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88화 (188/424)

00188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올해로 동지에 입사한 지 10년째인 이기적 대리. 그는 요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 자신보다 2년 선배인 조기훈은 과장을 지나 벌써 팀장 자리에 올랐다. 조기훈 팀장은 그래도 회사 선배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수현은 그보다 2년 후배인데도 벌써 과장을 달았다.

몇 년을 같은 팀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승진은 이기적 대리에게 굉장히 뼈아픈 아픔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것은 한때 스트레스 해소용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던 마동수의 성장이다.

언제나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리더니, 이제는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이기적 대리도 과장을 달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마동수의 기획안을 몇 개 강탈한 덕분에 인사고과도 차근차근 쌓아, 늦었지만 과장진급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었었다.

그러나 욕심을 너무 부렸다. 마동수가 진행하던 윤 스포츠센터와의 협상에 무리해서 끼어들었다가 오히려 일을 망치면서 승진은커녕 징계만 먹고 말았다.

징계를 받은 것도 화가 났지만 더욱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마동수가 돌아와 자신이 말아먹고 있던 협상을 한 번에 해결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때부터 그는 완전히 무능력한 인간으로 낙인 찍혔고, 더 이상의 승진기회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입사 10년 차. 올해까지 승진하지 못하면 본사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는 것은 거의 물 건너갔다가 봐야 한다. 하지만 딱히 승진할 수 있는 건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조만간 계열사 과장으로 발령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기업 과장이니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지그룹 지주회사인 주식회사 동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마케팅 부서와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특히 동지그룹은 다른 대기업과 달리 굉장히 중앙집권적 경영체제를 갖추고 있다. 말이 좋아 대기업 과장이지 계열사로의 전출은, 한 마디로 찬밥 신세가 된다는 의미였다.

Rrrr

“여보세요.”

“기적이냐? 나다. 한상질.”

“오. 한상질 팀장님. 오랜만이네.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

한상질은 동지마트 총무팀의 팀장이다. 그리고 이기적 대리와는 입사 동기이다. 한 사람은 대리, 한 사람은 팀장이지만, 본사 마케팅팀의 대리와 망하기 직전의 동지마트의 팀장은 끗발부터가 다르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뭔데?”

“혹시 마동수라고 알아? 본사 마케팅 팀에서 일했다고 하던데.”

“알지. 4년 동안 내 밑에 있던 놈인데. 갑자기 그놈은 왜?”

“그 친구가 이번에 우리 동지마트의 TF팀장으로 발령받았다고 하더군.”

“뭐? 동지마트? 그놈이 어쩌다가 그딴 곳에 다 발령받았지. 하하하.”

이기적 대리는 마동수가 동지마트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에, 자신의 동기 또한 그곳 소속이라는 걸 잠시 잊고 박장대소를 했다.

“크흠. 이봐. 나도 동지마트 소속이거든.”

“아차. 미안해. 한 팀장. 좀 재수 없는 녀석이라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어.”

“재수 없는 놈이라고? 어떻게?”

“자꾸 새끼, 새끼 하지 마시죠. 듣는 새끼 기분 더럽습니다. 이 대리님도 제 입장이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겁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좀 정도껏 하시죠.”

“뭐야 갑자기?”

“그 자식이 작년에 내게 했던 말이야. 이 정도면 알만하지?”

마동수가 그에게 했던 말은 맞다. 하지만 이기적 대리가 마동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기적 대리는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하고, 마동수에게 당한 것만 억울해 하고 있었다.

“진짜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들어보니 우리보다 6년 후배던데.”

“내 말이. 좀 잘 나간다고 나를 우습게 본거지. 상질이 너도 조심해. 그 자식도 팀장이라며? 4년 동안 같이 일한 나보고도 같은 대리라고 맞먹는데,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처음에 군기 못 잡으면, 넌 계속 그놈의 호구 노릇이나 하게 될 거야.”

“뭐? 에이. 그건 아니다. 내가 그래도 여기선 좀 잘 나가거든.”

“이봐. 한 팀장. 정말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동지마트에서 잘나가봐야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있어? 어떤 면에서는 본사 마케팅의 평직원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자리인데.”

“크흠. 아픈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군. 그래서 본사 마케팅부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닐 거라 그 말이야?”

