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0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파팍. 파바바박. 찰칵! 찰칵!
플래시와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터지자, 시연이는 포토그래퍼의 요청에 따라 자신감 있게 포즈를 취했다. 동지랜드에서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어색한 표정 하나 없이 자연스러웠다.
“좋아요. 좋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귀엽게. 남자친구에게 놀러 가자고 귀엽게 조르는 표정같은? 그렇죠. 바로 그 얼굴이에요. 하하하. 좋습니다.”
나풀거리는 하얀색 원피스와 안개꽃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화관을 쓴 시연이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강림한 듯 고혹적이면서도 청초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포토그래퍼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여기는 강남에 있는 유명 스튜디오고 시연이는 동지마트의 새로운 광고모델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원래는 해외의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촬영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동지마트가 처한 현 상황과 해외촬영은 컨셉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현재 대한민국은 대형 할인 업체와 여러 유명 대기업에서 일어난 용역 비리 사건으로 시끌벅적한 상황이다. 특히 모 대기업 이사의 갑작스러운 돌발 발언은 불에 기름을 붓듯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정말 그따위로 자기들 마음대로 편집해서 비난하는 걸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나라인지 알 수 있다. 해명해도 듣지도 않고 눈, 귀 다 막고 자기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인간들. 언론에서 언급한 비정규직 직원들은 용역업체와 외주 계약을 통해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4대 보험도 용역업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 회사가 청소하는 사람들까지 신경 써야 할 만큼 한가한 곳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업체는 대형 할인 마트와 달리 용역업체에 완전히 외주를 준 상황이니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비난받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말투가 문제였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특권의식이 배인 말투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줬다.
그의 무책임한 말에 용역 비리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까지 분노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각종 커뮤니티에 용역비리와 관련된 업체에 대한 비난 글이 올라왔고, 심지어 불매운동의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우리가 계산했던 상황을 넘어서 버렸다.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며 동지마트에 유리한 쪽으로 여론몰이하려고 했지만,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바람에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지금 상황에서 해외에 있는 휴양지에서 광고 촬영을 한다면 아무리 시연이가 아무리 여신급 미모라고 해도 사람들이 좋게 볼 리가 없다. 훗날 아나운서가 되었을 때 생각 없이 광고를 찍었다며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고현호 이사와 시연이에게 이야기해 촬영 컨셉을 바꾸기로 했다.
촬영이 목적이긴 해도 처음으로 가는 나와의 해외여행이라 기대가 컸던지, 내 이야기기를 듣던 시연이의 표정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일이 많아져서 힘들지 않으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 모습에 고현호 이사는 두 번째 광고는 무조건 해외에서 찍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두 번째 광고를 찍는다는 건 동지마트가 완전히 살아났을 때야 가능한 일인데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다.
Rrrr
“네. 마동수입니다.”
“나 김학수요.”
시연이가 촬영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고현호 이사의 소개로 얼마 전에 만난 김학수 부장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 부장님. 벌써 준비가 끝나셨습니까?”
“준비야 진작에 끝내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경우까지 예상해서 여러 가지 방안들을 마련해뒀으니까요. 광고 촬영만 마무리되면 바로 시작할 겁니다.”
“역시 그러셨군요. 촬영은 거의 막바지입니다. 일정이 끝나면 밤을 새워서라도 작업을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인쇄소도 이미 스탠바이하고 있으니 3일 후면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아침에 기사를 내보내도록 하죠. 이번엔 변수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우리 측 인사들 단속만 잘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사실 상황이 좀 급박하게 돌아가서 몸은 좀 힘들었지만, 다른 회사의 삽질 덕분에 고현호 이사님의 영웅 만들기는 당초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폭발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비교하긴 어렵지만, 지금 상황을 잘만 이용한다면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님 같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 CEO가 될지도 모릅니다.”
1962년 우리나라 제약업체로는 처음으로 주식회사로 상장한 기업인 유한양행은 두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1조 5천억 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 대기업이다.
유일한 박사는 그런 유한양행의 창업자였다. 그분이 돌아가시며 유언을 남겼는데 당시 15만 주 정도 되었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본인이 세운 유한공고라는 재단에 기증하고 그의 아들에게는 ‘대학까지 공비를 시켜줬으니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길을 개척해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건 그의 자녀를 비롯한 친족들 그 누구도 유한양행의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족벌경영이다 뭐다 하며 기업을 사유화하는 재벌들과 달리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런 대단한 분을 아직 풋내기인 고현호 이사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큰 실례다. 하지만 자기 PR과 이미지 메이킹은 이 시대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나와 김학수 부장님이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이사님이 유명해지면 동지마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테니까요. 너무 유명해지면 이사님께서 귀찮아하실 게 걱정이지만요.”
“하하하. 안 그래도 그 점이 걱정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뭔가를 이루려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합니다. 건강하길 바란다면 술담배를 끊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게 자신의 목표라면 더더욱 그래야죠. 아무튼, 광고가 무사히 마무리되고 있다니 다행이군요. 완전히 준비가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부장님.”
나는 김학수 부장님과의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뭔가를 이루려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라는 그의 말이, 이번 계획을 진행하면서 부족했던 부분이 뭔지 깨닫게 해줬다.
