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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69화 (169/424)

00169  소제목 추후 결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동수 형님. 처음뵙겠습니다. 저는 상수 형님 대학 후배이자 동수 형님의 근접 경호를 맡게 될 성윤권이라고 합니다. 키는 194cm이고 몸무게는 112kg이며 신발사이즈는 310mm입니다.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의 형님을 모시게 되어서 대단히 영광입니다.”

갑작스레 들어와 꾸벅 인사를 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사내. 나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로 작은 몸집은 아닌데, 나보다 키가 10cm 가까이 크고, 몸무게는 30kg 정도 더 나가는 엄청난 덩치를 마주하고 보니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일반 병실보다 몇 배는 넓은 VIP병실이 비좁은 느낌을 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와. 크다.”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과일을 먹여주던 시연이도 상대의 덩치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별말도 아닌데 괜히 질투가 났다. 사랑에 빠지면 남자는 애가 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요즘 시연이는 꼭두새벽부터 병실에 와서 밤늦게까지 나랑 놀아주거나 혹은 간호해주고 집으로 돌아간다. 팔다리가 다친 것도 아니고 기껏 머리 몇 바늘 꿰맨 건데, 중환자 취급을 하며 밥도 떠먹어주고 과일이나 물도 먹여준다.

물을 먹여 줄 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컵으로 물을 먹여주는 게 뭐가 그리 행복하냐고?

쯧쯧쯧. 빈곤한 상상력 같으니라고.

컵 따위로 물을 먹여준다면 내가 행복할 이유가 없다. 물을 먹을 땐 컵은커녕 손도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오직 입! 무조건 마우스 투 마우스다. 물을 먹을 때마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느낄 수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입으로 물을 먹여 달라는 나의 짓궂은 요구에 처음에는 당황하는 모습이었으나, 요즘은 시연이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는 물뿐만 아니라 주스나 요거트를 먹을 때도 입을 애용하고 있다. 안 먹어도 될 음료들을 그녀의 입술을 느끼기 위해 자꾸 먹다 보니 평소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불편함이다.

보호자 놀이에 재미를 붙인 그녀가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는 바람에 거절하느라 진땀 꽤나 흘렸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라고 해도, 소변보는 모습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다.

어쨌든, 시연이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챙겨주니 내가 자꾸 응석받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단지 덩치가 크다고 감탄하는 것만으로 질투할 정도로 말이다.

“음. 성윤권씨라고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동수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형님. 제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님의 형님에게 어떻게 존대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울림통이 커서 그런지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병실의 창문이 잘게 흔들렸다. 큰 덩치와 잘 어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갑자기 심술이 났다. 남자들은 자기보다 한 뼘 정도 큰 상대를 만나면 보통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순수하게 감탄하거나, 주눅이 들거나, 반발심이 생기거나.

순수하게 감탄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주눅이 든 사람은 열등감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반발심이 생기는 사람은 나처럼 심술이 많은 인간이다. 한 마디로 못난 인간이다.

나도 이런 나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고칠 생각은 전혀 없다. 대인배, 군자, 선비 이런 사람을 존경은 하지만 그들을 닮고 싶지는 않다. 손해 봐도 바보처럼 허허 웃는 그들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자기 합리화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손해 보지 않고 적당히 잇속을 챙기려는 내 성격이 나는 마음에 든다.

이 못난 심술에 시연이로 인한 질투심까지 더해지자, 눈앞의 윤권이 녀석을 괴롭히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내 안에 숨어 있는 가학성 변태 DNA가 발동한 것이다.

“그래. 그럼 말을 편하게 할게. 그런데 여긴 병원이니까 다른 환자들을 생각해서 목소리를 좀 낮춰줬으면 좋겠는데.”

“분부 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뭔가 말투가 사극에 나오는 장수의 느낌이다. 오호. 이러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윤권이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큰 덩치 때문에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자세히 보니 순박한 느낌이다.

