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100일 이벤트가 있었던 지난 주 일요일에는 요트조정면허 시험을 봤다. 나는 당연히 합격을 하지 못했다. 재형이도 붙고, 형진이도 붙고, 시연이 마저 붙었는데 나 혼자 떨어졌다. 그것도 다른 세 명은 필기와 실기를 동시에 합격했는데, 나는 필기에서 떨어져서 실기시험은 보지도 못했다. 그런 나를 비웃는 친구 녀석들보다 내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는 시연이 때문에 더 비참했다. 그녀에게는 항상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개망신인지 모르겠다. 변명을 하자면, ‘1급을 봐서 그렇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같이 갔던 세 명이 본 시험도 1급이었다.
요트조정면허 시험 필기가 어려웠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날 시험 본 응시자 중에 떨어진 유일한 사람이 나라서 그 충격은 더 컸다. 나는 떨어졌어도 시연이가 합격을 했기 때문에 다음 주 정도에 중고로 요트를 사기로 자기들끼리 결정을 했다. 순식간에 소외감을 느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퇴근 후부터 자기 전까지 요트조정면허 책을 들입다 파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100점을 받아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Rrrr
열심히 면허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마동수입니다.”
“아, 이 번호가 맞나보네요. 안녕하세요. 마동수씨. 저는 도봉순이라고 합니다.”
전화를 받았더니 모르는 여자가 다짜고짜 자기 이름부터 밝혔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마동수씨는 아마 저를 잘 모르실거에요. 그렇지만 저는 마동수씨를 잘 알고 있거든요. 혹시 OO출판사 채은성 사장이라고 아시죠.”
“네. 알고는 있습니다만.”
채 사장과 아는 여자가 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했는지 의아했다.
“그 일로 지금 좀 만났으면 하는데요. 급한 일이거든요. 제가 알기로 마동수씨와 채 사장의 관계가 썩 원만치는 않다고 들었는데.”
썩 원만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의 주적 3호쯤 되는 인간이 되었다. 참고로 주적 1호는 양지선 팀장, 주적 2호는 이기적 대리이다.
“흠.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 알려주셔야죠.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아무 설명도 없이 만나기는 곤란하죠.”
“호호호. 듣던 대로 까칠한 면이 있으시군요. 야심한 시간에 여자가 전화를 했는데 호기심도 생기지 않으세요?”
이 여자가 장난하나. 나를 여자라면 무조건 침을 질질 흘리는 멍청이로 봤나 싶어 기분이 나빴다. 채 사장 일이라고 해서 잠깐 관심을 가졌지만, 어차피 며칠 후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쫓겨날 팔자다. 그러니 이런 장난질에 놀아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지금 저랑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말씀입니까? 할 말 없으시면 전화 끊습니다.”
“마동수씨, 잠깐만요. 죄송해요. 그쪽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채 사장 때문에 곤란한 입장 아니신가요? 제가 그 사람 약점을 알고 있거든요.”
방금 전까지의 여유 있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조금은 절박한 어조로 황급히 용건을 말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알고 있다. 내가 채 사장 때문에 곤란한 것이 아니라, 조금 있으면 채 사장이 나로 인해 곤란해지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채 사장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소리는 반가웠다.
“채 사장의 약점이라. 그건 좀 관심이 가는군요. 어디서 보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강남에서 홍대로 넘어가는 택시 안이거든요.”
“그럼 홍대 카페 골목에 있는 ‘은하수 다방’이라고 아세요?”
정확한 이름은 ‘몽마르뜨 언덕 위의 은하수 다방’인데 늦게까지 영업하는 몇 안 되는 홍대 카페 중 하나다.
“아, 물고기 카페 옆에 있는 거기 말씀이죠?”
“맞습니다. 30분 뒤에 거기서 뵙죠.”
“알겠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전화주세요.”
