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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까지 남은 시간 ‘00:47:32’]
“으으! 안 돼!”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자 우진이 소리쳤다.
하지만 텅 비어 있는 지하 감옥에선 그의 하소연을 들어 줄 사람조차 없었다.
‘길 좀 잘못 들었다고 죽인다니, 미친 거 아니야?’
자신을 잡아 가둔 여사제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억울함을 토해 내든, 침착하게 설득을 하든, 그녀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며 대화를 시작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니 방금 게임을 시작한 우진에게는 아무런 스킬도 직업도 없었다.
아직 캐릭터 이름도 없는 상황에 인맥이나 돈이 있을 리도 없었고, 겉으론 낡아빠진 주제에 시설은 튼튼하기 짝이 없어 탈옥도 도저히 무리였다.
‘하긴 진짜 말 그대로 미친 여신이었지……. 젠장!’
빛의 신 ‘루’의 또 다른 이름이 생각나자 우진은 절망했다.
워로드의 일곱 신은 독특하게도 모두 세 가지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워로드 속 강의 폭군이자 물의 신으로 유명한 ‘바하무트’의 경우, 단순히 물을 관장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완전한 표현은 ‘순환과 물, 멸망의 신’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반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이명 끝에는 한 가지 부정적인 이명이 따라붙었다.
그것도 대개 치명적인 경우로.
‘바하무트도 유저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데… 루는 말할 것도 없지. 앞에 정의하고 빛이 붙으면 뭐 해?’
정의와 빛, 그리고 광기의 여신.
그게 바로 루의 세 가지 이명이었다.
얼핏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조합이었지만, ‘루’가 기본적으로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 여신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에 따른 정의에 눈이 멀어, 극단적인 광기에 휩싸인 여신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믿는 신도들도 여신을 따라 맛이 간 상태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고, 침입자인 우진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곧바로 처형시킨다는 것도 황당하지만, 그들의 논리로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하 감옥이 이렇게 텅텅 비어 있는 것도 붙잡은 죄인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서 그런 것일 터였다.
‘하지만… 화형이라니!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화형이야?’
워로드는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게임’인 만큼 느껴지는 고통은 거의 없었고, 정신적인 충격을 안전선 내로 완화해 주는 장치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충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몬스터에게 목을 물어뜯기거나, 유저에게 칼을 맞아 죽는 순간의 섬뜩한 기분은 유저가 느끼는 리얼감을 올려 주고 게임을 훨씬 더 스릴 있게 만드는 요소였다.
워로드를 플레이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화형만큼은 가급적 피하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몸을 덥히는 후끈한 열기와 너무나도 현실 같은 불꽃의 비주얼이 겹쳐서, 첫 경험을 당하고 나면 아찔한 기분에 접속기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한동안은 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 첫 죽음이 이런 광신도들에게 붙잡혀서 당하는 화형이라니.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덜컹!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발소리가 들렸다.
‘설마… 아직 40분도 넘게 남았는데?’
불길한 기운에 우진이 몸을 떨었다.
그들의 성격이라면 속전속결로 예정보다 빠르게 형을 집행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철컥! 끼이익!
모습을 드러낸 여사제가 열쇠를 사용해 굳게 잠긴 문을 열었다.
“다… 당신은?”
우진은 그녀를 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분명 겉모습만으로는 그를 처음 발견하고 지하 감옥에 잡아넣었던 여사제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비추는 은은한 후광과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는 그녀가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걸 가늠할 수 있게 만들었다.
빛의 신 ‘루’.
우진의 앞에 나타났던 워로드의 신격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에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는 말투, 그때 마주했던 여신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현신했다는 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분명 잠들어 있어야 할 텐데…….”
아직 워로드의 신격들은 아직 반쯤 잠들어 있는 상태로, 유저들의 평균 레벨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라갔을 때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이라는 개발사의 언급이 있었다.
그들이 유저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일곱 신 중 하나가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건 불가능했어야 했다.
“생각보다 잘 알고 있군. 미리 워로드에 대해 꽤나 공부를 해 온 모양이야.”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우진은 흠칫 멈춰 섰다.
분명 워로드 속 세계관에서 ‘워로드’라는 단어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게임의 타이틀이었을 뿐, 게임 속 인물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단어였다.
“표정이 재미있구나. 분명 게임 속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해야 할 내가 어떻게 바깥세상의 존재를 알고 있냐는 것일 테지? 그것이 NPC와 유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일 테니.”
“어… 어떻게?”
우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NPC들이 인지하고 내뱉어서는 안 될 게임 용어들을 우르르 쏟아내고 있었다.
뭔가 중대한 오류가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을 해 보거라. 워로드가 운영진의 개입 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 그렇습니다.”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된 우진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워로드에서는 어떠한 외부의 개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개발사에서 공언을 한 만큼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외당하는 직업과 스킬 트리가 없는 전투 밸런스, 인플레이션 없이 안정적인 시장 체제, 다채롭고 끝없이 파고들 수 있는 컨텐츠들.