덩치가 크고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쫄 필요는 없다. 녀석이 존경한다는 상수의 친형이 바로 나 아닌가! 내가 좀 괴롭힌다고 설마 때리고 그러기야 하려고? 그런 자신감이 생기자 윤권이가 귀엽기까지 했다.

“저기 혹시 사과 좀 드시겠어요?”

어떻게 괴롭힐까 고민하고 있는데, 시연이가 조심스레 과일 접시를 내놓는다.

‘흠흠. 시연아 미안하지만 네가 깎은 사과는 다른 사람 먹으라고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모양이 아니거든.’

속마음은 이랬지만 그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풉. 크흠. 크흠. 크흐흠.”

그런데 윤권이 녀석이 접시를 보자마자 그 위에 놓인 사과 모양이 어이가 없었는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는 눈치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정성스레 깎은 사과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웬만하면 역정을 내겠지만, 사과의 모양이 웬만하지가 않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 시연이. 신비롭기까지 한 아름다운 얼굴에 몸매까지 예술의 경지에 이른 그야말로 퍼펙트할 것 같은 그녀. 하지만 신은 역시 공평하다. 완벽할 것만 같은 그녀에게 최악의 노래 실력과 경악(?)할만한 음식 솜씨를 주셨으니 말이다.

그래도 과일은 다행이다. 아무리 괴발개발 이상한 모양으로 깎아놔도 과일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윤권이 녀석에게 시연이의 음식솜씨를 맛볼 기회를 주리라.

어쨌든 나는 껀수(?)를 잡았다. 몸은 멀쩡한데 병원에서 퇴원 허락을 안 해줘서 요즘 내가 좀 따분했는데. 잘 걸렸다, 요 녀석!

“어라. 웃네. 시연아. 윤권이 저 친구, 네가 깎은 사과를 보고 웃었어. 설마 비웃는 건가?”

“진짜요? 죄송해요. 솔직히 제가 봐도 사과 모양이 엉망이긴 해요. 손님이 왔으니 대접부터 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과 모양은 생각도 못 했어요. 히잉.”

“아, 아닙니다. 절대 비웃은 게 아닙니다. 그냥 공기가 건조해서 헛기침이 나왔습니다. 크흠. 크흠. 크흐흠.”

“뭐? 공기가 건조해? 윤권아. 초면에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설마 네 눈이 동태 눈깔은 아니겠지? 그럼 곤란한데. 다른 것도 아니고 보디가드로 온 녀석이 눈썰미가 없어서야...”

“네? 아닙니다. 형님. 제 눈은 절대 이상이 없습니다. 좌우 양쪽 모두 2.0의 시력입니다.”

“그런데 이 방에서 맹렬히 돌아가고 있는 가습기 세 대가 안 보인단 말이야? 병실이 넓다고 너의 존경하는 선배님인 상수가 저지른 만행이란다. 게다가 화분도 다섯 개나 있어. 보여 안 보여?”

“보입니다.”

“보이지? 그런데도 이 방이 건조할 것 같아?”

“그, 그게. 그, 그러니까.”

“난 솔직한 사람이 좋아. 특히 앞으로 나와 계속 밀착해서 다녀야 할 사람이라면 더더욱 정직했으면 좋겠고 말이야.”

“혀, 형님. 억울합니다. 전 정말 숨기는 게 없는 정직한 남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그냥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러니까 방이 건조해서 헛기침을 한 게 아니다?”

속으로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근엄한 척 얼굴을 굳혔다. 나의 계속된 추궁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녀석은, 갑자기 시연이 앞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했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못 깎은 사과는 제가 처음 봐서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정말 발로 깎아도 이것보다는 잘 깎을 것 같다는... 헙. 아니, 그러니까 그게. 형수님. 제 말은 그러니까...”

‘발로 깎아도 이것보다는 잘 깎을 것 같다’는 말에 나는 근엄한 표정을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하하하. 너 맘에 든다. 성윤권 합격.”