전화를 끊고 간단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약속장소인 홍대로 자동차를 몰고 나갔다. 채 사장을 엿 먹이기 위해서는 지옥불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게 지금 심정이다. 내 약혼녀를 모욕했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시기만 되기를 기다리다보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홍대에 있는 은하수 다방에 도착해서 내부를 둘러봤다. 예쁘장한 얼굴로 가슴이 파인 야한 검정색 원피스를 입은 이상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은 없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싶어 전화를 걸었더니 조금 전에 봤던 그 이상한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 모습을 보니 혹시 채 사장에게 부탁받은 꽃뱀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그냥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동수씨 맞으시죠? 제가 전화 드린 도봉순이에요. 왜 그냥 가세요?”
그녀도 전화 거는 내 모습을 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의도로 저를 부르셨는지 모르겠네요.”
“아아.. 제 꼴이 좀 이상하죠. 사정이 있어서 그렇지 마동수씨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입고 온 것은 아니에요. 너무 경계하지 마시고 일단 이야기부터 하시죠.”
도봉순이라는 여자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원래 앉았던 테이블에로 돌아갔다. 자신이 꽤 예쁘다는 사실을 아는지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 꽃뱀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채 사장이 유치한 계획을 짠 것이라면 사람을 잘못 봤다. 그의 계획이든 아니든 내가 도망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일단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 그녀를 자세히 보니 확실히 미인은 미인이었다.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에는 제대로 지우지 못한 마스카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 잔을 감싼 두 손을 미약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초조해보였다. 자신감 넘쳐보였던 모습은, 아마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려는 과장된 행동 같았다.
“이제 하실 말씀을 하시죠.”
“성격 급하시네요. 말씀드린 대로에요. 채 사장의 약점을 알고 있어요.”
“그걸 제게 말씀해주시겠다는 거죠?”
“네. 마동수씨도 그게 궁금하니까 여기까지 오신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대체 채 사장과 무슨 관계이기에 갑자기 저를 불러내서 약점을 알려주신다는 겁니까?”
“채 사장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죠. 그 인간이 제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니 글쎄.”
도봉순이라는 여자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를 바득바득 갈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채 사장이라는 인간은 정말 쓰레기였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지만, 그녀에게 딱히 동정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도봉순이라는 여자가 겪었던 상황은 불쌍해도, 그녀 또한 채 사장의 부인 입장에서는 불륜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흠.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네?”
내가 단호하게 말을 끊자 그녀는 휴지로 눈가를 닦던 동작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제가 동정이라도 해주길 바라셨습니까?”
솔직히 그녀의 심리상태가 어떤지는 내가 알바가 아니다. 지금 궁금한 것은 전화로 말했던 채 사장의 약점뿐이었다.
“아...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국 도봉순씨도 채 사장의 내연녀였다는 소리 아닙니까? 게다가 자기 책을 내기 위한 불순한 의도까지 가지고 있었고요. 그 사실을 채 사장 부인이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자기 손톱 밑 가시는 보여도, 남의 심장에 박힐 대못은 보이지도 않습니까?”
징징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짜증이 나 결국 입바른 소리가 나왔다. 성매매 여성을 단속한다고 하며 윤락여성들을 처벌하지만, 봉순의 행동도 넓게 보면 성매매의 일종이다. 게다가 불륜까지. 단돈 몇 만원에 몸을 파는 여자는 처벌해도, 목적을 가지고 남성에게 접근한 여자나 생활비를 받는 내연녀 그리고 외국인 현지처의 경우는 처벌대상에서 제외된다. 돈을 받아도 수백, 수천 배는 더 받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 현실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르겠다.
“그... 그래서 제가 당해도 싸다는 말인가요, 지금?”
나의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힐난에 그녀의 말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작가를 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말의 뉘앙스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십니까? 무슨 의도로 그런 속내까지 제게 털어놨는지는 몰라도, 그쪽이 눈물이나 흘리면서 징징거릴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도봉순씨에게 동정이라도 할 것 같습니까? 냉정해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저도 제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채 사장에게 원한 생겼다면서요? 그럼 슬픈 감정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머리를 더 차갑게 해야죠. 그래야 제대로 복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원해서 저를 찾은 것 아닙니까?”
