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6 뿌린 대로 거두는 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이채향의 원룸.
탕탕.
“이채향씨. 문 좀 열어주세요. 저는 동지호텔이 아니라 동지그룹 본사에서 조사를 위해 나온 김수현 대리라고 합니다.”
수현이 30분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문을 두들기며 설득을 했지만, 채향이 살고 있는 원룸의 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뭐라고 진실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옆집 사람이 들을까봐 조심스러웠다.
“제가 무작정 여기 온 것은 아니에요. 이미 어느 정도 조사가 끝난 상태입니다.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채향씨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제발 용기를 내주세요. 채향씨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이야기 좀 해요.”
1시간 가까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한 덕분에 수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채향씨가 안에 있는 거 알고 왔어요. 문 열어줄 때까지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이건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에요. 벌써 여러 명이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겠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네, 채향씨?”
덜컹.
이곳에 와서 설득을 시작한지 2시간 가까이 됐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 들어오세요.”
“네.”
수현이 들어오고 현관에 있던 자동센서 등이 꺼지자 방안은 어두컴컴해졌다.
“미안해요. 밝은 게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냥 아무데나 앉으세요.”
채향의 말에 수현은 벽을 더듬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문을 열어줘서.”
“수현씨라고 했나요?”
“네.”
“그냥 저 좀 내버려두면 안 돼요?”
“숨는다고 능사는 아니잖아요.”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얼마나 끔찍했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저는 몰라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요.”
방안에는 침묵이 잠시 흘렀다. 수현은 채향이 다시 입을 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요?”
“네.”
“누군지 알 수 있어요?”
수현은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동의도 없이 함부로 사실을 밝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군지는 말씀 못 드리겠어요. 하지만 제가 파악한 사람만 채향씨를 포함해서 5명이에요.”
“왜요? 거짓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재수 없는 년이 저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죠.”
“아니에요. 그분들도 채향씨와 비슷해요. 전화는 받지 않고, 집은 이사를 갔는지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대답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밝혀도 되는지 허락받지 못했어요. 제가 허락 없이 다른 피해자에게 채향씨 이야기를 한다면 채향씨도 불쾌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제가 꼭 듣고 싶다면요?”
“죄송해요. 그건 정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알겠어요.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저를 찾아 온 것은 아닌 모양이네요. 저 말고 네 명이나 더 있다고요?”
“네. 밝혀진 것만 그래요. 더 있을지도 모르고.”
“개... 개자식들. 찢어죽일 놈들. 어떻게, 어떻게... 흑흑.”
채향이 절규하듯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한참을 그렇게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지르다가,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수현은 채향의 돌발행동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서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천천히 다가가 채향의 얼굴을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요. 실컷 울어요. 속에 있는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울어요. 하나만 알아둬요. 이번 일은 절대 채향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후련하게 울고 다시 일어나요.”
“그놈들이. 그놈들이... 엉엉.”
수현의 품에 안긴 채향은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서럽게 울부짖었다. 눈물로 젖은 앞섶이 소나기라도 맞은 것처럼 흥건해졌다. 축축하게 베어든 눈물은 수현의 가슴을 타고 명치를 지나 배꼽으로 흘렀다. 채한 것도 아닌데 꽉 막힌 듯 아릿하던 명치가 시원해졌다. 채향의 뜨거운 눈물에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는 것은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에요. 자책하지 말아요. 채향씨는 착한 사람이에요.”
수현은 ‘당신은 착한사람이에요.’라는 말을 계속 되뇌며 위로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할 것 같았다. 통곡하는 것처럼 구슬프게 울던 채향의 떨림이 점점 잦아졌다.
“미... 미안해요. 제 행동이 좀 이상했죠?”
“아니에요. 전혀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미안할 것 없어요. 진정은 좀 됐어요?”
“글쎄요. 아직 정신이 멍하네요.”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
채향은 수현의 얼굴을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천천해 해도 돼요. 전 언제든 기다릴 수 있어요.”
“어쩌려고 그러는 거죠?”
“뭐를 어쩐다는 거죠?”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쩌려고요?”
“책임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 하나에요.”
“안 돼요!”
채향이 다급하게 반대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까도 말한 것처럼 채향씨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 숨으려고 하지 말아요. 나쁜 놈은 그놈들이잖아요.”
“혀... 협박받았어요.”
“어떤 협박이요?”
“여... 영상을 남겼어요. 신고하면 인터넷에 유포시켜버리겠데요.”
채향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얼굴은 수치심 때문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었다. 수현은 이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채향씨.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줄 수 있어요? 최소한 누가 그랬는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다른 방법으로라도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알아볼게요.”
