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참. 그리고 말이야. 요즘 혹시 작은 형 소식 들은 거 없어?”
“작은 형이면 고평호 상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략적인 보고를 끝내고 이제 좀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고평호 상무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 고평호 상무. 혹시 마 팀장은 들은 이야기 없어?”
“음. 정확하게 뭘 물어보시는 모르겠습니다. 고평호 상무 소식이야 상무님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휴···. 아니야. 그냥 노파심에서 물어봤어.”
“왜요?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단 말씀은 해보시죠.”
“작은 형보다는 작은 형과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신경 쓰여서 그래.”
잠시 망설이던 고현호 상무는,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갑자기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한 명이 신경 쓰인다니? 그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신경 쓰인다는 말씀이세요? 혹시 경계를 해야할 만큼 능력이 굉장히 뛰어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솔직히 능력이 뛰어난 인재는 작은 형보다 내가 많지. 특히 김 부장이나 마 팀장처럼 반짝반짝 창의성이 빛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찾기 어렵다고.”
“허 참. 웬일로 꼼수나 잔머리라고 안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창의성이라고 표현하십니까?”
“사실은 사실이잖아. 원래 잔머리가 좋아야 창의성도 좋다고.”
“하지만 창의성이 좋다고 잔머리가 좋은 건 아닙니다.”
“하하하. 그렇지 충분조건이긴 하지만 필요조건은 아니지. 그래서 마 팀장 같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거야. 그냥 잔머리가 아니라 창의력 넘치는 잔머리거든. 그러니까 작은 형에게 어떤 유형의 인재가 있는지 몰라도 난 그 사람이 전혀 탐이 나지 않아.”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하지만 일단 감사히 듣겠습니다. 그런데··· 그럼 아까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혹시 현상태 이사 알아? 유명한 사람이니까 한 번쯤은 들어봤겠지?”
당연히 안다. 동지그룹 최고의 브레인 중 한 명. 고평호 상무의 같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인 초엘리트. 집안마저 좋아서 결혼 전에는 동지그룹 최고의 신랑감으로 불렸던 남자. 다소 냉정하고 계산적이라는 말도 듣고 있지만, 그보다는 일 처리가 깔끔하고 합리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한 마디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완전 엘리트라면서요. 성격이 차갑지만 일 처리 하나만큼은 끝내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지 중공업이 동종업계에서 1위에 오르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 소문으로만 보면 차가운 성격만 단점이지 나머진 전부 완벽해.”
“에이. 직장생활에서 성격이 차가운 건 단점이 아니죠. 솔직히 일할 땐, 착한데 무능력한 사람이 제일 골치 아파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차갑더라도 일 처리 깔끔한 사람이 훨씬 좋죠.”
직장동료는 친구가 아니다. 물론 직장인 사이에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직장동료는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에게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이고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함께하는 동료가 무능하다면, 그만큼 내가 고달파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무능한 동료가 성격이 더러우면 냉정하게 내칠 수라도 있지, 착한 사람은 괜히 양심에 찔려 그러지도 못한다. 결국, 나 자신만 죽어나는 거다.
“그래도 사람 좋고 일 잘하면 금상첨화잖아.”
“저처럼요?”
“그렇지. 그런데 대신 넌 싸가지가 없잖아.”
“헐.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저처럼 예의 바른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됐다. 너랑 그런 문제로 싸워서 뭐하겠어. 어차피 싸가지 없는 녀석이니 내 입만 아프지. 어쨌거나 그 현상태 이사 말이야. 예전부터 좀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
“이상한 소문이요? 어떤···?”
“나도 소문만 들어서 말로 옮기기 좀 그런데. 그래도 내용이 워낙 찜찜해서 말이야.”
“말씀해보세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렇지? 음. 확실한 건 아닌데, 지금껏 작은 형이 사업하면서 가장 골치 아팠던 사람이 세 명 있었나 봐.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세 사람이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거야.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현호 상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소름이 등줄기를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과거 고정호 전무에게 납치당할 뻔했던 이력이 나로서는 절대 유쾌할 수 없는 소문이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처럼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아직 그때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극복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신빙성이 있는 소문입니까?”
“확인된 사살이 아니니까 소문이겠지. 이봐. 마 팀장. 그렇게 굳은 표정 할 것 없어. 설사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마 팀장을 건드릴 수는 없을 테니까.”
“사람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현상태 이사가 정말 미친놈이라도 그런 짓까진 못하지. 마 팀장이 회장님께서 특별히 경호에 신경 쓰라고 지시해서, 거의 우리랑 동급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회장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짓을 꾸민다? 그건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러니 안심해.”
“휴···. 죄송합니다. 지난번 일이 아직 제 이미지에 남아있었나 봅니다. 갑자기 신경이 날카로워지네요.”
“마 팀장이 왜 미안해. 정말 미안한 건 나지. 결국은 나 때문에, 우리 가족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 그 일은 평생 마 팀장에게 미안할 거야. 그리고 내가 회장직을 포기하면 포기했지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나도록 할 테니까 마음 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상무님. 갑자기 현상태 이사는 왜 생각나신 겁니까?”
