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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27화 (127/424)

00127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약혼식 준비는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가 고른 사진을 넣은 후드티도 주문했고, 약혼식을 위해 강남에 있는 레스토랑의 작은 홀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시연이는 약혼식장을 꾸밀 디자인과 약혼 당일 상영할 슬라이드 쇼를 만든다고 신이 났다. 나는 약혼식 다음 주에 같이 갈 여행준비와 그날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몸을 만들기 위해 신이 났다.

“저기 시연아.”

“왜 그래요, 동수씨?”

“저기 있잖아. 100일 기념일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아, 그... 그거요? 그... 그럼요.”

‘약혼식이 끝나면 널 가질 거야.’ 윽, 내가 어떻게 저런 말을 했는지 나도 신기했다. 내 물음에 시연이는 수줍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약혼식이 끝난 다음 주에 여행을 갈 생각이거든.”

“그... 그래요? 어디로요?”

“강원도 쪽으로 가려고.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약혼을 했다고 해도, 부모님께 함께 여행을 가겠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잖아.”

“그... 그건 그렇죠. 히잉. 그럼 어떡하죠?”

말을 하고 있는 나나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연이나 수줍기는 매한가지였다.

“시험도 끝났으니, 이제 MT가 자주 있을 것 같거든.”

“아, MT간다고 하면 되겠구나. 히히. 동수씨는 정말 똑똑한 것 같아요.”

‘윤 사장님 그리고 시연이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시연이에게 절대 MT간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MT가 자주 있을 것 같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용서하세요.’

왠지 양심에 콕콕 찔리는 이야기라 마음속으로라도 시연이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 어쨌든, 다행히 그녀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흐흐. 왜 갑자기 이런 음흉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약혼식이 2주 앞으로 다가왔을 때 고향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셨다. 약혼식이라고 해도 부모님끼리 서로 얼굴은 한 번 봐야 했다. 정년퇴임이 3년도 남지 않으셨지만 여전히 교대근무를 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이번 주에 겨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교대 근무라고 해도 주 5일 근무는 맞다. 그런데 계산법이 조금 애매하다. 4조 3교대를 하시는데, 이틀을 쉰다고 해도 오전조, 오후조, 야근조에 따라 시간 차이가 나서 주말이 휴일인 경우가 자주 있는 편은 아니다. 나이도 있으시고 해서 교대근무는 그만두고 상주(교대근무의 반대말)근무를 하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과 다르게 일에 대한 사명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계셔서 나나 동생도 몇 번 설득을 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일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 주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고향에서 살던 20년 동안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주지 못하신 적은 외숙모의 산후조리 때문에 며칠 자리를 비운 것을 제외하면 한 번도 없으셨다. 여성스러우신 분이었다면 모를까 여장부 같은 기질이 있으신 우리 어머니께서 그러신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참 신기했다. 그래서 나도 한 때는 우리 어머니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면 장가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금방 생각을 바꿔먹었지만 말이다.

“아버님,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호호호. 우리 예쁜 애기도 잘 있었나?

“네, 어머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랬나? 근데 니는 어째 지난 번 보다 더 이뻐진 것 같노? 안 그래도 이쁜아가 여기서 더 이뻐지면 남자들이 줄줄 따라 댕길 텐데 큰일이네.”

“제가 더 예뻐졌어요? 요즘 동수씨가 너무 잘해줘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저는 동수씨밖에 없어요. 평생 껌딱지처럼 붙어 다닐 거예요. 히히.”

“뭐처럼? 껌딱지? 호호호.”

시연이와 함께 서울역에 부모님 마중을 나가자, 그녀는 어머니께 팔짱을 끼고 정말 귀엽게 애교를 부리며 수다를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정말 여자를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어머니. 바로 식사하러 가야할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피곤하기는. 기차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도착하는 일인데. 걱정하지 말고 어서 앞장서라, 동수야.”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약속 장소인 ‘삼청각’으로 이동했다. 삼청각은 군사정부시절 요정으로 애용되던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새롭게 단장해, 고급 한정식 식당으로 탈바꿈한 덕분에, 상견례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삼청각에 도착해서 예약된 룸으로 가니 시연이 부모님은 이미 기다리고 계셨다.

