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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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고대성’ 세 글자로 나를 위축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 순진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서 더 이죽거렸다.
“그렇죠? 유진서씨는 우리 동지그룹의 주인이신 고.대.성. 회장의 비서님 되시죠?”
“그래요. 혹시 모르셨던 건 아니죠?”
“설마요. 제가 유진서씨를 뵙자고 한 것도 고.대.성. 회장님과 관련된 일 때문인 걸요.”
아무래도 체질인가 보다. 겁을 먹고 점점 더 움츠러드는 유진서를 보자 더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내 안에 악당과 비슷한 기질이 숨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사실을 직접 하는 건 좀 씁쓸하다.
“혹시 회장님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은 거라면 포기하세요. 저는 마동수 팀장님에게 회장님과 관련해서 어떤 것도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그런 게 궁금했으면 이도우 실장님에게 직접 물어봤지, 유진서씨를 불러냈겠어요? 그래도 유진서씨의 투철한 직업의식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일로 이러시는 건데요?”
“여긴 복도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죠. 윤권아.”
“네. 팀장님. 유진서씨 잠깐 이리로 들어가시죠.”
이름을 부르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권이가 유진서 왼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곳엔 한 개의 탁자와 세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넓은 공간에 그렇게 네 개의 물건만 놓여 있으니 굉장히 휑한 느낌을 줬다.
“제가 왜 그곳에 들어가야 하죠?”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둘과 저런 곳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솔직히 마동수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점점 더 불쾌해지려는 감정을 참았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고대성 회장 비서로 근무한다는 게 의떤 의미인지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들어가기 싫으십니까?”
“네. 당연히 싫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냥 가세요.”
“네?”
“그냥 가시라고요. 싫다는데 억지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대체 왜···?”
“대체 왜 이랬었냐고요? 됐습니다. 모르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오늘 이도우 실장님과의 면담은 없으니 그냥 퇴근하시면 됩니다. 저녁 맛있게 드십시오.”
“진짜 그냥 가면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설마 제가 강제로 끌고 갈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제가 총을 맞지 않은 이상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회장님 비서를요. 저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막돼먹은 인간은 아닙니다. 혹시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생긴 게 좀 거친 편이라 그런 오해 많이 받습니다.”
미안하다면서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닌 이 남자. 그의 능글거리는 모습에 유진서는 이상하게 약이 올랐다. 하지만 능글거린다고 시비를 걸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최대한 당당한 걸음으로 두 남자 사이를 지나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출입문으로 향했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서 이석근 팀장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늘 만남은 취소했지만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면 혹시나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윤권아. 유진서씨가 할 말이 없다고 하니 이석근 팀장에게 직접 물어보자.”
“네. 팀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네?”
“이석근 팀장은 왜요?”
“아. 들으셨구나. 들을 말이 있어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유진서씨가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석근 팀장을 만나야죠.”
그의 말에 유진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놀란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저랑 그분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왜 없습니까? 절친한 사이인 거 이미 알고 있는데.”
“네?”
예상 밖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새 된 비명을 지르듯 유진서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설마 제가 그거도 모르고 유진서씨를 찾아온 것 같습니까? 두 분 절친한 사이인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모른 척해도 소용없습니다.”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를 떼시려고요?”
“마 팀장님. 지금 이게 뭐하자는 짓이죠? 자꾸 이러시면 성추행이 될 수 있습니다.”
“네? 성추행이요? 두 분이 절친한 사이라는 게 성추행이 된단 말씀입니까? 대체 그 말의 어느 부분에 성적 수치심을 느끼신 건가요?”
그녀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절친한 사이라고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신이 지레짐작하고 오버를 한 것이다.
“그··· 그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저를 불러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부터가 추행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한 거였어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요? 이석근 팀장을 모르신단 말씀입니까?”
“아니요. 알죠. 팀은 달라도 같은 비서니까요. 하지만 마 팀장님의 표현처럼 절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절친한 사이가 아니다? 확실합니까?”
“네.”
지금까지 이석근 팀장과의 사이가 들통 나지 않기 위해 정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니 이렇게 금방 들킬 리 없다는 생각에 배짱을 부렸다.
“아하. 유부남과 미혼 여성이 단둘이 호텔에서 머문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절친한 사이가 아니다?”
