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3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시연이의 집.
시연이가 대형 곰 인형을 끓어 안고 낑낑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어머나, 시연아. 그렇게 큰 곰은 대체 어디서 난거니?”
“엄마! 인사해. 이름은 똥수야.”
거실 바닥에 곰 인형을 내려놓은 시연이는 노 여사를 보며 자랑을 시작했다.
“뭐? 똥수?”
“응. 귀엽지? 우리 동수씨 닮지 않았어?”
“뭐? 마 선생을? 호호호. 그러고 보니 닮긴 닮았다. 얘. 어디서 그렇게 비슷한 인형을 구했어?”
“이거? 우리 동수씨가 사줬어. 그리고 이것도. 짜잔. 예쁘지?”
시연이는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반지네? 예쁘긴 한데, 네 나이에 끼고 다니기는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괜찮아, 엄마. 이제 약혼할거니까. 동수씨가 있잖아. 나보고 약혼하자면서 이 반지를 끼워줬어. 그러니까 이제 나는 동수씨의 피앙세라는 말씀. 헤헤.”
약혼 이야기는 노 여사가 제일 처음 꺼냈던 이야기다. 그렇지 않아도 윤 사장이 말을 전했다고는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 이야기가 없어서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딸의 모습을 보니 동수가 약혼에 대해서 무척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졌다.
“뭐? 약혼?”
윤 사장을 통해 동수에게 은근히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을 딸이 알게 되면, 그녀의 성격에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자랑하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며 노 여사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르는 척 물었다.
“응. 약혼! 며칠 지나면 동수씨가 정식으로 인사하러 온데. 나 있지. 너무너무 좋아 죽겠어. 히히히. 그런데 엄마.”
“응?”
“나도 동수씨 고향에 내려가야 하는 건가? 상견례도 하고?”
“어머어머. 얘, 좀 봐. 아직 엄마 아빠는 허락 안 했거든?”
“왜? 엄마도 우리 동수씨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아잉. 엄마. 응?”
“호호호. 얘가, 얘가.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졌네. 그렇게 좋아?”
“응! 하루하루가 지나면 지날수록 더 좋아져. 이러다가 내 심장이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야.”
시연이의 말에 노 여사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이쿠. 그러세요. 우리 따님. 그런 걸로 죽었다는 사람 아직 못 봤으니까 걱정 마시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도 우리 동수씨 두고 죽을 생각은 전혀 없어.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동수씨 곁에 꼭 붙어있을 거다, 뭐. 아무튼, 엄마. 아빠한테도 잘 말해줘. 난 들어갈게.”
시연이는 그렇게 말을 하고 바닥에 놓은 곰 인형을 낑낑거리며 다시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바라보던 노 여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막만 하던 딸이 벌써 저렇게 커서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특하기도 하고, 이제 몇 년 만 있으면 자신의 품에서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아쉽기도 했다.
시연이는 동수가 사다준 큰 곰을 침대에 올려놓고 흐뭇하게 인형을 바라봤다.
“똥수야. 여기가 누나 방이다. 앞으로 너는 내 보물 1호니까 잘 지내보자.”
인형과 잠깐 대화(?)를 나눈 그녀는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낑낑거리면서 등에 붙은 원피스의 지퍼를 내리고는 옷을 훌러덩 벗었다. 속옷차림으로 스타킹을 말아 내리던 시연이는 조금 전까지 동수와 나누던 진한 스킨십이 갑자기 생각나서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만지던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자극적인 손길에서 느껴졌던 묘한 쾌감이 아직도 진한 여운처럼 남아있었다. 방금 전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자 아랫배를 지나는 짜르르한 감촉이 느껴져 화들짝 놀랐다.
“망측해. 망측해. 히잉. 동수씨가 벌써 보고 싶다. ‘약혼식이 끝나면 널 가질 거야.’ 어쩜 말도 그렇게 멋지게 하는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똥수야?”
굵은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시연이의 표정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 아릿하게 변했다.
다음 날 시연이는 동수와의 데이트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잠시 후 시연이의 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흥. 이게 동수가 사준 똥수라는 곰 인형이라는 말이지. 인상도 더럽게 생긴 것이 마 대리와 똑같군. 20살짜리 딸을 벌써부터 약혼시켜야하고 내 팔자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동수 그 녀석은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으니, 네가 대신 맞아라!”