“안녕하십니까. 동수 애비 되는 마영일이라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윤승태라고 합니다. 저희가 포항에 내려가서 뵀어야 했는데 실례를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야 말로, 이렇게 어리고 예쁜 따님이 부족한 우리 아들 녀석과 약혼하게 돼서, 염치가 없습니다.”

“부족하다니요. 얼마나 듬직한 친구인데요. 회사에서도 많이 인정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일에도 도움을 받아서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나보고 듬직하다고 하시지만, 윤 사장님이 오늘처럼 듬직하게 행동하시는 것은 처음 봤다. 어쨌든, 남자들끼리는 이렇게 격식 있는 인사를 나눴다.

“어머, 사부인. 시연이가 왜 이렇게 곱나 했더니 이게 전부 사부인을 닮아서 그런 거였네요. 호호호.”

“별 말씀을 다하세요, 사부인 키가 훤칠하신 것을 보니, 마 서방이 엄마를 닮았네요. 저렇게 듬직한 아들을 두셔서 얼마나 든든하시겠어요. 호호호.”

“에이, 말썽만 피우는 아들보다야 애교 많은 딸이 훨씬 좋죠. 시연이가 너무 애교도 잘 부리고, 예뻐서 동수랑 이어주지 말고 제 딸로 삼고 싶었다니까요.”

“철부지 딸을 그렇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직 많이 부족해요.”

“부족하다니요. 그런 말씀 절대로 하지마세요. 지 동생이 먼저 장가를 갔는데도, 결혼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저런 미련 곰탱이 같은 녀석을 뭐가 좋다고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시연이는 고마운 은인과 다름없어요.

“미련 곰탱이라니요. 호호호. 저는 항상 마 서방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데요.”

아, 미련 곰탱이라니.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시연이 어머님 앞에서 아들을 망신을 주시나! 그런데 50대 초반인 우리 어머니는 원래 나이처럼 보이시는데, 시연이 어머님은 30대로 보이시니 꼭 이모와 조카정도로 보였다. 왠지 가슴이 아프다. 이번에 내려가시기 전에 백화점으로 모시고 가서 좋은 화장품이라도 사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나오자 식사를 시작했다. 고급 한정식 집이라 뭔가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음식은 좀 실망스러웠다.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서양식처럼 너무 코스처럼 나오는 게 문제였다. 죽과 물김치야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계절요리, 대하채, 어선, 전복 불고기, 꽃등심, 관자구이, 전유어, 생선구이, 갈비구이까지 나왔는데도 밥은 나오지 않았다. 한식이라는 것 자체가 밥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법인데,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요.”

“네, 손님.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밥은 안 줍니까?”

“식사는 요리를 다 드신 후에 나옵니다, 손님. 갈비구이까지 다 드시면 그때 연어비빔밥이 나오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습니다. 한식을 먹는데 밥이 없으면 이걸 우에 먹습니까? 짭조름한 음식만 계속 먹었더니 밥 생각이 나서 더 먹을 수가 없어요. 그냥 밥 한 공기 주소. 당신도 좀 허전하지요? 사돈하고 사부인은 괜찮습니까? 이따 밥이 나온다고 하니 세 공기 시켜서 반씩 나눠 먹으면 되겠네요. 여기 밥 세 공기 주소.”

