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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73화 (173/424)

00173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다. VIP 병실은 왜 호텔 수준이라고 불리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안락했다.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과 샤워실은 기본이고, 가족이나 면회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소파를 비롯한 다양한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심지어 전망도 좋다. 창밖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웬만한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 못지 않을 만큼 근사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친절하다. 일반병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뚝뚝한 모습, 이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동지그룹과 윤 스포츠센터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고, 고위급 경찰 간부(광우를 보고 그런 소문이 난 것 같은데, 솔직히 나도 왜 이런 소문이 났는지는 모른다.)가 들락거린다는 이야기까지 퍼지는 바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잉 친절을 베풀었다.

납치범들이 다시 나타날 것을 대비해 세워둔 경찰들은, 경찰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엄청난 세력가 집안의 아들이라는 소문에 상당한 신빙성(?)을 더했다. 동지그룹의 삼남인 고현호 이사와 윤 스포츠센터의 윤승태 사장님의 방문은 끝도 없어 이어지는 나에 대한 루머에 피날레를 장식했다.

시연이가 없을 때를 틈타 추파를 던지는 간호사가 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좋으시겠습니다.”

“뭐가?”

“저렇게 예쁜 간호사들이 추파를 던지니 말입니다.”

“짜식. 부러워서 비꼬는 거냐? 그리고 그럼 뭐하냐? 그림의 떡인데. 추파를 받아들이고 싶어도 바람 피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려 버린다는 무식한 인간이 있어서 참을 수밖에.”

“네? 그럼 제가 없으면 한눈이라도 팔겠다는 소리입니까?”

나의 농담에 윤권이는 정색을 한다. 내게 양해를 구하고 동우와 사라진 이후 뭔가 좀 더 차분하게 변한 분위기를 풍기며 돌아왔지만, 여전히 바람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굴었다.

이거 설마 상수가 시연이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이런 놈을 섭외한 건 아니겠지? 이럴 때 녀석의 모습을 보면 경호원이 아니라 감시자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윤권이 녀석이 나쁘지는 않다. 우직하고 순박한 건 원래 알고 있었고, 며칠 지나자 스스럼없이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붙임성도 있어서 편한 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놀려먹는 재미가 일품인 녀석이라 심심하지는 않다.

“크흠. 조크잖아. 조크. 그리고 네 눈에는 예뻐 보일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우리 시연이와 비교하면 못생긴 거나 다름없거든. 그러니 갖다 붙이려고 해도 좀 제대로 갖다 붙여. 난 못생긴 여자 싫어.”

“뭔가 좀 재수 없는 말인데 반박할 수 없군요.”

“그렇지? 내가 원래 재수는 좀 없어도 빈말은 안 하거든.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시연이 외모 정도면 대한민국 미인 랭킹에서 0.00001% 안에는 들걸?”

“솔직히 방법이 뭡니까?”

“뭐가?”

“형수님처럼 엄청난 미인이 보스에게 빠진 이유가 너무 궁금합니다.”

내가 ‘보스’라는 말을 싫다고 했지만, 광우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부득부득 ‘보스’라고 부르겠다고 우겼다. 누가 우직한 놈 아니라고 할까 봐 고집이 또한 쇠심줄 같아서 그냥 그러라고 했다. 처음엔 손발이 좀 오그라들었지만 자꾸 듣고 보니 그리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딱 보면 알잖아. 나처럼 멋진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안 빠지겠어.”

“딱 봐도 모르겠는데요. 저나 보스나 산적같이 생긴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야 인마. 그건 나도 부정할 순 없는데. 아무리 같은 산적이라도 격이 다른 거야. 나는 그래도 산적계에서는 샤방샤방 꽃미남 축에 속한다고. 하지만 너는 산적 중의 산적이잖아.”

“묘하게 부정할 수 없는 말이군요.”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솔직히 아까 그 간호사들은 나의 외모에 반한 게 아니라 엄청난 세력가의 아들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거잖아. 그런 관심 나도 달갑지 않거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을 좋아하는 속물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방법이 불법적이지만 않다면 사람의 욕심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 욕먹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사람이 마음을 안 보고 돈에 ‘환장한 년’이라고 욕하지만, 솔직히 사람 마음 안 보고 예쁜 여자만 찾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 아닌가?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는 여자는 속물이고, 미녀를 사귀는 남자는 능력남이라고 말하는 이중적인 남자들의 모습은 나 또한 싫다.

물론 나쁘다고는 안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이 좋은 건 아니다.

“딱 봐도 부티는 안 나는데 왜 그런 소문이 퍼졌을까요?”

“오. 성윤권. 짜식. 이제 보스를 상대로 그런 농담도 한단 말이지. 하하하. 사실 나도 그게 의문이야. 산적계의 꽃미남이라고 해봤자 일반인에게는 산적일 뿐인데 말이야.”

시연이가 없을 때 주로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윤권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거다. 아무리 VIP 병실이 좋다 한들 병원이요, 아무리 호텔급이라고 한들 호텔은 아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온종일 병원에 처박혀 있는 것은 정말이지 고문이나 다름없다.

답답하다며 퇴원하고 싶다고 졸라도, 아직 범인이 안 잡혀서 안 된다고 하는데 더 조르기도 힘들었다.

똑똑똑.

“네.”

