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많이 달라졌다고? 어떻게?”
고진성 부회장의 이야기에 고대성 회장은 신경질적으로 두들기던 오른손 검지를 멈추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회장님이나 다른 이사진들이 현호에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독기나 카리스마라고 많이들 평가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똑똑하긴 했지만 제 엄마 닮아서 좀 유약한 면이 있었으니까. 나는 항상 그게 불만이었고.”
“얼마 전에 현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죠. 너는 카리스마가 없다. 그래서 믿음이 안 간다.”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보통은 독심을 가져보겠다 혹은 카리스마 있게 행동하겠다. 이런 식의 대답을 많이 하는데, 그 녀석은 대뜸 자신은 그런 식의 경영은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흠···. 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이군. 독심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간땡이가 커지긴 했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룹 부회장 앞에서 그런 소리를 내뱉다니 말이야.”
고대성 회장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내아들이 예전과 다르게 강단이 있어진 것 같아 기꺼웠다. 예전의 우유부단 하던 모습이 아니라면 고현호 이사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저도 그랬습니다. 회장님이나 내가 틀렸단 말이냐? 이렇게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랍니다. 시대에 따라 필요한 경영방식이 있고, 1980 ~ 1990년대에는 회장님 같은 스타일이 가장 최적화된 경영방식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동지그룹의 성장이 갑자기 완만하게 변한 건 이제 그런 경영방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라면서, 그래서 자신은 카리스마 있는 경영자가 아니라 한나라를 세운 유방 같은 모습의 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유방? 생각은 나쁘지 않군.”
“동지그룹은 너무 거대해져서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공룡이 되어버렸다더군요. 그래서 지금 동지에서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재를 말하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죠. 사실 현호가 예전부터 사람 운은 좀 있었지 않습니까? 그걸 자기도 알더군요. 그리고 그게 자기의 최고 강점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능력. 회사를 발전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기본 바탕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그게 녀석이 가지고 있는 신념인 것 같았습니다.”
“흠···. 너무 이상주의자 같아 보이는데.”
고현호 이사의 말이 새롭긴 하지만, 모든 의사결정을 본인이 직접해왔던 고대성 회장에게는 그런 모습이 왠지 위태롭게 보였다.
“하비 파이어스톤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사람의 성장과 발전은 지도자가 추구해야 할 가장 최상의 소명이다.’”
“쯧. 말은 좋지. 그게 어디 쉽나?”
“신뢰를 바탕으로 믿고 맡기면 반드시 성공하기 마련이라고 확신하던데요? 물론 현호의 눈에 들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허황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게 살아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마동수 팀장이죠.”
어떻게 보면 동수는 고현호 이사의 페르소나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페르소나(persona)란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서 그림자와 같은 페르소나는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말했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페르소나는 종종 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한다.
의도했든 아니든 지금 현재 고현호 이사의 이상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동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임시 이사회에서 엉뚱한 일이 있었다면서? 정호가 마동수 팀장을 대놓고 찍어내버리려고 했다면서?”
“네. 안 그래도 요즘 그 친구 주가가 엄청나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호는 정말 자신의 말처럼 부하직원이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든든하게 서포트만 해주고 있고, 사실상 동지마트를 살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마동수 팀장이라고 할 수 있죠. 동지랜드도 그렇고, D&Y 피트니스 센터와 동지마트까지 그 친구가 손을 댄 곳은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으니 정호 눈에는 굉장히 거슬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계열사의 일개 팀장에 대한 징계를 임시 이사회에서 논의하다니···. 쯧쯧. 정호가 불안감인지 질투심인지 그런 감정에 눈이 어두워 무리수를 뒀구먼.”
“재미있는 건 이미 정호의 도발을 눈치채고 현호 측에서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동수 팀장은 윤 스포츠센터와 붙어먹은 역적에서 일약 기부천사로 발돋움했습니다. 분명 그 녀석 머릿속에서 나왔을 텐데, 일하는 스타일이 확실히 변칙적이면서도 영리합니다. 신뢰를 가지고 밀어주는 스타일인 현호와 찰떡궁합이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임시 이사회에서 마동수 팀장의 능력은 모두 인정했다면서?”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능력은 확실하지만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그게 화두였죠. 결국은 정호의 의도와 다르게 신뢰할 수 있는 직원이 돼버렸지만 말입니다.”
“큭큭큭. 재미있군. 재미있어.”
동수가 지리산 연수원으로 발령났을 때, 고현호 이사는 그 발령을 돌리기 위해 고대성 회장을 찾아갔었다. 동지마트를 맡는 조건으로 동수의 지리산 연수원 발령을 취소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바보같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단지 고현호 이사의 오지랖이라고 생각했던 동수가 짧은 기간에 임시 이사회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뜨거운 감자로 변했다.
역시 사람일은 알 수 없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지금 상황이 고대성 회장 입장에서는 흥미로웠다.
“현호의 가세로 후계자 경쟁이 재미있어진 건 사실입니다.”
“그래. 재미있어. 그리고 나를 재미있게 해준 답례로 마동수 팀장에게 선물을 줘야겠군.”
“어떤 선물을···.”
“팀장 대우라면서? 그럼 ‘대우’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려.”
“네? 하지만···. 아! 그건 그룹 본사 규정이군요. 계열사 진급 규정은 다르니 팀장으로 곧바로 진급해도 크게 문제는 없겠습니다.”
