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고민할 게 뭐 있습니까? 회장님이 커피를 남기면 이석근 팀장에게 이야기해주기로 했다면서요? 지금 문자를 보내서···. 아차! 오늘은 이미 퇴근시간을 끝났군요. 우리 내일 한 번 연락해볼까요? 과연 고평호 상무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네?”
“왜요? 자신 없습니까? 절대 그럴 리 없다면서요? 그렇게 믿는 남자의 본심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요?”
유진서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쉽게 떡밥을 물어주길 기대했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싫어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제 말이 사실이라면 고평호 상무님은 큰 기대를 안고 회장님을 뵈러 갔다가 헛걸음만 하는 셈이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석근 팀장님만 곤란해지는 데 그런 위험을 부담할 이유가 없어요.”
“정말 그런 마음입니까?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요? 설마 이런 의심을 저 혼자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랬으면 이도우 실장님이 제게 이렇게 협조를 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유진서씨를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설마 실장님도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죠. 우리 중 누구도 유진서씨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성실히 회사를 위해 근무했고 비서로서 회장님에 대한 충성심도 투철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회장님에 대한 불순한 계획에 가담할 이유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석근 팀장은 다릅니다. 그 사람은 회장님이 아니라 고평호 상무에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그냥 충성하는 부하 직원이 아니라 고평호 상무의 왼팔이라고 불릴 만큼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고평호 상무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불순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아니에요.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라고요. 시를 좋아하고 재즈를 사랑하는···.”
분명히 멀쩡했을 여잔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었을까? 이석근 팀장과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은 없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 당신을 버리고 부잣집 딸과 결혼했습니까? 이석근 팀장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로맨틱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죠.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 언제든지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회장님에 대해서도 언제든 불순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겠죠. 유진서씨는 믿고 싶겠죠.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그 남자의 마음을 실험해보자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지금 유진서씨가 처한 상황은 굉장히 안 좋습니다. 이도우 실장님뿐만 아니라 고진성 부회장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 중에 가장 확신을 하고 있는 사람이 고진성 부회장님이다. 당장 잡아서 족친다는 걸 겨우 말려서 진정시켜야 할 만큼 분노가 대단했다.
“부회장님도요?”
“그럼요. 혹시 여기로 들어오면서 이상하다는 생각 못 했습니까? 평소보다 사람이 부족하다든지 심하게 조용하다든지 뭐 그런 거요.”
“느꼈어요. 야근하는 임원들 챙기느라 원래 이 시간이 제일 분주한데 오늘따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 바로 그겁니다. 부회장님이 당신을 위해 여길 전부 비우셨거든요.”
“네? 저··· 정말인가요?”
“네. 정말입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저는 일개 팀장일 뿐입니다. 그런 제가 임원들도 이용하는 이곳을 폐쇄할 수 있겠습니까? 회장님 비서로 일하시는 유진서씨도 그런 사실은 잘 알 텐데요?”
사실 하루 정도 폐쇄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전기나 수도에 문제가 생겨 하루 정도 공사가 필요하다고 공지를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벌써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분은 유진서씨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하시지만 전 다르거든요. 제가 이렇게 생긴 게 좀 우락부락해도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건 아시죠?”
“네. 윤시연 작가. 약혼녀가 워낙 유명한 분이잖아요.”
“솔직히 제겐 과분한 사람이죠. 전 사람 덕분에 사랑을 믿습니다. 남들이 볼 땐 불륜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유진서씨의 이석근 팀장에 대한 사랑도 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당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이석근 팀장에 대한 고진성 부회장님과 이도우 실장님의 의심도 해소할 기회를요.”
“결백의 증명이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유진서씨 상황이 그리 좋은 게 아니라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경찰은 갑자기 왜요?”
지금까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가 ‘경찰’이라는 말에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유진서를 조사하다가 재미난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바로 현직 경위로, 곧 퇴직을 앞두고 있는 경찰이었다. 성격도 굉장히 고지식해, 만약 자신의 딸이 불륜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사실을 안다면 절대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치사하지만 그래서 일부러 경찰 이야기를 꺼냈다.