“네? 지··· 지금 그게···?”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제가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두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같이 호텔에서 시간은 보내지만 절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럼 그런 사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연인? 아니지. 남자가 유부남인데 연인이라고 하면 어폐가 있겠군요. 불륜? 윤권아. 두 사람은 불륜 사이가 맞지?”
“네. 팀장님.”
사람을 놀리듯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남자의 모습에 유진서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동수 팀장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자 완전히 벌거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대···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거죠?”
“저랑 이야기할 생각이 드셨습니까?”
“네. 네. 할게요. 그러니까 뭘 원하시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그럼 저 방으로 들어가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마동수 팀장은 웃음 띤 얼굴로 조금 전 열어뒀던 문을 향해 손짓했다. 취조실처럼 생긴 방.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던 방이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
유진서는 죄인처럼 잔뜩 주눅이 든 모습으로 의자의 1/3부분만 엉덩이를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참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녀의 표정은 놀람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요. 그 남자가 그럴 리가 없어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럼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당신을 버린 남자가 왜 돌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절 사랑해서죠. 절 사랑해서, 제가 보고 싶으니까 돌아온 거죠.”
“그 말을 이석근 팀장이 직접 했습니까? 유진서씨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분명 미안하다고는 했어요. 저를 보고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고요. 그렇게 절 버려서 미안하다는 말이잖아요.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전 그 말로도 충분해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이 여자는 이미 맹목에 가깝게 변하고 있었다. 솔직히 세상에서 제일 설득하기 어려운 부류가 바로 이런 부류다.
“미안하다는 말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사과라면요?”
“네?”
“당신을 이용해서 미안하다. 당신을 속여서 미안하다. 제가 볼 땐 그런 의미의 사과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유진서씨.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이석근 팀장이 유진서씨에게 회장님의 일정을 알려달라고 한 건 사실이죠.”
“네. 맞아요. 하지만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설명했잖아요. 회장님과 고평호 상무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랬다고요.”
“네. 그 이유 잘 들었죠. 그런데 정말 화해를 하고 싶었다면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드는 건 굉장히 쉽습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가족 아닙니까? 그렇게 번거롭게 경호원까지 버려두고 혼자서 사모님의 산소에 찾아가는 날을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대체 그날이 언제인지 알고요? 제가 이도우 실장님에게 확인해보니 길게는 3개월 이상 산소를 찾아가지 않은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냥 무작정 3개월을 기다린답니까? 아버지와 화해하는 게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요.”
“회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니까 그렇죠. 그런 식으로라도 방법을 찾지 않으면 화해하기 힘든 성격이시니까요.”
“그래요? 그런데 그것참 이상합니다. 제겐 유진서씨의 말이, 단둘이 대화도 해보지 않고 제풀에 화해를 포기했단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만큼 회장님이 어려운 분이잖아요. 이미 공개석상에서 크게 망신당한 일도 있고. 그러니 한 번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시간을 나누고 싶었던 거예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쉽지 않은 강적이었다. 내 설득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합리화해서 자기식으로 받아들일 모습이었다.
굳건한 표정에서 광신도가 연성 됐다. 이대로 가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더는 설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군요. 유진서씨 말대로라면 이석근 팀장은 그저 고평호 상무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할 뿐이겠군요.”
“그럼요.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어요. 마 팀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음모를 꾸밀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유진서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도 그 생각을 바꾸고 싶진 않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각자 다르니까요. 그런데 유진서씨.”
“네.”
“그럼 우리 재미있는 실험을 한 번 해볼까요?”
“재미있는 실험이요?”
“네. 이석근 팀장의 마음이 어떤지 한 번 알아보는 겁니다. 당신 말이 맞는지, 제 말이 맞는지. 어떻습니까?”
“어떻게요?”
결국은 유진서씨가 여자임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자. 특히 사랑에 빠진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려고 한다.
‘오빠 날 사랑해?’
‘날 얼마나 사랑해?’
‘날 위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친구 남자 친구는 해줬다는데?’
이런 식으로 반복 질문을 해서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게 여자다.
그리고 유진서 또한 예상한 것과 비슷한 호기심을 보였다. 이렇게 떡밥을 던졌으니 이제 낚기만 하면 된다.
============================ 작품 후기 ============================
이 부분이 조금 길어졌네요.
다음 회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완결을 위한 마지막 에피소드만 남을 것 같습니다. ㅠㅜㅠ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