“말해 뭐해?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정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생긴 건 곰처럼 생겼어도 하는 짓은 여우야. 까딱 방심하면 간째 빼먹으려 들 거야.”

그렇지 않아도 동지마트에 갑자기 불기 시작하는 변화의 바람이 탐탁지 않았다. 지금 동지마트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직원들은 차라리 3-마트나 엘마트와 합병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회장님의 셋째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이번에는 TF팀 어쩌고 하며 요란 법석을 떨며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군. 충고 고마워.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과 주제 파악 못 하는 본사 마케팅부 출신의 애송이에게 현장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보여주도록 하지.”

“그래. 잘 생각했어. 재미있는 소식 생기면 알려주라고. 나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고. 하하하.”

이기적 대리는 마동수를 골탕먹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져 별 의미도 없는 호기를 부렸다.

“됐어. 본사 도움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기대하라고. 현장 사람들의 협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이참에 제대로 보여주도록 하지.”

“그래. 이참에 마동수 뿐만 아니라 회장님 아들에게도 자네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라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마동수 그 녀석이 고현호 이사에게 꽤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하더군. 혹시 아나? 마동수를 밟아버리면 고현호 이사가 그놈 대신 자네를 신임하게 될지. 그럼 본사행이 아주 꿈도 아니라고.”

“뭐? 그럴까? 오호. 그럼 좀 더 신경을 써야겠군. 고마워, 이 대리. 아주 중요한 정보군. 이래서 본사에서 근무해야 한다니까. 여기 처박혀 있으면 본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혹시 잘 돼서 본사가게 되면 내가 한턱 쏨세.”

이기적 대리와 통화를 마친 한상질 팀장은 곧바로 후배인 인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Rrrr

“네. 선배님.”

“그래 인사. 뭐 좀 알아볼 게 있어 전화 걸었어.”

인사는 인사팀장의 줄임말이다. 나름 친한 사이라서 애칭처럼 부른다.

“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새로 생기는 TF팀 팀원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물론이죠. 그게 뭐 어렵다고. 잠시만요. 여기 있네요. 기록부. 팀장인 마동수는 2007년에 입사한 4년 차 애송이네요. 그런데 벌써 팀장이야? 아무리 계열사라도 팀장은 너무 빠른 것 같은데요.”

“방금 본사에 있는 동기에게 알아봤는데 엄청 싸가지가 없대. 위아래도 없는 재수 없는 새끼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이참에 제대로 신고식 좀 해주려고. 다른 팀원들은 어때?”

“음. 어라. 남녀 한 명씩 있는데 둘 다 계약직이네요. 남자는 대졸이긴 한데, 체대 출신입니다. 유도를 전공했다고 나와 있군요.”

“유도? 그럼 화난다고 막 때리고 그러는 거 아냐? 일단 그놈은 패스. 다음.”

“네. 여자는 추미래라고 며칠 전까지 동지마트 행당점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직원입니다. 고졸이네요.”

“뭐? 정말 TF팀 팀원 맞아? 프로젝트팀에 무슨 고졸 계약직이 들어가나?”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여기 인사기록 카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딱 좋군. 고졸에 계약직. 첫 타겟으로 잡기에 가장 적절하겠군.”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반갑다고 신고식 해주려는 거지. 그러니 인사도 걱정하지 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알겠습니다. 선배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이왕 하는 거 계열사 직원들 무시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보여주십시오.”

***

커피와 나는 인연이 깊다. 나의 꼬인 회사 생활을 알리는 시발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내 친구의 연인이자 든든한 직장동료가 되었지만, 커피로 날 갈구던 김수현 과장의 당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그런데 우리 팀에 대한 신고식으로 커피 심부름이라니, 총무팀은 지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단지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고 이렇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어느 조직이나 텃새는 있기 마련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쪼잔한 인간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첫 번째 괴롭힘의 대상으로 내가 아니라 우리 팀에서 가장 나약해 보이는 추미래씨를 선택했다. 그들도 우리에 대해서 대충 파악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졸에 계약직인 그녀를 먹잇감을 선택한 것은 노골적으로 약자를 괴롭히겠다는 더러운 수작이나 다를 바 없다.

