

“히야, 죽인다.”

편의점 계산대에 앉아 있는 우진은 턱을 괴고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하면서 여유 있는 시간엔 이렇게 워로드 관련 영상들을 짬짬이 보곤 했는데, 언제 봐도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붉은 달 길드에서 시도한 보스 레이드 영상.

190레벨의 필드 보스 몬스터, 폭렬왕 안기오스를 잡기 위해 구성된 붉은 달측 레이드 공략 팀은 110명뿐이었지만, 영상에서는 수천 명이 넘는 고레벨 유저가 모여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분명 영상의 제목은 레이드인데 공략조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서로 맞붙어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

전문용어로 ‘꼬장’이라는 방해 행위였다.

고난이도의 대규모 레이드에 성공하게 된다면 엄청난 보상을 얻게 되는 만큼, 시도하는 길드를 적대하는 상대 세력에서 레이드를 방해하러 오는 건 당연했고, 길드 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워로드에서는 밥 먹듯이 일어나는 게 꼬장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엄청난 숫자를 동원한 12강 길드 ‘학살’의 맹공으로 레이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붉은 달 길드 역시 중간부터 레이드를 포기하는 대신 반격하며 상대에게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힌 것으로 보였다.

“게임을 했으면 저런 현장 안에 직접 있어야 하는 건데.”

우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과거 즐겨 하던 PC 온라인 게임에서도 저런 대형 사건이 벌어지면 빠지지 않고 끼어들어 갔던 그였다.

게임을 미칠 듯이 좋아하는 그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아직 전업 플레이어의 꿈을 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알바를 때려치우고 워로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시작이 너무 늦었다는 점.

늦게 시작한 후발주자가 길드도 없이 혼자서 행동하면 PK범들의 타깃이 되는 건 물론, 혹여라도 악질 세력의 눈에 띄었다간 매장당하기 십상이었다.

전업까지 한다면 앞으로 경쟁이 치열한 사냥터에도 발을 디뎌야 할 텐데 마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를 보호해 줄 소속이 없는 이상 다수의 인맥 혹은 길드에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길드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랭커’ 정도는 되야 그런 것들을 모조리 무시하면서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했는데, 게임이 출시된 지 1년이나 늦게 시작한 그에게 있어서 랭커라는 벽은 어림도 없는 목표였다.

억 단위의 유저 계정 수를 가진 워로드에서 오직 최상위 1,000명만을 선정한 공식 홈페이지의 랭킹.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자들이 바로 랭커였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감이 차 있다고 해도, 초반에 가장 어려운 사냥터를 농락하면서 뚫어내는 것쯤이야 지금의 랭커들이라면 모두 다 손쉽게 거쳤던 과정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전부터 플레이하던 다른 가상현실 게임에 더해, 지난 1년간 워로드에 대한 경험까지 가득 쌓여 있는 상태.

아마 지금의 상태로는 실력, 자본, 레벨 모든 게 밀릴 것이다.

이미 최강자급인 랭커만 해도 이렇게 엄두가 안 나는데, 그 랭커들 중에서도 상위 100명을 통칭하는 ‘하이 랭커’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적당히 캐릭터를 육성해 남의 길드 밑에 들어가서 봉급이나 타먹자니, 그의 플레이 스타일상 도저히 좀이 쑤셔서 못 할 짓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들과 경쟁해 보려면 주류가 될 다음 게임이 출시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워로드를 제칠 게임은커녕 같은 개발사의 후속작도 워로드가 망하기 전까지는 안 나오게 생겼다.

이미 시장을 모조리 장악한 게임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후속작을 내서 절반을 나눠 버릴 이유가 없었다.

즉, 전업 게이머가 되려면 워로드 내에서 어떻게 수를 써 봐야 한다는 건데, 후발주자가 이미 한참이나 앞서간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나 노력이 아닌, 뭔가 ‘확실한 장치’가 따로 필요했다.

“하아, 진짜 어떻게 좀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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