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선택받은 자 (2)
죽을 위기에 처했던 우진이 겨우 빠져나온 지 하루.
그는 당연하게도 본사에 전화해 어마어마한 욕과 고성을 퍼부어 가며 따졌고, 워로드 개발사에서는 사고 처리를 위해 부랴부랴 인력을 파견했다.
그들의 다음 행동은 우진이 미리 예측한 대로였다.
입에 발린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피해자의 입을 막을 보상금을 지불하며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해 오는 것.
우진은 그런 게임사의 태도가 괘씸하게만 느껴졌다.
‘지금 사람 목숨이 날아갈 뻔했는데 그깟 돈 몇 푼으로 입을 막으려 해? 안 받을 테니까 가지고 돌아가!’
…….
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
우진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검은색 서류 가방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1… 1억!’
휘둥그레진 두 눈.
열려 있는 가방 안에 지폐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건너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정장 차림의 미녀는 지금 우진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진이 벙한 채로 뭐라 말하지도 못하자, 워로드의 개발사에서 나온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금액이 지나치게 약소해 죄송합니다. 첫 접속 오류의 보상금으로는 약정상 저희가 챙겨 드릴 수 있는 한 최대한까지 보상해 드렸습니다.”
‘야… 약소?’
그녀의 말에 우진은 한 번 더 놀랐다.
그동안 가상현실 게임들은 위험성에 대해 미리 알리는 조항이 있었고,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고작 계정 값과 접속기 값을 환불 처리해 주는 게 전부였다.
물론 정말 사람이 죽거나 하면 문제는 달라지겠만, 워로드의 보상금은 그가 생각하고 있던 수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이번 경우에 대해 접속 기기의 문제는 확실히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사전 테스트로는 감지되지 않았던 신체 부적격자인 경우였습니다. 워낙에 가상현실 시스템에 맞지 않는 특이 체질이시라……. 그동안 전 세계 이용자 중에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개인 정밀 검사를 통해 발견된 문제점도 저희 측에서 해결을 마쳤으니, 다시 즐기시더라도 문제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듣던 우진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자… 잠깐만요. 아까 말하신 첫 보상금이라면… 두 번째 오류에서는 여기서 금액이 더 커진다는 말인가요?”
“그야 물론입니다. 저희 게임사의 이름을 걸고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려 한 부분인데, 거기서 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다면 저희는 더 이상 안정성을 입에 올릴 수 없을 테니까요. 공론화는 물론이고 최소 35억 원가량의 배상금까지 지불될 겁니다. 물론! 그럴 일은 결코 없으니 마음 편히 저희 게임을 즐겨 주셔도 좋습니다.”
여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면전에 1억 원을 뿌리고 나자, 이야기는 급속도로 마무리되었고 다시 우진의 집 안은 휑해졌다.
우진은 자신의 거실 바닥에 놓여 있는 1억 원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이런, 벌써 알바 나가야 할 시간이잖아.”
어제의 일도 그렇고, 정신없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어느새 현실에 찌들어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편의점 교대 근무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옷을 꾸역꾸역 챙겨 입던 우진은 방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접속 기기를 쳐다봤다.
“또 접속했다가 다신 못 빠져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문제가 없을 거래……. 목숨이 장난도 아니고 이걸 무서워서 어떻게 하냐.”
우진은 괜스레 짜증이 나 접속기를 발로 툭 쳤다.
방금 찾아왔던 여직원의 말로는 원한다면 즉시 환불도 해 준다고 했으니, 계정비와 접속기 가격은 모두 돌려받을 작정이었다.
우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밖으로 나섰다.
“이놈의 특이체질… 결국 남들 다 하는 게임은 이번에도 못 하는구나. 아니, 덕분에 1억은 벌었나.”
수중에 들어온 돈을 생각하니 왠지 감정이 누그러졌다.
당장 급한 생활비와 집세는 해결하고도 한참 남을 돈이라 그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하지만 출근을 앞둔 그에게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죽을 뻔했는데 덕분은 무슨! 젠장.”
* * *
“으으, 진상도 저런 개진상이 따로 없지.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저런 인간이 걸릴 건 뭐람.”
우진이 바닥에 어질러진 동전 주우며 중얼거렸다.
카운터를 보면서 주의해야 할 요주의 케이스 중 하나, 술에 쩔어 만취한 아저씨 하나가 나타나 난리를 벌여 놓고 갔다.
보자마자 반말, 쌍욕과 손가락질은 기본이요, 마지막 물건을 계산할 때 수중에 있는 모든 동전을 던져 흩뿌리고 가는 건 화룡점점이었다.
벌써 2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굴욕을 참아 가면서 몇 년 동안 일해 봤자 1억도 안 되잖아?’
물론 남들이 보기엔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1억 원을 받고 나니 당사자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업무를 정리하고 이십여 분을 기다리자, 다음 근무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 오빠 죄송해요. 오늘 좀 늦었죠?”
“됐어. 시재는 다 맞고 전달 사항도 적어 놨으니까, 나 먼저 들어간다.”
사과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우진은 터덜터덜 짐을 챙기고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라도 한마디 했겠지만, 지금은 굳이 남에게 뭔가를 따질 기분도 아니었다.
‘35억… 이거 한 방이면 진짜 인생 역전인데…….’
* * *
“후우, 떨린다.”
우진이 접속기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결국 어마어마한 보상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워로드에 접속하려는 그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1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신고가 되도록 핸드폰 설정을 맞춰 놓기까지 했다.