결국 터프하신 우리 어머니께서 나서셨다. 밥 없이 요리로만 먹는 한식이라니, 삼겹살이나 소고기를 먹을 때도 밥이 꼭 있어야 하는 우리 식구에게는 고역이었다. 어머니의 물음에 점잖으신 아버지마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시연이 부모님 그리고 나와 시연이도 밥을 시켜 반씩 나눠먹으며 저녁 식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나온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였다. 하시는 일에 대해서도 대화하시고, 포항에 한 번 놀러 오시면 아버지 친구 분이 운영하는 횟집에 가 동해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회를 대접하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던 중에 보니 어머니께서 어디가 불편하신지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으셨다. 피곤해서 그러신 것 같았다.

“엄마. 엄마. 정신 차려봐. 괜찮아? 엄마. 눈 좀 떠봐.”

걱정이 되어 오늘 자리는 여기서 끝내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을 잃으며 의자에서 쓰려지셨다. 나는 놀라서 어머니 곁으로 가 몸을 흔드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혹시 오늘 드신 음식 중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 식당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동수야.”

“응. 엄마. 정신이 들어?”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노?”

“몰라. 갑자기 쓰러졌어.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내가? 참말로 별일이네. 피곤해서 그런 갑지. 호들갑 떨지 마라. 사돈도 계신데.”

잠시 후 정신을 차리신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렇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아무래도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시연이 부모님께 양해 말씀을 드리고 시연이와 함께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어머니는 한사코 괜찮다고 버티시다가 아버지에게 한 마디 듣고 나서야 조용히 병원으로 들어가셨다. 건강검진을 할 때만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는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야, 좀 어떠시냐?”

걱정되는 마음에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는 윤석이 녀석에게까지 응급실로 불러들였다. 이럴 때 병원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혈압이 조금 낮으신 것 말고는 별 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아. 그래도 모르니 피검사랑 소변검사부터 해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너도 알다시피 건강검진 때 아무 이상 없다고 나왔잖아. 수치가 거의 30대 후반과 비슷하셨다니까. 그러니 별일 아닐 거야.”

윤석이가 나를 위로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때 내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연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좀 진정이 되었다. 고마웠다. 그녀는 항상 내게 힘이 되어주는 것 같다. 이제 정말 그녀가 없는 내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아버지. 어디 몸 불편하신 곳은 없으세요?”

“나는 괜찮아. 음식이 잘못된 것 같지도 않고, 윤석이가 뭐라고 하디?”

“혈압이 조금 낮은 편이래요. 그것 말고는 이상이 없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연이의 위로를 받고 나서야, 초조하게 서 계신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는 아버지께서 더 걱정이 크실 텐데 위로는 못해드릴망정 호들갑만 떨었으니, 나도 아직 철이 들려면 먼 것 같았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저기 동수야.”

한참을 기다리자 검사결과가 나왔는지 윤석이가 내게 다가왔다.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뭔가 조심스러워보였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시연이가 아니었으면 녀석의 멱살을 잡고 빨리 말하라고 소리라도 쳤을 것 같았다.

“왜, 결과가 안 좋아?”

“아니. 그건 아닌데. 다른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결과가 나쁜 건 아닌데 왜 또 다른 검사를 해?”

“그게 말이지. 우리가 검사를 하고도 좀 당황스러워서 말이야.”

“뭔데. 그렇게 꾸물거려. 의사가 그러면 환자 보호자는 얼마나 가슴이 타는지 알아?”

“네가 걱정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오긴 했거든. 일단 안심을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다른 검사를 해야 확실해지긴 해.”

“알았으니까 어서 말부터 해.”

“임신이셔.”

이건 또 무슨 이상한 병명이란 말인가? 임신? 내가 알기로는 아이를 뱄다는 의미 말고는 없다. 우리 엄마 나이가 몇인데, 임신?

“뭐?”

“임신이라고. 지금 초음파 검사를 해보기로 했으니까 확실한 것은 조금만 더 기다려.”

임신이 의심이 가서 초음파 검사를 한다고? 지금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울상을 지어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역시 잠이 부족했었나 봅니다. 자고 나니 괜찮아 지네요. ㅎㅎ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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