정말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었다. 난 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우직한 모습도 보기 좋았고,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순진함도 기꺼웠다.

“네?”

“그냥 윤권이 너 마음에 든다고. 실력이야 동생 녀석이 보증했으니 괜찮지 않겠어? 내가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한번 잘해보자.”

“감사합니다. 형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윤권아.”

“네. 형님.”

“그놈의 형님이라는 말 안 쓸 수 없냐? 지금이야 병실이니 괜찮다 쳐도 나중에 같이 일할 때를 생각해봐. 우리 덩치에 ‘형님’ 어쩌고 하면 사람들이 조폭이라고 오해해.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이제 제가 모셔야 할 분이니까 보스라고 부를까요?”

“끄응. 보스나 형님이나 도찐 개찐이지. 그냥 동수 형이라고 불러.”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분인데 ‘형’이라고 가볍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냥 보스라고 부르게 해주십시오.”

주윤발 형님이 나오는 홍콩 누아르 액션을 보고 자랐던 세대라 그런지 보스라는 말에 살짝 혹하긴 했다. 하지만 저 큰 덩치가 우렁찬 목소리로 ‘보스’라고 부르는 상상을 하니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조금은 정색하며 말했다.

“두말 안 한다. 그냥 동수 형이라고 불러라.”

“분부 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또 나왔다. 저놈의 고루한 말투. 확실히 특이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그래. 분부야. 그러니까 형님, 보스 이런 말 쓰지 마. 아차차. 나랑 밀착해서 다닐 녀석이면 우리 시연이 의견도 중요한데. 시연아, 저 녀석 어때?”

“저도 마음에 들어요.”

“으잉? 왜? 아까 네가 깎은 사과를 보고 발로 깎아도 그것보단 잘 깎을 거라고 악담을 한 녀석인데.”

“보스! 아니. 동수 형. 아까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그래. 실수겠지. 하지만 그게 네 속마음이기도 했잖아.”

“읔. 형수님.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이참. 동수씨. 그만 좀 괴롭히세요. 윤권 오라버니가 불쌍해 보여요.”

“그럴까? 그런데 시연아. 윤권이가 왜 마음에 드는지는 말 안 해줬어. 설마 나보다 더 곰 같이 생겼다고 한눈에 반한 건 아니지?”

“어머. 동수씨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무슨. 크흠.”

그래. 질투다. 시연이의 이상형이 곰 같은 남자인데 나보다 더 곰 같은 녀석이 나타났으니 위기감이 느껴질 수밖에!

“사실은요. 저보고 형수님이라고 불렀잖아요. 히히”

시연이는 부끄러운지 귓속말로 그렇게 속삭였다.

“그 말이 그렇게 좋아?”

“그럼요. 그런 말을 들으면 제가 벌써 동수씨 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어쩜 말을 해도 저렇게 이쁘게 할까?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나이까지 어린 시연이가 나와 약혼했을 리가 없다.

============================ 작품 후기 ============================

연재 다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소소한 이야기였다면 지금부터는 약간 스케일을 키울 생각입니다. 2부나 외전 격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겁니다. 사실 원래 제 계획은 두 사람이 약혼하는 시점에서 완결 지을 생각이었으니까요.

이런 변화를 독자님들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해외진출과 경영권 다툼까지 벌어질 미래 상황에서 계속 소소한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기는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제가 연중했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딜레마때문이었습니다.

소소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해놓곤, 스케일이 점점 커지자 부담을 느껴졌거든요. 그렇다고 엄청 뻥튀기가 되고 그렇진 않을 겁니다. ‘형이 가라사대’를 읽으신 분은 눈치채셨겠지만 스케일이 큰 이야기에 제가 좀 약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키우기보다 상대할 적이 조금 더 거대해지고, 약간의 활극이 추가되는 선에서 스토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어쨌든 완결까지 꾸준히 써보겠습니다.

잠시 후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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