“글쎄 내가 왜 그랬을까? 너무 조용해서 좀 불안한 건가? 솔직히 좀 그렇잖아. 우린 지금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작은 형 쪽은 너무 조용해. 절대 이대로 있을 사람들이 아니거든. 이대로 가면 분명 계속 우리만 유리해지잖아. 상식적으로 저쪽에서 뭔가 대책이 나와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아무런 소식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뭔가 계속 찝찝해.”
고현호 상무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긴 하다. 솔직히 구멍가게 사장 자리라면 ‘그래 그건 그냥 너 먹어라.’라며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지그룹은 그런 작은 가게가 아니라 시가총액이 조 단위를 훌쩍 넘는 대한민국 재계서열 5위의 초대형 대기업이다. 그냥 선심 쓰듯 줄 수 있는 규모가 절대 아니다.
그러니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그것 또한 그들의 전략일지 모르지만 뭔가 대책이 필요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길 들어보니 뭔가 찝찝하긴 합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저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조기훈 차장이 그쪽으론 굉장한 소식통이고, 또 경찰 쪽에도 친구가 있으니 문제가 있으면 뭔가 나와도 나오겠죠.”
***
3/4분기 결산 동지그룹 이사회.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의 협업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 차이나 월드 베리어스 클럽은 앞으로 시안점을 제외하고 앞으로 5개 이상의 지점을 더 설립할 예정입니다. 그중에는 이번처럼 아웃렛 스토어를 접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판매 방식을 선보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D&Y 피트니스 클럽은 그들의 방식에 상관없이 모든 지점에서 계속 협업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중국 진출이 마무리되면 화교가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로 영역을 확장함과 동시에 미국에서 아시아인이 많은 지역, 예를 들면 로스앤젤레스같은 도시에 D&Y 피트니스 클럽이 진출하기로 월드 베리어스 클럽과 약속했습니다.”
수많은 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현호 이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동안의 업무경과 대한 보고를 마쳤다. 그가 이뤄낸 성과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못마땅한 듯 인상을 굳힌 이사들도 상당했다.
“보고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현호 상무님.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군요.”
고평호 상무 측의 박지숙 이사였다.
“어떤 점이 궁금하시죠?”
“D&Y 피트니스 클럽 해외진출 프로젝트가 어째 좀 반쪽짜리로 운영되는 느낌이 듭니다.”
“박 이사님은 어떤 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신 겁니까?”
“중국,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시아인이 많은 미국 도시. 타깃층이 전부 동양인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편협하게 운영하면 D&Y 피트니스 클럽의 세계화 정책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박 이사님은 처음부터 백인이나 흑인을 대상으로 했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래야 진정한 세계화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됐어. 그만. 이 봐. 박 이사.”
“네··· 네. 회장님.”
어떻게 보면 억지에 가까웠다. 그러나 박지숙 이사는 어떻게든 고현호 상무가 이뤄낸 성과를 깎아내려야 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여온 목소리에 그녀의 노력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났다. 보통은 회의에 참석해 묵묵히 경청만 하던 고대성 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박 이사라면 어떻게 했을 건데?”
“네···?”
“박 이사라면 눈앞에 쉬운 방법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방법으로 돌아갈 거냐고? 성공의 확신도 없으면서.”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회장님.”
“요즘 들어 그룹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있는 걸 느껴. 나는 개인적으로 그 모습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서로 경쟁하는 거 좋아.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경쟁도 마다치 않는다. 내가 항상 지향했던 바야. 그런데 왜 경쟁을 하지 않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회··· 회장님.”
노기가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위는 이미 차갑게 식었고, 특히 고대성 회장에게 힐난의 대상이 된 고지숙 이사의 안색은 하얀색 밀가루라도 덮어쓴 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쯧쯧. 그래. 박 이사가 무슨 잘못이겠어. 거기 고평호 상무.”
“네. 회장님.”
“요즘 네가 하는 일이 뭐지?”
“언제 어디서든 그룹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화살이 갑자기 박지숙 이사에서 고평호 상무에게로 돌려졌다. 평소 냉정하기로 소문난 고평호 상무도 쉽게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런 흔해 빠진 소리 말고. 동지 중공업을 1위로 만든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그 이후에 네가 보여준 게 없어. 그 결과만 믿고 너무 현실에 안주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네가 그렇게 안주하는 사이에 고현호 상무는 꼴찌였던 동지마트를 재계 2위의 대형 할인 마트로 만들었어. 게다가 DJ 마트 또한 엄청난 히트를 치고 있지. 내가 생각할 땐 그 두 가지만 해도 2위였던 동지 중공업을 1위로 만든 네 업적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 그런데 고현호 상무는 어떻게 했지? 너처럼 제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 그 성과가 골든타운과 D&Y 피트니스 클럽의 해외 진출이야. 그걸 보고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죄송합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안일했나 봅니다.”
“그래 아주 많이 안일했어. 그래서 내가 고평호 상무에게 실망이 좀 커. 이대로라면 굳이 후계자리를 놓고 싸울 필요가 있을까 싶어. 넌 어떻게 생각해?”
아무도 예상 못 한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 작품 후기 ============================
울고 싶은 사람에게 뺨 때린 격.
무슨 말인지 아시는 독자님들도 계시겠죠. ㅎㅎ
이미 다들 눈치챘을 수도 있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시는 길에 선추코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