“의심은 가는데 밝힐 수 없다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상이 회장님입니다. 그룹 차원에서도 절대 가만있을 수 없죠. 경찰의 힘을 빌어서라도 의구심은 깨끗하게 해결해두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경찰에 의룋면, 그룹에 안 좋은 소문이 날 수도 있어요.”
“그럴 수야 있겠지만 찝찝하게 지낼 순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유진서씨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 아닙니까? 수사가 시작되면 이석근 팀장과 유진서씨 사이의 관계도 밝혀질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회사 내에서도 소문이 날 테지요.”
“안 돼요!”
놀란 듯 정색하는 모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겉으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원래 물고기를 잡을 때도 마지막에 끌어올리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듯 말이다.
“그렇게 되면 두 분 다 회사를 그만두셔야 할 겁니다. 동지그룹은 불륜을 저지르는 직원을 비서로 둘만큼 너그러운 곳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집안에 소문이 날 수도 있겠군요.”
“그만하세요. 알았으니까 그만하시라고요. 말씀해보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어떻게 하면 저와 이석근 팀장님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런 어렵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일 이석근 팀장에게 회장님이 커피를 남기셨다고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걸로 유진서씨의 결백은 증명되는 겁니다.”
“저는 그렇다고 치고 이석근 팀장님은요?”
“만약 고평호 상무가 조용히 회장님을 만나러 온다면 모든 건 없었다는 듯 조용히 넘어가겠죠.”
“그걸로 끝인가요? 우리 두 사람의 결백은 증명된다고 해서 의심받은 결과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답답할 만큼 바보 같은 사랑에 빠져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든 아니든 동지그룹에서 그녀의 경력은 이걸로 끝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유야 어쨌든 회장 비서가 회장의 개인 일정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로 했으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넘어가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나야 당사자가 아니니 상관없다고 해도 고진성 부회장님과 이도우 실장 입장에서는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녀도 이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조용히 사표를 쓸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전부입니까?”
“네. 저도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 알아요. 회장님의 비서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거잖아요. 물론 그런 행동이 회장님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특히 실장님에게 누가 된 것 같아 정말 죄송해요. 원래라면 죄를 달게 받아야 하겠죠. 그렇지만 이번 일로 징계를 받고 어쩌고 하다 보면 소문이 날 수도 있잖아요. 그 일만은 막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주제를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으면 박살을 내버리려고 했는데, 요구가 소박하다.
“어렵지 않은 요청이군요.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만약 우리 예상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유진서씨는 이번 일에 대해 절대 함구해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사실로 드러난다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약 사실로 드러난다면···”
유진서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쉰 후 말을 계속했다.
“사실로 드러난다면 조용히 넘어가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죠.”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기에 서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뭔데요?”
“일종의 비밀유지 각서입니다. 자칫 언론에 알려지면 현대판 왕의 난이라며 엄청난 입방아에 오르내릴 겁니다. 사실은 밑에 있는 현상태 이사가 꾸민 일이지만 대중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하겠죠. 아들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렸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날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났으니 호사가들은 신이 나서 떠들겠죠. 그러면 그럴수록 동지그룹은 패륜 기업으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유진서씨도 낙인 효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잘 알고 있겠죠? 그리고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는지도 잘 알 겁니다. 저는 그런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습니다.”
“휴우···. 마 팀장님은 소문이 사실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네. 사실일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으니까요. 솔직히 상황들이 전부 너무나도 절묘합니다. 고현호 상무님이 최근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고, 때마침 고평호 상무님이 이사회에서 회장님에게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때 즈음해서 이석근 팀장이 유진서씨에게 다시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그게 바로 회장님의 일정입니다. 그게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제가 생각할 땐 유진서씨도 이젠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을 것 같은데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어느 정도 눈치를 챘다니요?”
“예전의 이석근 팀장과 달라진 모습을 못 느꼈단 말입니까? 많이 변했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바뀐 건 맞아요. 그렇지만 유부남이니까, 세월이 지났으니까, 내게 미안하니까 더 다정하게 변한 거죠.”
“알겠습니다. 유진서씨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제가 방금 드린 계약서 한번 잘 읽어보시고 서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 작품 후기 ============================
중간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러면 또 질질 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걱정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막판이니 눈치 안보고 쓰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