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주말에는 내 목숨을 구해주신 우찬 형님을 만났다. 그 일이 있고 두 번 정도 만나 술을 마셨다. 이번에는 약혼식 초대도 할 겸, 처음으로 서로의 짝도 소개할 겸해서 커플로 만나기로 했다. 우찬 형님의 애인인 조연서씨의 직업 특성상 낮 시간으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두 남자는 강북에 살아도, 두 여자가 강남에 사니 약속 장소는 당연히 강남으로 정했다. 항상 막히는 강변북로를 포기하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녹사평으로 방면으로 해서 반포대교를 탔다.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자동차 유리문을 내렸다. 10월 중순이 되다보니 낮 시간이라고 해도 서늘한 느낌의 강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 조연서씨. 여기는 웬일이에요?”
음. 이건 좀 어색하다. 나는 오늘 조연서씨가 우찬 형님의 애인인 걸 몰랐던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 나야 고 이사 때문에 두 사람이 연인인 것은 알았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서글서글한 말솜씨 때문에 한때는 자주 가기도 했었지만, 다른 남자들처럼 추근거리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연서씨. 조연서씨 맞죠? 청담동 W bar에서 일하는.”
이건 너무 촐싹거리는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마동수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본분 같네요.”
윽, 이건 너무 느끼하다. 그리고 내가 OO출판사의 채은성도 아니고 이름까지 아는 사람 얼굴을 모르는 척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어, 조연서씨. 연서씨가 우찬 형님 애인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어요?”
좀 호들갑떠는 꼴이긴 한데, 이 정도 반응은 보여줘야 내가 정말 놀랐다는 느낌을 줄 것 같다. 결정! 나는 시연이 집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계속 중얼거리며 연습했다.
“똥수씨. 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얼굴이 야윈 것 같아요.”
“응? 똥수?”
“히히히. 곰인형인 똥수랑 헷갈렸네. 미안해요, 동수씨. 요즘 똥수를 동수씨라고 생각하고 밤마다 껴안고 자다보니 실수했어요.”
껴안고 자다니, 부러운 녀석. 곰인형 주제에 그런 호강을 다하다니! 아, 정말. 인형 따위에 질투하고 싶지 않은데 왜 갑자기 그 똥수라는 녀석이 부러울까?
“털이 날리지는 않고?”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곰인형의 약점을 공략했다.
“그럼요. 동수씨가 선물 한 다음날 욕실에서 울샴푸로 깨끗하게 씻겨줬어요. 물을 먹어서 옮기느라 고생은 했지만, 햇볕에 말리고 나니 뽀송뽀송한 게 안고 있기 더 좋아진 것 있죠.”
시... 시연이가 똥수 목욕까지 시켜줬단 말인가? 아! 이건 진정 나의 패배다. 부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나중에 시연이와 결혼하면 그놈부터 폐기처분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매일 안고 자면 3년쯤 지나서는 너덜너덜해지겠다. 그치?”
“관리 잘해주면 괜찮아요. 나중에 솜이 죽으면 솜 교환하고, 옆구리라도 터지면 기워주면 되죠. 동수씨가 사준 선물이잖아요. 오래오래 사용할거니 염려마세요. 헤헤.”
이것으로 똥수는 수명연장의 꿈을 이뤘다. 운도 좋은 녀석. 나는 시연이와 함께 약속 장소인 신사동의 가로수길로 차를 몰았다. 말은 가로수길이라고 해도 가로수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며 아름답게 자리 잡은 곳은 아니다. 막상 가보면 가로수길을 가보면 생각보다 볼품없는 가로수에 실망하기도 한다. 단지, 연인들이나 젊은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예쁜 가게들이 많아 유명할 뿐이다.
“동수야! 여기다.”
“어, 우찬 형님. 벌써 도착했어요?”
근처에 있는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속장소로 가자 우찬 형님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셨다.
‘어, 조연서씨. 연서씨가 우찬 형님 애인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 있어요?’
나는 아까 연습했던 대사를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며, 반가운 미소를 지은 채 우찬 형님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조연서씨가 먼저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겼다.
“안녕하세요. 동수씨. 오랜만에 뵙네요. 우찬씨에게 이름은 들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정말 우리 bard에 종종 오셨던 그 마동수씨네요. 호호호.”
