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71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평소 상수 형님에게 말씀 많이 들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뵙게 되네요. 천성기라고 합니다.”
윤권이가 전화한 지 두 시간도 안 돼 평범하게 생긴 남자와 귀엽게 생긴 여자가 사무시릉
“안녕하세요. 마동수입니다. 상수가 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갑자기 걱정이 되는군요.”
“무서운 형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네? 내가 무서워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솔직히 전 상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 될 겁니다. 어디 가서 맨날 두들겨 맞고만 다녔는데요, 뭘. 하하하.”
일반인과 격투기를 배운 운동선수는 시작부터 게임이 안 된다. 내가 학생 때 밤새워 공부한 것 이상으로 동생은 피땀 흘려가며 밤새워 운동을 했다. 시작부터가 다른데 싸움이 될 리가 없다.
상수와 나는 연년생이다. 어릴 때는 정말 많이 싸웠다. 남달리 발육이 좋았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갑자기 키가 큰 동생에 비해 덩치가 압도적이었다. 덕분에 싸움에서는 늘 이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날로 우락부락해지는 동생의 몸을 보면 싸우고 싶은 생각은 안드로메다만큼 멀리 날아가 버린다.
“그냥 기세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차갑게 한번 쏘아보면 저절로 움츠러든다고. 상수 형님이 대학생 때 같은 체급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그런 기분을 팀장님에게 느꼈다면서, 저희에게 항상 기세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같이 살 땐 빨래 안 한다고 맨날 구박만 하던 녀석이 움츠러들긴···. 어릴 때 제게 많이 혼나서 트라우마 비슷한 게 생겼나 봅니다. 갑자기 동생에게 미안해지네요. 하하하.”
“그건 아닐 걸요. 오래는 아니지만, 저도 팀장님과 같이 생활하면서 상수 형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팀장님이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있으면 꼭 발가벗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헛소리라고 치부하려는데 옆에 있던 윤권이까지 나서서 한 손 거들었다.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무슨 무협 소설도 아니고 기세로 사람을 기죽이다니···.
“뭐라고? 웃기시네.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주폭 삼인방에게 두들겨 맞을 일도 없었고, 그놈들이 원한을 가지고 날 납치할 일도 없었겠지.”
“아닌데. 진짜 있습니다.”
“됐고. 천성기씨라고 하셨나요? 제 동생이 한 헛소리는 잊어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에 들어가죠.”
“그전에 팀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상수 형님 후배인데, 어떻게 하늘 같은 선배님의 형에게 존대를 듣겠습니까. 그냥 ‘성기야’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풉···. 아···. 이런 죄송해요. 그··· 그냥 이름이 좀···”
이름이 웃겼는지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서라씨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이런 일 자주 있어서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름 외우기 편하다고 좋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름을 기억해주면 유리한 직종이라 의외로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팀장님. 말씀 꼭 편하게 해주십시오. 막 대하셔도 됩니다. 그래야 저도 편합니다.”
“막대할 순 없지만 편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할게. 그런데 옆에 계신 분도 소개해줘야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웬만하면 말을 잘 안 놓게 되었지만, 동생 후배에다가 윤권이 친구라는데 말을 높이기도 좀 애매했다.
“아! 여기는 여순희씨입니다. 저랑 같이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는 동업자입니다.”
“안녕하세요. 여순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윤권이에게 대충 들으셨겠지만, 이번 일은 남자보다 여자분 역할이 중요합니다. 아무래도 대상이 여자고, 할인 마트나 아웃렛 매장도 일종의 쇼핑공간이니 성기보다는 여순희씨가 더 적격이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성기는 좀 못 미덥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요?”
연인인 성기를 못 미덥다고 말했는데도 순희씨의 표정은 담담했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까 윤권이에게 두 분 이야기 들었습니다. 연인 사이시라고요.”
“네. 성기씨는 제가 많이 사랑하는 남자입니다.”
“성기가 경찰을 그만두게 된 이유가 순희씨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팀장님! 그건···.”
일부러 조금 과한 말을 던졌다. 그 말에 성기가 발끈하며 나서려고 했으나 순희씨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저 때문 맞습니다. 회식이 있었는데 과장님이 술에 취해 저를 더듬으셨거든요. 저도 그땐 순경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냥 불쾌함과 창피함, 모멸감이 들었지만 참고 있었어요. 그런데 성기씨가 나서서 제게 도움을 줬어요. 혹시 그게 문제가 되나요?”