윤 사장은 딸의 침대위에 올라가 있는 곰 인형을 바닥으로 내린 다음 주먹과 발로 신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 동수의 차안.
“응. 뭐지?”
“동수씨.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갑자기 오른쪽 어깨하고 팔이 결리네.”
“잠깐만요. 제가 주물러 줄게요.”
차안에서 셀카 놀이를 하던 시연이가 카메라를 놓고 동수의 오른쪽 어깨와 팔을 열심히 주물렀다. 그녀의 안마를 받자 곤혹스러워 하던 동수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다음날 나는 시연이와 아침 일찍부터 만나 파주에 있는 평화누리공원으로 출사 겸 데이트를 하러갔다. 우리 둘의 진짜 100일을 축하라도 하듯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그녀를 데리러 집 앞으로 갔더니 시연이는 뭔가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입고 왔네요. 잘했어요. 히히.”
오늘은 커플티를 입고 데이트를 하고 싶다며 시연이가 어제 다짐을 하듯 부탁하는 바람에 그녀가 유럽여행을 가서 사온 영국국기 문양이 들어간 남방을 입었다. 그리고 청바지와 하얀 운동화 또한 시연이가 오늘 지정해준 데이트 코디였다. 나와 똑같은 옷을 입은 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칭찬을 했다. 정말, 20살과 데이트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동수씨. 아~ 하세요.”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더니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어 내 입으로 넣어줬다. 잠든 모습을 구경하느라 집에 늦게 들여보냈는데 언제 이런 도시락까지 준비했는지 기특했다. 나는 입을 큼지막하게 벌려 그녀가 넣어주는 김밥을 받아먹었다.
“음.”
김밥을 입으로 받아 오물거리는 순간 무지 짠 맛이 입안 전체에 확 퍼졌다. 밥에 소금간을 하고 버무리다가 뭔가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연이가 처음으로 해주는 음식인데 인상을 쓸 수는 없어 최대한 미소를 집으며 열심히 씹었다. 아주 꼭꼭.
“맛있어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히히. 다행이네요. 김밥을 처음 만들어봐서 걱정했는데. 자, 하나 더 드세요.”
아뿔싸, 이번 김밥은 시큼한 맛이었다. 밥알에서 식초향이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아이구, 우리 동수씨 잘 드시네요. 자, 여기 또 있어요.”
이번에는 맹숭맹숭했다. 그래도 짠맛이나 시큼한 맛보다는 나았다. 내가 참으며 열심히 김밥을 받아먹자 맛있는 줄 알고 입안으로 계속 음식을 집어넣었다. 짠맛, 신맛, 맹숭맹숭한 맛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내 입안을 괴롭혔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가 헷갈릴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저기. 시... 시연아 나만 먹기 미안한데. 너도 좀 먹지?”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이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내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이건 시연이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맛있다고 해버리면 나는 평생 이런 고통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아, 요리한다고 바빠서 맛도 제대로 못 봤네요. 어디, 먹어 볼까?”
김밥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시연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저건 맹숭맹숭한 맛이 분명했다.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다른 김밥을 집어 다시 입안에 넣었다. 그녀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저건 짠맛이 분명했다. 울상으로 변한 얼굴을 하고 또 다른 김밥을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풉... 콜록. 콜록.”
“괜찮아, 시연아?”
김밥을 입에 집어넣고 몇 번 오물거리던 시연이가 사레들린 듯 잔기침을 했다. 생각보다 요란한 반응에 걱정이 된 나는 그녀의 등을 살짝 두들겨줬다.
“히잉. 이게 뭐에요. 동수씨, 미안해요. 제가 맛도 안보고 가져와서. 이걸 먹으면서 어떻게 인상하나 안 변해요?”
“하하하. 왜, 난 맛있었어.”
“피이. 그럼 계속 먹여줄게요. 아~, 하세요.”
울상이던 시연이는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개 구진 표정을 지으며 김밥을 집어 내 입에 갖다 댔다.
“아... 아니. 이제 배가 불러서 말이야.”