출시 전부터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완성된 게임이라는 문구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가상현실 시스템이라는 것과 더불어, 워로드가 홍보에 나설 때 적극적으로 사용한 요소 중 하나였다.
과거 망해 버린 가상현실 게임 중 하나인 ‘플리데커’에서는 패치 내역을 알고 있는 일부 운영진들의 대규모 시세 조작 사건으로 인해 업계가 한바탕 뒤집어진 적이 있었고, 그런 리스크를 원천 차단하는 워로드의 방식에 유저와 투자자들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아무런 개입도 없는 게임이라면 관리는 누가 하겠느냐? 유저들의 평균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지역에서 높은 레벨의 몬스터와 퀘스트를 제공해 줘야 할 텐데, 그에 따른 업데이트는 어떻게 할 것이며,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월드 이벤트는 누가 진행할까?”
그녀는 여사제의 몸으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게임 속 NPC, 더 나아가 여신의 입에서 업데이트니 유저니 하는 단어가 나오자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건 인공지능이 모두 맡아 처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정답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나다.”
“…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워로드의 신격들이 그 역할을 맡아 월드 내에 끝없이 변화를 주는 것이지. 이 거대한 세상을 조율하고 알맞게 다음 페이즈로 진행하려면 갇혀 있는 지식과 사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워로드의 개발자들은 우리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지식과 게임 속 개념을 부여했다. 강제 스크립트에 매여 있을 일반 NPC들과는 달리, 나를 포함한 오직 일곱의 신격체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어때, 이제 좀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건 무슨…….’
믿기 힘든 이야기에 우진은 벌어졌던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워로드에 떠도는 말들이라면 줄줄이 꿰고 있는 우진조차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이런 사실에 대해선 여타 유저들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운영진들이 언급한 적도 없고, 그동안 워로드의 일곱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거나 유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물론 신격들도 무거운 제약이 걸려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 탓에 지금처럼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지.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린 탓에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우진의 팔을 잡더니 철창 밖으로 끌어당겼다.
우진이 너무나 많은 궁금점을 꺼내 물어보려는 찰나, 그녀는 한 걸음 바싹 다가오더니 말했다.
“사용자명 KR8784638, 김우진. 나를 믿겠노라 맹세했지.”
“그… 그렇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아른거리자 겁에 질려 한 소리긴 했지만, 자신이 실제로 했던 말인 건 분명했다.
살려만 준다면 평생을 바쳐 믿겠다고.
“나의 이름을 그토록 간절히 부르며 기도한 이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목적은 모두 달랐지만 결국 모두 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도할 뿐이었는데, 그때 느낀 너의 진심은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당황한 우진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 상황에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앞에 다른 신들을 주르륵 나열한 부분이나 살려 달라고 구걸한 부분은 자세하게 듣지 못한 것인지, 온전히 자신을 향해 간절히 기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설마… 내용은 제대로 못 들은 건가?’
“벌써 시간이 다 되었구나. 먼저 깨어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신앙을 모두 사용해 그대에게 힘을 주었다. 교리를 행하고 빛의 신앙을 쌓아라. 그렇다면 나 역시 그대를 조금 더 도울 수 있겠지.”
“신앙이요? 힘이라니 그건 또 무슨……!”
털썩!
순간 동공이 풀린 여사제는 그대로 혼절해 뒤로 쓰러졌다.
바닥에 넘어진 그녀는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방금 여신이 한 말대로 빙의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나 풀려난 듯 보였다.
‘…일단 나가야겠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우진은 자세한 상황 파악을 뒤로 미루고, 먼저 지하 감옥의 출구로 향했다.
현신이 풀린 여사제가 일어나면 다시 자신을 화형시키려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대로 지하를 빠져나가 밖으로 나서자, 반가운 햇살이 그의 눈을 내리쬐었다.
여신이 따로 손을 써 둔 건지 지하 감옥의 입구임에도 불구하고 주위를 지키고 있는 이가 하나 없었다.
서둘러 주위를 벗어나 인적 없는 골목길에 들어서자, 우진의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번쩍 하고 생겨났다.
[캐릭터의 이름을 입력해 주십시오.]
[한 번 정한 닉네임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무슨 인제 와서……. 아니, 이 정도는 이제 이상한 것 같지도 않다.”
지금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해 본다면, 뒤늦게 창이 떠오른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지경이었다.
우진은 지체하지 않고 미리 생각해 두었던 캐릭터의 이름을 입력했다.
그러자 그동안 밀려 있던 수많은 상태창이 한 번에 떠올랐다.
띠링!
<유저 정보>
이름: 에일
칭호: 없음
세력: 빛의 교단
레벨: 1
직업: 이단심판관
주요 능력치
힘: 20 민첩: 20 체력: 20 마력: 20 신앙심: 0.1 광기: 0
신앙: 정의와 빛, 광기의 여신
신앙: 루의 입문 사제
여신의 총애: 50.00%
공헌도: 0 (누적0)
[캐릭터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당신은 빛의 길을 따르는 루의 신도가 되었습니다!]
[전용 직업 ‘이단심판관’으로 전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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