광고 촬영이 끝나고 시연이를 집에 바래다주고는 고현호 이사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이 있는 청담동으로 향했다.
“어서 와.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야? 지금쯤이면 광고 촬영 끝내고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겨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그래야 했는데, 이사님 뵈려고 일찍 집에 들여보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마 며칠 간은 바가지 긁힐지도 모릅니다. 책임지십시오.”
“하하하.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미안하네. 내가 제수씨를 위해서 뭔가 근사한 선물이라도 해야겠어. 약속했던 해외촬영도 못 하고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이 많았는데. 그래. 데이트까지 미루고 나를 찾아왔으면,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겠지? 세이경청할테니 어서 말해봐.”
“아까 광고 촬영 중에 김학수 부장님과 통화를 했는데, 그분이 제게 그러시더군요.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뭔가를 이루려면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런데?”
고현호 이사는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저와 김학수 부장님이 이렇게 발에 땀이 나도록 바쁜 이유가 뭡니까?”
“내가 학수와 마 팀장을 고생시키고 있긴 하지. 미안해. 그런데 질문은 요지가 뭔지 모르겠는걸? 최근에 바쁜 이유를 묻는 거야?”
“네.”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일명 고현호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난다 긴다 하던 대기업들이 비정규직의 등을 처먹고 있는 이 시기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피해자들에게 우선 보상하는, 요즘 세상에 정말 보기 힘든 생각이 제대로 박힌 동지마트 CEO 고현호. 이사님을 그렇게 만들어 드리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윽.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바로 그겁니다!”
“뭐?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사님의 그런 마인드. 제가 김학수 부장님의 말을 듣는 순간 이번 ‘고현호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의 가장 큰 구멍이 바로 이사님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나의 지적에 고현호 이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구멍이라니까 나도 안타깝네. 그런데 뭔지 제대로 말해줘야 고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이사님은 이제 며칠 후면 대중들에게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김학수 이사님을 능력을 생각하면 일거수일투족까지 주목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사님은 이미 동지마트의 대권에 욕심을 내셨습니다. 그러니 희생할 건 희생해야죠.”
“아하. 김 부장의 말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거구나.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대중들이 영웅을 원한다면 철저하게 영웅이 되어줘야죠. 집이야 보안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지금 몰고 다니는 외제차는 바꾸셔야 합니다.”
“뭐? 아니 그것까지?”
재벌 2세답지 않게 소탈하지만, 그에게 부자다운 유일한 취미가 있으니 그게 바로 자동차다. 세 대의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중에 하나는 10억 원이 넘는 고가의 스포츠카다. 부자가 자기 돈으로 고가의 자동차를 몰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마는 ‘영웅’이라면 문제가 된다.
“사재를 털어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재벌 2세. 여기까진 훈훈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10억 원이 넘는 외제 자동차를 몰고 다니더라.’라는 소문이 퍼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흠. 고깝게 보는 시선이 생길 수밖에 없겠군.”
“맞습니다. 그렇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겠지만, 분명 효과가 반감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당연히 정리하고 국산 자동차로 바꿔 타셔야죠. 그리고 고가의 시계나 명품 옷들도 평소에는 지양하시고요. 일종의 코스프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거든요. 소탈한 재벌 2세. 앞으로 이사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마 팀장아.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나에게 말하는 고현호 이사의 눈에는 정말 슬픔이 가득했다.
“그건 이사님이 알아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단지 동지마트를 정상화하고 나아가 동지그룹의 헤게모니를 거머쥘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설명해 드렸을 뿐입니다. 이사님께서 돌아가시길 원하신다면 아랫사람으로서 당연히 뜻을 존중해야겠죠.”
“됐어, 됐다고. 아주 진짜. 그냥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해라. 그렇게 돌려 말하니까 더 무섭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자동차를 팔아서 한 것으로 언론에 알리겠습니다. 인제 와서 갑자기 자동차를 바꾼다고 해도 지금까지 몰고 다녔던 자동차들은 금방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정면승부를 해야죠. 부족함 없이 자랐던 재벌 2세가 동지마트의 경영을 맡으면서 서민들의 아픔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의미로 지금까지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정리해 피해자들에게 보상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외제차가 아니라 국산차를 몰고 다닌다. 캬아!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동수야.”
“네. 이사님.”
“그런데 너 어째 그렇게 말하면서 되게 흐뭇해 보인다? 이거 설마 나 골탕먹이려고 하는 말 아니지?”
“설마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정말 서운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사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연이와의 데이트까지 뒤로 미루고 찾아왔는데요.”
“그래. 알았어. 내가 마 팀장 진심을 알아줘야지. 그럼 그렇게 하자고. 그런데 말이야.”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아끼는 자동차까지 팔았는데 기대하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나 정말 삐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내겐 자식 같은 녀석들인데, 정리하려고 하니 벌써 눈물이 앞을 가린다. 흑.
============================ 작품 후기 ============================
글이 잘 안 써지네요. 슬럼프입니다. ㅠㅜ
얼른 회복해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열심히 써서 오늘 자정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