“네. 문제가 됩니다.”
“그럼 팀장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에게 성추행을 당해도 참고 보고만 계실 건가요?”
“아닙니다. 당연히 반 죽여놓죠. 그걸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훗날 보복을 당하긴 했어도 시연이에게 성희롱을 하던 주폭 삼인방을 감방에 처넣은 게 바로 나다.
“그런데 왜 성기씨는 문제가 된다고 하시는 건가요?”
“일이니까요. 회식이 있던 날 두 분은 연인이 아니었죠?”
“네.”
“그런데도 성기는 의협심을 발휘해 순희씨를 도와줬습니다. 그의 정의감 높이 삽니다. 하지만 업무가 되면 문제가 됩니다. 이번 일을 하다 보면 박연하 전무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많이 지켜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서라씨가 1차적으로 조사를 했는데, 서류를 집어 던지거나 폭언을 하는 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직원들을 인간 이하로 대접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성기는 그런 모습을 모른척하고 제가 주는 업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을까요?”
윤권이에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희씨랑 함께 일한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어도 그 자리에서 거절했을 거다. 그가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남자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의 그런 정의감이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 앞에서는 방해가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요. 제가 아는 성기씨라면 또 사고를 칠 것 같네요.”
“수··· 순희야!”
“오빠. 팀장님 말씀이 맞아. 그때 오빠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도와줬을 거잖아.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런데 가끔은 참아야할 때도 있는 거잖아. 당장 도와주고 싶어도 나중을 위해서.”
“하지만···.”
“성기야.”
“네. 팀장님.”
“넌 그때 분명 좋은 일을 했어. 형사과장에서 한 행동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료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했어. 그건 네가 너무 흥분해서 냉철한 판단력을 잃었다는 뜻이야. 아까도 말한 것처럼 이번 일은 정말 여기 있는 나와 우리 팀원에게는 목숨만큼 소중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그런 변수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행히 내가 이리저리 긁는 소리를 해도 순희씨는 차분하게 내 말에 잘 대응했어. 그 정도면 합격이야. 그러니 넌 그냥 서포트만 하고 현장은 순희씨가 커버해줬으면 좋겠어. 순희씨. 잘할 수 있죠?”
“네. 맡겨만 주세요. 꼭 성공할게요.”
***
허윤경은 포에버마트 분당 지점에 새롭게 마련된 ‘엘리’ 매장의 직원이다. 엘리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명품 메이커로 박연하 전무가 이번에 새롭게 도입했다.
대형 할인 마트와 명품 브랜드가 어떻게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둔 월드 베리어스 클럽(World Various Club)의 따라 했다고 하니 아주 허황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박연하 전무가 아웃렛 매장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었다.
아웃렛이 왜 아웃렛인가?
‘outlet’은 원래 '판로'라는 뜻인데 80년대 초 미국에서 '재고상품을 싸게 파는 전문점'을 아웃렛 스토어라고 부르면서 이 용어가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백화점이나 제조업체에서 자사의 제품 또는 직매입한 상품을 정상판매한 뒤 남은 비인기상품, 하자상품 재고상품을 정상가의 40-70%선에 판매하는 상설 소매점포를 말한다. 최근 들어서는 명품의류에서 구두, 가구 등으로 품목이 다양해 지고 있으며 처음부터 아웃렛 등에 내놓을 목적으로 저렴하게 제작하는 기획상품도 있다.
이렇듯 아무리 명품을 판매한다고 해도 아웃렛은 어디까지나 아웃렛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백화점 명품 매장으로 착각하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물론 아웃렛이든 백화점 명품 매장이든 고객을 상대하는 곳인데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허윤경을 포함해 이곳 엘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얼마 전까지 포에버마트 매장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다.
제품 진열이나 고객 응대 등 명품 매장 운영에 필요한 어떤 교육도 해주지 않고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며 폭언을 내뱉는데, 먹고 사는 문제만 걸려있지 않았다면 벌써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바른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포에버마트에 임명되기 전부터 유명했었다. 폭언은 기본이요 폭력도 쉽게 행사하고, 혹시라도 그녀의 행동을 문제 삼으면 끔찍한 보복을 받는다는 소문이었다.