또한, 상대의 약점부터 공략한다는 것은 장난스러운 신고식이 아니라 정말 나랑 한번 해보자는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다. 사나이 마동수가 그런 선전포고에 도망갈 이유는 없다.

Rrrr

“오랜만이네요. 마동수 팀장님.”

“그래 진희야. 내가 팀장이 된 것도 알고, 정말 과분한 관심 고마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나는 총무팅으로 향하면서 곧장 입사 동기인 장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우리 동지 그룹의 넘버 투인 고진성 부회장(올해 전무에서 부회장으로 승진)의 수행비서이다. 그러다 보니 동지그룹 직원들의 인적사항에 대해서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헛소리하실 거면 전화 끊겠습니다.”

“워워. 릴렉스. 뭐 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말씀하세요. 바로 알려드릴게요. 이게 다 빚이라는 건 잊지 마시고요.”

“물론이지. 빚은 나중에 한꺼번에 청산하기로 하고, 일단은 용무부터. 동지마트 총무팀 직원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우선 팀장부터.”

“동지마트요? 잠시만요. 동지마트 총무팀 팀장. 이름 한상질. 나이 36세. 2001년 상반기 신입사원으로 입사.”

“잠깐. 2001년 상반기? 그럼 이기적 대리랑 동기?”

“네. 그렇게 되네요.”

동기들 만나면 하도 이기적 대리를 욕하고 다녀서 그녀도 그의 인정사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꿰고 있었다.

“흠. 이거 냄새가 솔솔 나네. 동지마트에서 기존 직원들이 우리 팀에 시비를 걸었는데, 알고 보니 총무팀이야. 그런데 알고 보니 총무팀 팀장이 이기적 대리와 동기네. 이게 그냥 우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떤 분께서 동기 모임을 하면 항상 말씀하셨죠. 우연을 믿지 말고, 우연부터 의심하라고.”

“하하하. 그런 똑똑한 동기가 있었단 말이야? 누구야? 그 똑똑이가?”

“있어요. 겨우 20살 먹은 어린 여자아이랑 후다닥 약혼까지 해치워버린 도둑놈이죠.”

“이런. 그놈 참 나쁜 놈이네. 하지만 그놈 뒷담화는 나중에 하자고. 지금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거든. 고마워. 진희야. 이 원수는 조만간 꼭 갚을게.”

“다음 동기 모임에서 제대로 쏘셔야 할 겁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파이팅 하세요.”

어느 정도 선에서 이번 일을 해결할까 고민했었는데, 진희와의 통화로 고민이 사라졌다. 이건 보나 마나 이기적 대리 그 자식이 뒤에서 부추겼을 것이 분명하다. 멍청한 한상질 팀장은 그 부추김에 넘어가 우리 팀에게 시비를 걸었겠지만, 그렇다고 동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의 행동은 우리 팀뿐만 아니라 고현호 이사님까지 무시한 행동이다. 그리고 이번에 가담했든 아니든 동지마트 본사의 모든 직원이 지금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동지마트의 개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본보기가 필요했는데, 한상질 팀장이 알아서 낚여준 셈이 되었다.

190cm가 넘는 윤권이가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성큼성큼 내 뒤를 따르고 있으니 다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실은 7층 제일 구석.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사무실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관중몰이를 한 셈이다.

회의실에 도착해서 창문으로 내부를 살폈다. 블라인드로 가리지 않아서 안이 전부 다 보였다. 회의를 한다기보다는 왁자지껄 노는 분위기처럼 보였다. 아마도 추미래씨가 커피를 가지고 오면 또 다른 시비를 걸려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커피가 식었느니 하며 다시 가져오라는 유치한 장난질을 칠 게 뻔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재미있다고 키득키득 거리겠지. 제일 구석 회의실을 잡은 것도 그런 장난질을 하려고 일부러 그랬을 확률이 높다.

똑똑똑!

회의실 앞에 선 나는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노크를 했다.

============================ 작품 후기 ============================

별들의권족님 오탈자지적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했습니다.

바로 진행을 했어야 했는데 사설이 길어졌네요. 총무팀장을 좀 더 나쁜놈으로 만들다보니.. ㅠㅜ 이유야 아시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