만약 이번에도 작동이 실패해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경우 보상금을 최소 35억 원이나 받게 되는 것이었고, 좁아터진 집과 알바를 전전하는 생활은 영원히 바이바이였다.
물론 게임이 정상적으로 접속된다는 결과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으로 희망을 주었던 워로드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했던 터라, 그쪽 방향으로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부작용 없이 무사히 기기에서 빠져나와 35억 원을 챙길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기기 안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고,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파앗!
게임으로 접속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짝 긴장한 그는 조심스럽게 앞을 바라보았다.
“여… 여기는……?”
우진이 중얼거렸다.
분명 가상현실 안이라는 건 확실했지만, 첫 접속 시에 나타나는 대기실도, 그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검은 공간도 아니었다.
하얀색 불빛을 띠고 있는 촛불들과 고풍스러운 색감의 장의자, 화려한 벽화까지.
흡사 화려한 유럽 성당의 내부처럼 보이는 방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은 어느새 게임 속 기본 의상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우진의 시선은 무엇보다 맨 앞에 위치한 여신상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여신이면서 나풀거리는 의복이 아닌 늠름한 갑옷을 입은 채 허리춤엔 기다란 검을 차고 있는 모습.
쉽게 볼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분명… 낯이 익는데.”
현실에 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맞아! 그때 나타났던……!”
우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시스템 오류로 검은 공간 속에 갇혔을 때 나타났던 여신이었다.
‘헛것을 본 줄만 알았는데…….’
접속기 안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만 해도, 우진은 겁에 질려 자신이 이상한 환영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신상을 계속 바라보자,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여자가 이 여신상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동시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워로드의 세계엔 일곱의 신과 그에 따른 7개의 신앙이 있었으니, 그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빛의 신 ‘루’가 바로 눈앞에 선 여신상의 정체였다.
‘내가 왜 진작 못 알아봤지……?’
우진이 비록 자신의 체질 탓에 직접 플레이는 하지 못했더라도, 가상현실 게임에 가지고 있는 관심만큼은 전문가나 다름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워로드 세계에 대한 지식 역시 넘쳐났다.
지리와 역사, 길드 간의 세력 다툼, 시시콜콜한 사건들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는 당연히 워로드의 일곱 신, 루의 외견 정도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여신을 직접 본 순간에는 그녀가 빛의 신인 루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그림이나 석상하고는 완전히 달랐어…….’
인터넷 자료로 보았을 때는 단순히 예쁘다, 멋있게 생겼다, 가 끝이었지만 실제로 앞에 두고 본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찬란한 빛을 띠고 있는, 그야말로 정의로운 여신의 자태.
‘그렇다면 이곳은 역시 루의 신전 내부인가…….’
끼익!
그때 우진의 뒤편에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얀 법복을 입은 정갈한 차림의 여자, 아무래도 신전을 관리하는 루의 여사제로 보였다.
그녀는 우진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누… 누구시죠?”
“아, 그게…….”
우진은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상황을 밝히기는커녕 아직 캐릭터 이름도 안 지었는데 자신을 딱히 소개할 방법이 없었다.
“여기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 처음부터……!”
“기사단! 침입자입니다!”
여사제가 소리치자 문밖에서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검과 방패를 뽑아 든 루의 성기사들은 위협적으로 우진에게 다가섰다.
“자… 잠깐 말 좀……!”
퍼억!
변명할 새도 없이 복부를 얻어맞은 우진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 * *
축축한 공기와 숨이 턱 막히는 어두운 공간.
기사들에게 붙잡힌 우진은 신전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옆에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해골을 제외하면 그 혼자 독방을 쓰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죠?”
“그렇게 연기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고 왔을 리가 없잖습니까?”
우진의 질문에도 여사제는 단호했다.
그러자 우진은 속이 답답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꾹꾹 참으며 물었다.
“아니, 연기든 아니든 위치만 말해 달라니까요?! 진짜 여기 어디예요? 그것만 좀 말해 주세요.”
“…‘듀벨’에 위치한 루의 신전입니다.”
‘후… 그런가.’
겨우 여사제의 대답을 들은 우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꼼짝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머리를 굴려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이곳은 워로드의 스타팅 지점 중 유일하게 루의 신전이 있는 대도시, 듀벨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초보자의 광장이 아닌 루의 신전에서 게임이 시작된 건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원래대로라면 처음 캐릭터를 만든 유저는 어느 도시에서 시작할 건지부터 선택해야 했다.
반면에 우진은 그런 창은커녕 캐릭터 이름을 짓는 기본적인 과정조차 생략해 버린 터라, 자신의 체질 탓에 색다른 오류라도 발생한 건지, 혹시 보상금은 받을 수 있는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만 성미가 급한 여사제는 우진에게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신전에 침입한 죄에 대해선 저희 측에서 방금 선고가 끝났습니다.”
“네? 아직 재판도 없었잖아요?”
“이번 경우는 굳이 재판이 필요할 정도의 사항이 아니라고 결정이 났습니다.”
그녀의 말에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무리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도, 길을 잘못 든 것만으로 큰 벌을 받게 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진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럼 빨리 이 문 좀…….”
“당신은 화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예?!”
[당신에게 화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비로운 여신의 은총으로 마지막 말을 남길 양피지와 깃펜이 지급됩니다.]
[집행까지 남은 시간 ‘00:5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