박연하 전무 때문에 어떤 임신 중인 여직원이 유산했다는 괴담까지 돌고있는 지금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지옥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좀 있으면 네로 올 시간이다.”
폭군으로 유명했던 네로 황제. 직원들은 박연하 전무를 그렇게 불렀다.
“윽···. 어떡해. 난 여기로 발령난 이후 없던 변비에 생리불순까지 생겼어.”
“난 위장병에 탈모증세까지 나왔어. 용모단정한 진취적인 직원을 뽑는다고 할 때 거기에 혹해서 여길 지원하는 게 아니었어.”
“나도나도. 내가 미치년이야. 흑흑.”
“쉿! 저기저기. 온다. 신이여 오늘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소서···.”
박연하 전무가 수행비서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오자 엘리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그녀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조용히 박연하 전무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일은 제대로 못 하면서 아침은 제대로 먹었나 보네. 하여간 무능력한 것들. 쯧쯧.”
“···”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지만 함부로 대들 수 없었다.
“오늘은 그냥 청소 상태나 점검하겠어. 내가 그동안 너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어. 미적 감각도 없는 것들에게 백화점 수준의 디피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어. 머리는 나빠도 성실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그지? 그래야 월급 받아가는 낯짝이 있지. 안 그래도 용역비리니 어쩌니 하며 비난하는 데 난 그것도 이해가 안 가. 대체 뭘 바라는 거야. 미친 것들. 우리가 그런 쓸모도 없는 것들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해? 나원참. 이봐. 장갑!”
“네. 전무님.”
박연하 전무가 손을 내밀자 옆에 있던 비서가 하얀색 장갑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다. 그녀는 장갑을 양손에 끼고 천천히 매장 구석을 돌기 시작했다.
“음···.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벌써부터 먼지네. 이것들은 월급 도둑들이 확실해”
매장을 돌며 조금이라도 구석진 곳이라면 지체 없이 장갑으로 닦아냈다. 청소하기 쉽지 않은 곳이라 먼지가 조금씩 묻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틈, 창틀을 가리지 않고 지적했고 그때마다 직원들이 정성스레 진열해놓은 제품들을 전부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죄송합니다만 전무님. 청소는 따로 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장이 지저분하다면 당연히 우리가 정리해야겠지만, 창틀의 미세먼지까지 시비를 거는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박연하 전무의 폭언에 더 이상 참지 못한 허윤경이 나서서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는데 하필 오늘 생리통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참았을 상황을 참지 못하고 나섰지만, 금방 후회가 되었다.
“뭐라고? 납득할 수 없다? 네까지게 감히 납득못하면 어떡할 건데? 이거 보여? 내가 이야기했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성실해야 한다고. 이곳에 오는 손님들이 이 먼지를 다 마신다고 생각해봐. 끔찍하지 않아? 그래놓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
“오호. 그냥 말을 하지 않겠다? 핥아!”
“네?”
“이 장갑에 묻은 먼지가 네 년 눈에는 안 보이는 것 같으니 혀로 핥으라고. 원래는 소독까지 깨끗하게 한 면지갑이야. 혀로 핥아도 전혀 문제가 없어 핥아.”
“전무님.”
“핥으라고 이년아. 핥아! 당장 모가지를 날리기 전에 핥아. 네가 안 핥으면 다른 직원들도 전부 모가지를 날려 줄게. 알아 들어?”
자존심이 상해 모가지를 자를테면 자르라고 대들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박연하 전무의 말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많이 겪었는지 상대를 굴복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자신 때문에 다른 직원까지 피해를 줄 순 없었다.
“뭘 망설여. 빨리 핥아! 10초 안에 안 핥으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기대해도 좋아!”
박연하 전무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고, 허윤경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가 건네는 장갑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혀를 내밀어 먼지가 묻은 장갑에 가져다 댔다.
============================ 작품 후기 ============================
옛날 군대 고참이 이런 놈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립니다.
박연하 전무의 추락을 그리기 전에 그녀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알리려고 짧은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요즘 스토리 진행이 늘어지고 있죠? 죄송합니다. 아이디어가 잘 안 떠오르네요. ㅠㅜ
심기일전하고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