동수는 작년에 주임에서 대리로 진급했다. 원칙상 대리에서 다시 과장이 되려면 최소 3년의 기간이 필요하다. D&Y 피트니스 센터를 성공적으로 런칭했을 때도 다른 직원들이 모두 승진했지만, 동수 혼자 진급을 하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원칙 때문이었다.
그런데 계열사에는 그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원칙을 적용할 필요가 없었다. 동지그룹의 기형적인 인사 시스템상 진급을 빨리할 정도로 유능한 인재는 거의 무조건 본사로 발령이 난다.
예외란 거의 없다. 있다면 동수처럼 정치적(?) 외압에 의해 실력이 있으면서도 안타깝게 밀려는 경우인데, 그들이 대부분은 지리산 연수원에 발령받거나 더 이상 중용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럼 그렇게 해. 인사권자는 내 이름으로 하고. 그래야 녀석들이 더 이상 장난질을 못 하지. 지리산 연수원으로 발령났는데 살아났고, 임시 이사회에서 징계를 받을 뻔했는데도 살아났고.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편하게 살게 해줘야지.”
고대성 회장의 이름으로 인사발령이 났다는 건, ‘내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니 건드리지 마라.’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셈이다. 아무리 고정호 전무나 고평호 상무가 그룹 내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지만 동지그룹 회장의 명은 절대적이다.
그렇게 동수는 31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계열사 팀장, 그룹 본사로 직급으로는 과장이 되었다. 그보다 젊은 나이에 과장을 단 사람은 꽤 있다. 같이 근무했던 김수현 과장도 29살에 과장을 달았으니 동수보다 2살이나 빠른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입사 8년 차에 과장을 달았고, 동수는 이제 겨우 입사 5년 차였다. 지금까지 동지그룹에서 로열패밀리를 제외하고 입사 5년 만에 과장이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그룹 내 유명인사가 된 덕분에 동수의 진급소식은 누구보다 빠르게 그룹 전체에 퍼졌다. 본사 규정상으로 따지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진급이었지만, 명령권자가 고대성 회장인 만큼 감히 그 누구도 그의 진급에 딴지를 걸지 못했다.
***
예전 동수가 몸담았던 양지선 팀장의 사무실.
“이 대리님! 이 대리님!”
이제 주임에서 대리로 진급한 최종현 대리가 다급하게 이기적 대리를 찾았다.
“왜.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혹시 마동수 팀장님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뭐? 마동수 팀장님? 그 자식이 내 위야? 팀장이라고 해도 팀장 대우잖아. 본사로 따지면 같은 대리급이라고. 학교에서 존댓말 안 배웠어? 내게 이야기할 땐 팀장님이 아니라 팀장이라고 해야지. 너도 이제 대리됐다고 나 무시하는 거야?”
동수 이야기만 나오면 여전히 까칠해지는 이기적 대리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 대리님. 그런데 이제 정말 마동수 팀장이 아니라 팀장님이 됐습니다.”
“뭐? 팀장이 아니라 팀장님이라니···. 이게 나랑 장난하나. 심심해? 오랜만에 푸닥거리 한 번 할까?”
“아니요. 그런데 진짜 팀장님이 됐습니다. 방금 인사과에 근무하는 제 동기에게 이야기 들었는데 마동수 팀장님이 글쎄 정식으로 팀장이 됐다고 합니다. 본사 직급으로 따지면 과장이 된 셈이죠.”
“뭐?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개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그놈 대리 단지가 언젠데 벌써 가장이 된단 말이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기적 대리가 믿지 않자 최종현 대리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어휴. 저도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대박인 건, 인사권자가 스페셜 원이랍니다.”
“그··· 그게 정말이야? 진짜야? 씨X. 진짜냐고!”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와!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마동수 팀장님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스페셜 원 눈에 들 수 있죠?”
“넌 자존심도 없어? 그 자식이 너보다 후배잖아. 그런데 기분 안 나빠?”
최종현 대리가 동수보다 2년 선배인 건 맞다. 그러나 어머니 수술비가 없을 때 망설이지도 않고 큰돈을 빌려준 사람이 동수다. 어떻게 보면 그에겐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질투는커녕 박수치며 축하해주고 싶은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2년 선배라도 저보다 나이는 세 살 많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요.”
“어휴···. 저 등신. 그래. 아주 그냥 보살 났네, 보살 났어. 그래 너 혼자 많이 좋아해라. 빌어먹을.”
이기적 대리는 최종현 대리가 같이 호응해주지 않자 더 화가 나서는 씩씩거리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 이 대리님. 어디 가십니까? 마동수 팀장님이랑 크게 원한을 진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제라도 친하게 지내시죠. 스페셜 원 눈에까지 들어갔는데 굳이 척을 질 필요가 있습니까? 이 대리님! 이 대리님! 갔네. 갔어. 어휴. 저놈의 성격하고는···.”
============================ 작품 후기 ============================
최종현 대리 기억나십니까? 한때 동수를 괴롭히다가 어머님 수술비를 도와주는 걸 계기로 친한 사이가 됐죠.
요것도 하나의 떡밥이었는데 아직 회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최종현 관련 에피를 하나 써야 할 것 같아 잠깐 등장시켰습니다.
회장과 부회장의 대화가 너무 길어졌죠? 짧게 마무리를 하려고 했는데 동수 진급 이야기를 깜빡했지 뭡니까? 그동안 고생을 했으니 진급 한 번 해줘야죠? ㅎㅎㅎ
솔직히 직장인이 되면 월급 오르는 것도 좋지만 진급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죠. 원칙대로 3년 후에 과장이 되면 스토리에 지장이 있어서 선심 한 번 썼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