“연서씨. 오랜만이네요. 연서씨가 우찬 형님 애인이셨어요? 우찬 형님.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연서씨가 형수님이라니요.”
“뭐가 말이 안 돼?”
“형님에게 이런 미인인 형수님이라니요. 이건 정말 ‘미녀와 야수’라고 할 수 있죠. 하하하.”
이 정도 상황변화에 당황할 정도로 내 내공이 얕지는 않다. 나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얼씨구. 그러는 너는? 곰탱이처럼 생겨서 어떻게 저런 엄청난 미녀를 만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백우찬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동수씨 예비 약혼녀인 윤시연이라고 합니다.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동수씨 생명의 은인이면 제게도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시연이는 우찬 형님의 통성명에 갑자기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 모습이 내겐 정말 감동적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다는 느낌. 내가 그녀에게 주고 싶은 마은인데, 항상 나만 받는 것 같아 미안했다. 시연이의 인사에 우찬 형님은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이쿠. 이렇게 인사 받을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냥 사고 때문에 징계 먹기 싫어서 나섰을 뿐입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니요. 이거 참 부끄럽네요. 하하.”
“와, 우찬씨. 이런 예쁜 아가씨의 생명의 은인이 되고 갑자기 질투가 나려고 하네요. 호호호. 안녕하세요, 예쁜 아가씨. 저는 조연서이라고 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나올 줄 알았으면 외모에 좀 더 신경 쓸걸 그랬어요.”
“아니에요. 저야 말로 언니가 너무너무 예뻐서 눈을 땔 수가 없었어요. 속으로 ‘와, 연예인을 만나면 이런 느낌이 들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까요. 어떻게 이렇게 멋지면서도 아름다울 수가 있어요?”
서로 예쁘다고 칭찬하고 있는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정말 눈꼴시럽다고 짜증을 부렸을지 모른다. 어마어마한 미인 두 명이 서로의 얼굴이 예쁘다고 치켜세워주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가죽부츠와 까만 타이즈에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자주색 니트를 입고 목에 머플러로 포인트를 준 조연서씨의 모습은 가을향이 물씬 풍기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는 블랙 위에는 화이트인 투톤 원피스를 입고 그레이 계통의 트위드 재킷을 걸친 시연이는 싱그러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지나가는 사람은 남녀 불문하고 한 번씩은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자자. 아름다운 여성 두 분이 서로 예쁘다고 칭찬하면 다른 사람들이 욕해요. 어서 점심이나 하러 갑시다.”
가만 놔두면 계속 서로에 대한 칭찬만 할 것 같아서, 내가 끼어들어 대화를 끊고 미리 예약해둔 가로수길 맛집 ‘킹콩스테이크’로 자리를 이동했다. 킹콩스테이크라고 해서 뭔가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를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도 점심인 경우 만 5천원인 가격을 생각하면 스테이크 치고는 가격 대비 맛이 훌륭한 편이었다.
“... 그런데 갑자기 동수 저 녀석이 잠시만 전화를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난간에 서서 말이죠. 우리는 그냥 지켜봤는데 잠시 후 갑자기 만세를 부르더니 휘청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아차 싶어 몸을 날렸죠. 휴.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요. 혼자서는 무거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다른 사람들까지 붙어서 힘들게 올렸더니, 글쎄 다짜고짜 내 품에 안겨서는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라고 하잖아요. 저보다 덩치 큰 녀석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하는데 얼마나 징그럽고 남사스럽던지. 하하하.”
“에이, 그래도 형님은 너무 하셨어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고맙다고 하는데, 남자가 안기면 사절이라면서 억지로 떨어뜨려 놓는 게 어디 있어요?”
“어머, 그럼 우찬씨. 여자가 안겼으면 괜찮다는 말이에요. 지금?”
“응?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 말이 그렇다는 거지. 여자든 남자든 내 품은 온전히 연서 네 것이니까 염려놓으라고. 흠흠.”
윽. 상남자로 알았던 우찬 형님에게서 저런 닭살스러운 행각을 보다니. 맛있게 먹었던 스테이크가 목구멍을 통해 다시 올라오려고 했다.
“세상에. 형님이 이렇게 애교쟁이 일 줄은 몰랐네요.”
“흥. 10살이나 차이나는 녀석이 말은? 도둑놈 같으니라고.”