잠시 망설이던 채향은 이내 결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건이 있던 그날도 채향은 평소와 다름없이 호텔에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최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제주 동지호텔의 헬스클럽 책임자인 도지광 팀장이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뭔가 상담할 것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채향은 별 생각없이 그가 있는 사무실에 갔다. 소파에 앉아 도 팀장이 주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다음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채향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꼽 아래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금방 자신이 실오라기 하니 걸치지 않고 낯선 곳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급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침대 맞은편의 TV에서 이상한 영상이 계속 상영되고 있는 발견한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의식을 잃은 채 알몸으로 침대위에 누워있던 자신을 두 남자가 차례로 덮치는 모습이었다. 정말 끔찍했다. 게다가 그 남자들은 채향도 아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도 팀장과 편철수 부지배인이었다. 분노보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옷이라도 있었으면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노력이라도 해봤을 텐데, 방안에는 몸을 가릴 수 있는 천조가리 하나도 없었다.
덜컹.
패닉에 가까운 두려움에 빠져있을 때 굳게 잠겨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도 팀장과 부지배인이 나타났다. 잔뜩 웅크리고 주저앉아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가려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두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또다시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온갖 욕설과 모욕을 하며 채향을 괴롭혔다. 항상 밝게 웃으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그렇게 헤프게 웃으니 이런 일을 당한다며 모든 원인을 그녀에게 떠넘겼다. 아니라고 발악하듯 대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침대 위에 올라와 무자비하게 능욕을 했다. 하루 종일 그런 일이 계속 되다보니 반항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멍하니 누워 그들이 하는 대로 이끌려 다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시 카메라로 촬영했다. 모멸감조차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쳐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들은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돌려주며 풀어주었다. 그리고 경찰에 알리면 자신이 당했던 끔찍한 모습들을 모두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넋을 잃고 집에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겨우 하루가 지났다. 최소한 일주일 넘게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하루였다. 욕실에 들어가 때수건으로 피가 나도록 몸을 벅벅 밀었다. 그러나 지독하고 끔찍했던 기억은 낙인처럼 그녀의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물만 겨우 마시며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어떤 삶의 의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채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장 출근하지 않으면 끔찍했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세상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피폐한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호텔로 출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며칠에 한 번은 고문과도 같은 고통이 반복되었다.
절망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는 호텔에는 더 이상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도 팀장을 찾아가 그만 놓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라며 대신 신고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녀를 조롱했다.
채향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수현은 할 말을 잊었다.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괴로운데, 당사자인 채향은 어땠을지 상상이 안 됐다.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또 어떤 고통이 그녀를 괴롭힐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짐승 같은 두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덩치 큰 남자와 만나셨죠?”
채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저를 이리로 데려왔어요. 아마 채향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에게 오늘 들은 이야기를 간략하게라도 해 줄 생각이에요. 괜찮겠어요?”
“...”
“걱정 말아요. 그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채향씨에게 어떤 피해도 가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저를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어요?”
그녀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채향은 평생 숨어서 살 것 같았다. 수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다시 설득했다. ‘평생 숨어 살 수는 없지 않느냐,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된다, 그런 금수만도 못한 놈들은 꼭 처벌을 받아야 한다.’라며 계속 설득을 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김 대리가 들어 간지 벌써 4시간이 지났다.
Rrrr
현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12시가 넘은 시간이니 걱정될 만도 했다.
“왜.”
“야, 인마. 12시가 넘었어. 대체 뭐하는 거야.”
“뭐하긴 일하지.”
“일을 왜 이렇게 오래 해?”
“우리 집에 모여 새벽까지 일한 적도 있다는 거 알잖아. 새삼스럽게 왜 이래?”
“그... 그래도 네 녀석이 우리 수현씨를 너무 부려먹는 것 같잖아.”
“미친놈. 내가 이야기했지. 김 대리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지금 누가 누구를 부려먹는다는 건지 모르겠네. 야야. 김 대리 온다. 금방 집에 갈 것 같으니까 그만 보채고 기다려.”
차에 앉아 정면을 주시하며 통화를 하고 있는데 김 대리가 원룸 건물 입구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그녀가 차로 돌아와 조수석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떻게 됐어요?”
“사실이었어요.”
“가해자가 누굽니까?”
“부지배인과 도 팀장 이렇게 두 명인 것 같아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5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신고도 못하고 숨어 지내는지 이야기 들은 것 있어요?”
“너무 끔찍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때부터 김 대리는 이채향씨가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이야기를 듣던 내 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릴 정도로 처참한 이야기였다. 대체 왜 그렇게 숨어 살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도 팀장이 주는 차를 먹고 정신을 잃었다고요?”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럼 단순한 수면제가 아니라는 이야긴데. 졸피뎀 같은 수면유도제를 이용하지 않고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거든요. 일반인은 구하기 힘든 것으로 아는데, 이거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네요.”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요. 궁리는 해봐야겠죠.”
김 대리는 뭔가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신고를 하면 그만인데 그러다 2차 피해가 발생한다면 이채향씨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하나 더 남기는 셈이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쓰다 다시 지우고, 쓰다 다시 지우고. 정말 고민 많이 했는데, 어떠실지 모르겠네요.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