속 시원하게 힐난을 퍼부으면서도 그녀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말은 잊지 않았다. 말귀를 알아듣는 여자라면 지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정확하게 이해했을 것이다.
“머리를 차갑게. 그렇군요. 눈물만 흘린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죠. 오늘 겪은 치욕을 갚으려면 냉정해져야겠죠. 불륜녀 주제에 누구에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해봤자 알아주지도 않겠죠. 고마워요. 제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줘서.”
봉순은 꼬았던 다리를 풀고 무릎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길게 몇 번의 호흡을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잡았다. 초조해보였던 아까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고마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 좋자고 한 이야기였을 뿐이니까요. 이제 그럼 채 사장의 약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음.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표정을 보면 꽤 원한이 컸던 것 같은데, 아무리 내가 차갑게 말했다고 해도 그렇지, 금세 이렇게 마음이 변해버릴 줄이야. 사람, 똥개 훈련시킨다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났다.
“제 말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네. 저 같은 미인에게 너무 잔인한 말씀을 하셨잖아요. 호호호. 농담이에요. 말씀을 듣고 보니 남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제가 직접 복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번거롭게 해서. 그리고 윤시연 작가가 참 부럽네요. 이런 듬직한 남자 친구가 있으니 말이에요. 그럼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 테이블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치마가 말려 올라가는 바람에 아주 못 볼꼴까지 보여줬다. 황급히 일어나 치마를 내린 덕분에 그 꼴을 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 홍대 은하수 다방.
동수는 참 멋진 남자 같았다. 찌질하게 하소연 했던 자신이 창피했다. 그래서 봉순은 멋진 여운이라도 남기며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멋진 걸음으로 나가려는 순간 테이블에 걸려 넘어지면서 치마까지 올라갔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도 마주치지 못하고 재빨리 카페에서 나왔다.
“아우. 창피해. 이게 다 채은성 그 놈 때문이야. 두고 보자. 나쁜 자식.”
봉순은 큰길로 나가 택시를 타고 OO출판사의 창고가 있는 일산으로 갔다. 창고가 있는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별채가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번호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채 안은 사람이 꽤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별채 안으로 들어온 봉순은 불을 켜고 구석에 있는 금고로 다가갔다.
“나를 여기로 데려와 섹스를 할 때만 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다, 채은성. 멍청한 놈, 비밀번호를 자기 생년월일로 하다니. 정말 내가 어쩌다 이런 바보 같은 인간에게 빠졌을까?”
그녀는 금고를 열고 내부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장부와 5만 원권으로 된 현금 2억이 들어있었다. 봉순은 옷장에 있는 가방을 꺼내 내용물을 모두 쓸어 담았다.
“흥. 이런 이중장부까지 만들어 자랑해놓고는 나를 헌신짝 취급을 해? 가만있자. 장부를 검찰청에 보내야 하나, 국세청에 보내야 하나. 에이, 그냥 복사해서 두 군데 다 보내지, 뭐. 금고 안에 들어있는 돈은 잘 쓰겠습니다. 채은성씨. 호호호.”
봉순은 차가운 웃음을 짓으며 가방을 챙겨 별채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탄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바닥에 가방을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도둑질이나 마찬가지라서 긴장을 했는지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 겉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그녀는 거울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경악을 하고 말았다.
“이게 뭐야. 노... 노팬티잖아. 그럼 뭐야. 마동수씨가 이걸 다 봤다는 거 아냐. 아우, 쪽팔려. A부장, 이 개자식. 괜히 멀쩡한 팬티를 찢어가지고 사람 망신을 줘. 두고 보자.”
그녀는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옮겼다. 그리고 영보문고 게시판에 ‘여성 작가의 피를 빨아먹는 A부장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남겼다.
“노팬티가 뭐야. 노팬티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A부장.”
글을 올린 봉순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컴퓨터 화면을 노려봤다. 그리고 네이버, 다음, 네이트의 익명 게시판에 들어가 그에 대한 글을 도배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제 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 이번 편은 특히 신경 많이 썼습니다. 재미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은 바로 올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늦으면 오후에라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