“우와. 형님도 9살 차이잖아요. 오십 보 백 보죠.”
“그래도 우리는 한 자리 차이잖아. 엄연히 달라.”
“네네. 도둑놈은 그냥 입 다물겠습니다.”
“그런데 약혼식을 왜 이렇게 빨리 해? 제수씨 나이도 어린데.”
“너무 예뻐서 그렇죠. 누가 채가면 어떡해요? 미리 임자 있다고 밝혀야죠.”
쩝. 이 말을 하고 보니, 내가 우찬 형님에게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괴수 옆에 미녀, 곰탱이 옆에 미녀. 확실히 우리 두 남자는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식사를 마치고, 도산공원에 있는 ‘세시셀라’라는 와플 전문점에 가서 와플을 디저트 삼아 먹으며 남은 수다를 떤 다음 약혼식에서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동수씨!”
우찬 형님과 연서씨를 보내고 시연이와 남은 데이트를 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응? 왜 그렇게 정색하면서 불러?”
“연서 언니 말이에요. 그 언니가 일하는 bar에는 왜 그렇게 자주 갔어요?”
역시, 여자의 촉감은 정말 불가사의 한 힘이 있는 것 같다. 위기다. 그리고 이 위기를 넘어가려면 다른 희생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거? 재형이 알지?”
“그럼요. 재형 오라버니가 왜요?”
“재형이가 연서씨에게 약간 관심이 있었거든. 시연이 너보다는 못하지만 꽤 매력 있는 얼굴이잖아? 혼자가기 쑥스럽다고 해서 몇 번 같이 갔어. 그게 다야.”
“제... 제가 연서 언니보다 더 예뻐요?”
시연이의 반응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여자 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가 예쁘다고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예쁜 사람을 보고 안 예쁘다고 하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럴 때는 그냥 너보다는 못하다는 말을 강조해주면 별탈이 생기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연서씨에게 약간의 흑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다.
“그럼. ‘더’가 아니라 ‘훨씬’ 예뻐.”
“정말이요? 히히히. 아니다. 이렇게 웃으면 안 된다. 아까 연서 언니가 ‘호호호’라고 웃는데, 정말 우아해 보이더라고요. 언니를 보니 그동안 저는 너무 철부지 같이 웃은 것 같아서 반성했어요. 그래서 저도 이제 ‘호호호’라고 웃으려고요.”
안 된다. ‘히히히’는 시연이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웃음이다. 내가 그녀의 ‘히히히’라는 웃음에 얼마나 힘을 얻었는데, 이럴 수는 없다.
“그냥 ‘히히히’라고 웃으면 안 돼? 나는 그 웃음이 훨씬 정겹고 좋은데.”
“동수씨 눈에는 내가 더 예뻐 보여서 다행이지만, 솔직히 여자 입장에서는 연서 언니가 훨씬 예버 보여요. 제가 꿈꾸던 여성스러움의 교과서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계속 연서 언니 모습만 바라보면서 공부했어요. 나도 저 언니처럼 멋진 여자가 되겠다고요. 그러니 동수씨가 이해해주세요. 호호호.”
어쩐지 계속 연서씨를 바라본다고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뭐, 시연이가 방금 웃는 모습을 보니 ‘호호호’라고 웃어도 여전히 사랑스럽기는 하다. 지금은 어색하게 웃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여기서 더 성숙하고 우아한 여성으로 변하는 시연이의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웃음이 연습으로 고쳐지는 건가?”
“그럼요! 저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동수씨.”
“응?”
“정말 재형 오빠가 관심을 가져서 따라간 것 맞죠? 혼자 간 적은 없죠?”
“그러엄. 당연하지. 내가 그 녀석 때문에 밤마다 불려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절대로 나 혼자 간 적 없으니 믿어주세요. 윤시연양.”
내가 그곳에 갔을 때는 항상 재형이가 있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나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과장되게 두들기며 장담을 했다. 시연이는 내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슬며시 웃으며 다시 웃음 연습에 들어갔다. 휴, 약혼식을 앞두고 왜 이렇게 험난한 일이 자꾸 생기는지. 어서 남은 6일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그리고 약혼식 당일 아침이 밝아왔다.
============================ 작품 후기 ============================
지금 올리면 자정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일단 올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