노크 소리가 들려도 윤권이는 더 이상 오버하지 않는다. 그냥 내 곁에서 조용히 문 앞을 주시한다.

“이야. 마 대리. 팔자 좋은가 봐. 얼굴이 포동포동 살이 올랐어.”

문이 열리자 조기훈 팀장님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병실로 들어오셨다.

“어라. 팀장님. 낮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그냥 갑자기 마 대리가 보고 싶지 않겠어? 그래서 배 째라 하고 놀러 온 거야. 고맙지?”

“에이. 팀장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솔직히 말씀하세요. 무슨 할 말 때문에 오신 거예요?”

“하핫. 역시 우리 마 대리는 눈치가 빨라. 필리핀 현지 파견.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네가 병원에 입원까지 한 상황이고, 납치까지 당한 사람을 곧바로 외국으로 보낸다는 게 너무 비인도적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건 환영할 일이죠. 솔직히 더운 필리핀까지 가서 고생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왠지 그게 끝이 아닐 것 같습니다.”

내가 필리판 가기 싫어하는 건 우리 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니 필리핀을 안 가도 되는 선에서 끝났다면 팀장님이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

“그래. 숨겨서 뭐하냐? 회사 윗분들은 이번 납치 사건 때문에 마 대리가 회사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생각해. 내가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더라. 망령난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사고 난 자동차 트렁크에서 납치된 사람이 발견되었다. 기자들이라면 흥미를 가지고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대기업 직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기레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동지그룹 마케팅부에서 일하는 A모씨가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

[대리급 직원이 왜 납치를 당했나? 회사 내부의 갈등 때문?]

[동지그룹 삼 형제의 권력 쟁투가 시작되었나? 유능한 대리급 직원 납치 당해.]

이딴 자극적인 기사로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고, 덕분에 한동안 동지그룹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보수적인 윗사람들 눈에는 그런 상황이 당연히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들은 직원이 위험에 처했던 상황보다, 회사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더 신경 쓰였을 족속이니까 말이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군요. 게다가 필리핀 프로젝트는 최소한 과장이나 대리급이 선봉장을 서야 하는데, 저 말고는 경력이 되는 사람이 전부 여자라서 보내기 애매했을 테고요. 누굽니까? 저 대신 들어온 사람이.”

“권희태 과장.”

“헐. 꽤 거물이 들어왔네요. 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 건가요? 하하하.”

권희태 과장. 올해로 나이 36세. 동지에 입사한지 10년 된 베테랑 마테팅 직원이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이기적 대리와 입사 동기지만, 과장을 단지는 꽤 되었다. 그만큼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고정호 전무(우리 회장님의 첫째 아들이다.)의 신임을 상당히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조만간 팀장으로 승진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이번 프로젝트에 꽂아넣은 것을 보니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거물이 아니라 뻐꾸기 한 마리를 집어넣은 거지.”

뻐꾸기는 다른 종류의 새 둥지에 알을 낳아 새끼를 대신 키우게 한다. 이것을 ‘탁란’이라고 하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야비하다.

뻐꾸기는 숙주가 될 새 둥지에 몰래 알을 낳는다. 그리고 다른 알보다 먼저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다른 알을 밖으로 밀어낸다. 숙주 새는 뻐꾸기 새끼가 자기 새끼인 줄 알고 정성껏 기른다. 이게 바로 탁란이다.

팀장님은 지금 그 이야기를 비유한 것이다. 팀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권희태 과장이 우리 팀에 들어왔다. 그는 첫째 대군의 신임을 잔뜩 받고 있다. 이번 필리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팀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연줄이 없는 우리 팀장님은 다른 팀으로 쫓겨나고 권희태 과장이 팀의 새로운 팀장으로 발령받을 수도 있다.

대충 이런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그리고 팀장님도 이미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신 것 같다.

“그런데 뻐꾸기인 줄 알면서도 밖으로 버리질 못하는 게 문제군요.”

“그렇지.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내 탓. 성공하면 귄희태 과장의 공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야. 에잇. 연줄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우리 팀장님이 갑자기 불쌍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그래도 팀에서 쫓겨나는 저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축하해. 과장으로 승진이야.”

젠장. 결국, 이런 식으로 사람을 엿 먹이는구나. 과장 승진? 지금 내 경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과장으로 승진을 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 계열사로 내려가면 된다. 쉽게 말해 본사 대리는 계열사 과장급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말은 승진이지만 좌천에 가깝다.

“어디 계열사입니까?”

“마트.”

“네? 지금 마트라고 하셨어요? 동지마트요?”

빌어먹을!

나는 그렇게 어이없게 과장으로 승진했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장애물이 생겼지만 주인공이니 뛰어넘겠죠?

항상 말씀드리지만 저는 권선징악과 해피앤딩을 좋아합니다.

주인공의 좌천을 너무 억지스럽게 생각하진 말아주세요. 직원이 사회면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것에 대해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 대기업 여럿 있습니다. 이혼경력마저도 승진에 결격사유로 생각하는 곳이 많은데, 납치사건은 이혼과는 비교가 안 될정도로 큰일입니다.

그리고 윗선들의 생각이 보통 고리타분하지 않습니까? 성폭행당하면, '여자가 행실을 어떻게 했길래 그런 일을 당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랜만에 쿠폰이 좀 들어와서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연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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