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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34화 (134/424)

00134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의 사랑을 맹세하는 의미로 약혼반지를 서로의 손에 끼워주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시연이가 준비한 영상을 끝나자 반지교환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한 반지를 꺼냈다. 그녀의 손가락에 약혼 프러포즈 때 선물했던 웨딩밴드를 천천히 끼웠다. 그리고 시연이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이번에 새로 구입한 남성용 웨딩밴드를 내 손에 끼워줬다. 이렇게 반지를 나눠 끼니 꼭 결혼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낀 반지는 얼마 전에 시연이 어머님이 직접 선물해주신 것이다.

처음에는 반지를 끼는 게 익숙하지 않아 ‘저는 반지 필요 없습니다.’라고 했다가 ‘싱글인 척 하려고요, 마 서방?’이라고 하시는 시연이 어머님의 말씀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연이 어머님은 나와 시연이를 끌고 백화점의 명품매장에 들러 수천만 원짜리 웨딩밴드를 그 자리에서 구입하셨다. 그리고 커플 목걸이라고 하시면서 비슷한 모양의 남녀 목걸이까지 계산하신 다음 우리에게 넘기고 바람과 같이 사라지셨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한 시간 만에 모두 합쳐 1억이 넘는 돈이 사용됐다. 시연이 집안이야 준 재벌집안이라고 할 수 있으니 1억을 쓰시든 2억을 쓰시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그 돈의 대부분이 나를 위해 쓰였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시연이이게 값비싼 카메라를 약혼 선물로 받은 입장이라 더더욱 그랬다.

남자보다 여자가 돈을 더 많이 쓰면 왠지 부담스러운 느낌, 의도는 그게 아닌데 자꾸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 마초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살아오기를 그렇게 살아왔고, 이미 그런 삶에 익숙해져버렸다. ‘누가 많이 쓰면 어때?’라며 가식을 떨 수는 있어도,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찜찜함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얼굴을 붉히며 ‘당장 환불해.’라고 하면 더 초라해질 뿐이다. 꼭 열등감을 드러내는 꼴이라고 해야 하나? 내게 돈이 많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시연이 어머님께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언제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존심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허세일 수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그 말이 절실하게 와 닿을 때가 있다. 최근에 들어 내가 자신감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원인도 복권 당첨의 힘이 컸다.

어쨌든 우리는 반지를 나눠꼈고, 이제 윤시연은 공식적으로 나의 소유(?)가 되었다.

“두 사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반지를 교환했으면 사랑이 듬뿍 담긴 뜨거운 키스를 나누셔야죠. 설마 키스 안 해보셨습니까? 에이, 차라리 마동수가 사실은 여자였다는 말을 믿겠습니다. 하하하.”

저 녀석의 썰렁한 농담에 호응하는 사람은 여전히 시연이 친구들밖에 없었다. 키스 정도야 못할 것도 없었다. 나는 윤 사장님의 얼굴을 슬쩍 보고, 시연이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의 입맞춤을 기다렸다. 시연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들 앞에서 하는 키스니 많이 떨리는 것 같았다.

입술을 천천히 내려 그녀의 입술에 살짝 갖다 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5초를 세고 입술을 땠다. 짧지만 숨 막혔던 5초였다. 결혼식에 가면 가끔 신랑신부가 오버해서 진한 키스를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어른들도 계신 자리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5초만. 내가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모습이다. 그냥도 아니고 숱한 결혼식에 참석해 축의금까지 내면서 배운 비싼 경험이었다.

시연이와 키스를 나누고 케이크를 커팅 했다. 시연이 친구들이 나와서 예쁜 율동과 함께 축가도 불렀다. 이번 약혼식에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순서였다. 파릇파릇한 20살 아가씨들이 예쁘게 율동을 하니,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좋다고 입을 헤벌리며 열심히 박수를 쳤다. 여자 아이돌 가수가 군대 위문공연을 가면 이런 비슷한 분위기가 날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마동수군과 윤시연양의 소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현우의 저 말이 정말 반가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약혼식을 하는 것은 생각이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쁘신 와중에 여기까지 와서 저희의 약혼식을 축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개 같은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나의 과격한 표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표현이 이상한가요? 개는 참 좋은 동물인데, 안 좋은 의미로도 많이 쓰이죠. 말을 바꾸겠습니다. 제 이상형은 강아지 같은 여자입니다. 오늘 저와 약혼한 윤시연양이 바로 그런 사람이죠. 시연이는 한 마디로 그레이하운드 같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날씬한 몸과 쭉 뻗은 다리 그리고 귀여움. 그녀의 외모는 정말 그레이하운드와 많이 닮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시연이의 내면입니다. 의리 있고, 영리하며,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사람이 바로 윤시연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참 행운아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가도 만나지 못하는 자신의 이상형과 이렇게 약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이런 행운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도 시연이를 아끼고 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시연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저를 소개해야 할 것 같네요. 개 같은 여자 윤시연입니다.”

시연이의 위트 있는 인사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레이하운드를 닮았다는 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빠진 게 있네요.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용맹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동수씨를 처음보고 꽉 물었더니 오늘 같이 좋은 일이 생겼네요. 음, 제 이상형은 곰 같은 남자입니다. 누가 봐도 동수씨의 외모는 곰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속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알맹이는 여우와 더 닮았어요.”

여우? 그녀의 말에 내 친구들이 테이블을 두들기며 호응을 했다. ‘지금이라도 약혼 취소해요.’, ‘저 녀석의 마수에서 벗어날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라며 나를 놀리기까지 했다. 나쁜 놈들!

“취소라니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저는 속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곰처럼 듬직한 외모에 여우같은 현명함을 가진 남자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야 말로 정말 행운아 같습니다. 이상형을 만난 줄 알고 꽉 물었는데, 그 남자가 제가 생각했던 이상형보다 열 배는 더 멋진 남자였으니 말이죠. 앞으로도 예쁘게 사랑하겠습니다. 마동수씨! 사랑해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마치면서 양팔을 머리위에 올려 하트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도 창피한 것을 알았는지 금방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 앉았다. 시연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약혼식은 모두 끝났다.

◆ 약혼식이 열리는 레스토랑 주변

고장희는 오늘 동지랜드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유난히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예쁜 정원들은 알록달록한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방문객들은 저마다 연인의 손을 꼭 붙잡고 동지랜드 이곳저곳을 즐겁게 돌아다녔다. 그런 커플들이 보기 싫어 자리를 옮긴 곳에서는 하필 야외결혼식이 화려하게 열리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신랑신부를 보니 마음속에 숨겨뒀던, 형진이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이 몰려들었다. 결국 그녀는 충동을 이기지못하고 동수의 약혼식이 열린다는 약혼식장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휴. 약혼식은 이미 시작되었네.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내가 지금 약혼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확 들어가 버려? 아니지, 아니야. 그랬다간 약혼식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동수에게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기다리자. 끝날 때 얼굴만 살짝 보고 돌아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22살에 미국으로 가서 30살에 돌아왔다. 햇수로 9년이다. 그녀도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형진이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풋풋했던 20살 사랑의 추억은 타국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을 견디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힘들 때, 울적할 때, 괴로울 때, 짜증이 날 때마다 함께 했던 행복을 추억을 떠올리며 견디곤 하다 보니 여전히 그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형진이는 다르겠지만.

장희는 어린아이 키 높이의 화단에 걸터앉아 평소처럼 형진이와의 옛 추억을 떠올렸다. 헤실헤실 웃음이 났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따사로운 가을 햇볕까지 받다보니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져 자꾸 졸음이 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형진이 얼굴을 봐야하는데.’라며 졸음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정신없이 쏟아지는 졸음을 막을 길은 없었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궈졌다. 화단에 걸터앉은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떨어질 듯, 떨어질 듯 흔들리면서도, 용케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떠들썩해지는 주변 소리 때문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길바닥으로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엄마야.”

장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이쿠. 꼬마야, 여기서 장난을 치면 어떡해. 다칠 뻔 했잖아.”

다행히도 지나가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녀를 잡아줘서 길바닥에 널브러지는 창피는 모면할 수 있었다. 꼬마라는 말이 살짝 거슬렸으나 그 남자 덕분에 창피를 면했으니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좀 덜렁거리는 성격이라서. 호호호.”

장희는 꾸벅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 너... 장희 아니야?”

“뭐? 장희라고? 어디어디.”

“헉. 진짜 고장희네. 세상에, 난 저 녀석이 죽은 줄만 알았어. 살아 있었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작아진 것 같은데. 야! ‘꼬장’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디로 사라졌으며, 여긴 어떻게 나타난 거야?”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네. 와! 최강동안이다. 정말.”

“그러게 저렇게 입고 있으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른 살이 아니라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겠다. 어떻게 입는 옷도 여전히 유치찬란하냐.”

장희를 잡아줬던 남자가 바로 형진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많이 그리웠던 동기들인 현우, 정수, 태균, 재형이도 같이 있었다. 반가움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아직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동기들이 고마웠다.

“하하하... 얘들아 안녕. 오랜만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녀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형진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에 겁을 먹은 장희는 일단 튀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안녕.”

“야! 고장희 거기 안 서?”

장희가 도망을 치자 형진이가 고함을 치며 따라왔다. 그녀는 그 모습에 기겁을 하며 달리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짧은 다리의 장희는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았지만 작은 체형을 이용해 사람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장희는 꼭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장난기가 심했던 그녀는 항상 그를 곤경에 빠트렸고 그때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일어났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잠든 그의 손가락에 몰래 봉숭아물을 들이기도 했고, 그가 애지중지하는 구레나루가 지저분해보여서 가위로 다듬어준다는 핑계로 절반 이상을 날려먹은 적도 있었다. 그가 마시는 커피에 설탕 대신 소금을 타기도 했고, 여자후배와 문자를 주고받는 모습이 질투가 나서 모르는 척 휴대폰에 물을 쏟아버리기도 했었다.

“재들은 만나자마자 저러고 있냐?”

“그러게. 거의 9년 정도 됐지 않냐? 재들을 보니 여기가 대학 캠퍼스 같다.”

“설마 9년간 잠적한 것도 고장희의 장난질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형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다고. 나는 저 녀석이 군대에서 탈영이라도 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저게 장난이면 저년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야, 악마. 장난귀신이 붙은 악마.”

네 명의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맹렬한 추격전은 계속 되었다.

============================ 작품 후기 ============================

약혼식이 너무 길었죠? 다음 회는 일주일을 바로 건너뛰어 두 사람의 여행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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