“망했네. 휴, 아무래도 먹기 힘들겠죠?”
“그... 그렇겠지?”
“동수씨.”
“응?”
“앞으로 제가 해주는 음식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주기에요. 어쩌지 요리학원부터 다녀야 하나.”
“에이, 무슨 요리학원까지. 처음 만든 것 치고는 김밥모양이 예뻤어. 밥이야 앞으로 잘 버무리면 되지. 괜찮아, 기죽을 것 없어.”
“안 돼요. 동수씨가 먹을 음식인데 허투루 만들 수는 없죠.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내일부터라도 당장 요리학원부터 등록해서 열심히 배울게요.”
의욕이 넘치는 시연이의 얼굴을 보니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갑자기 내 주변에 아는 사람 중 한 명이 자주했던 하소연이 떠올랐다. 여자 친구가 요리학원을 다니면서부터 국적불명의 요상한 요리를 만들어 하루를 멀다하고 맛을 보라며 가져오는데, 그게 정말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었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시연이 어머님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니, 시연이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며 나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뻥 뚫린 자유로를 타고 신나게 달렸더니, 오래지 않아 임진각이 있는 평화누리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쁜 조형물과 푸른 잔디로 꾸며진 공원은 유난히도 파란 가을 하늘과 맞닿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있는 바람의 언덕에서 열심히 사진도 찍고, 공원 안에 있는 수상 카페 ‘안녕’이라는 곳에 들러 차를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 그리고 시연이가 준비해온 패브릭 재질의 돗자리를 펴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더니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뿌듯해졌다.
◆ 미사리 근처의 러브호텔.
채 사장(OO출판사 사장)과 봉순(채 사장의 불륜녀, 작가)이 대낮부터 러브호텔에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악...”
“으윽...”
잠시 후 두 사람은 절정에 도달한 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침대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었다. 채 사장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는 테이블에 올려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좀 안 피면 안 돼요?”
“왜?”
“관계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면 내가 꼭 창녀가 된 기분이라고요.”
“몰라서 하는 소리. 섹스가 끝나고 피는 담배가 얼마나 꿀맛인지 알아? 너도 담배를 피우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해? 순진한 사람처럼. 나는 마누라랑 할 때도 끝나면 담배는 펴.”
“좀 여운을 느끼다가 피워도 되잖아요. 에이, 모르겠다. 그건 내가 필래요.”
봉순은 채 사장에게 뭐라고 설명을 하려다가 말고 그가 피우는 담배를 빼앗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채 사장은 그런 봉순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어때? 괜찮지?”
“몰라요. 저야 글이 잘 안 써질 때나 가끔 피워서 그런지 무슨 느낌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런가? 원래 화장실 갈 때, 식사 후, 섹스 후 피는 담배가 가장 맛있어.”
“네. 좋은 것 가르쳐줘서 아주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은성씨.”
“응?”
“내 책은 언제 내줄 거예요? 알아보니 윤시연인가 뭔가 하는 꼬맹이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 3위까지 올랐다면서요. 조만간 1위까지 갈 수도 있다던데. 그럼 내 책 내주는 거죠?”
담배를 다 핀 봉순은 채 사장에 곁에 다가가 자신의 책은 언제쯤 다시 낼 수 있는지 은근히 물었다. 지난번 출판한 책이 실패한 이후 그녀도 많이 조급해졌다. 요즘은 글 쓰는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는 채 사장이었지만, 책을 꼭 다시 내려면 잘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웬만하면 그의 요구에 응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 9월도 며칠 남지 않았잖아. 대금 받아서 빚부터 어느 정도 정리하면 그때 바로 출판해줄게. 마동수 그 놈. 이렇게 책이 잘 팔리는 것을 알면, 아주 배 아파 죽으려고 할 거다. 흐흐흐.”
“정말이죠? 제 책부터 꼭 내줘야 해요.”
“그럼. 내가 지난번보다 더 투자를 할 테니까 글이나 잘 마무리해.”
“걱정 말아요. 이번 글이라면 신경숙이나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길 수 있어요. 호호호.”
채 사장은 동수를, 봉순은 신경숙과 무라카미 하루키를 밟아주는 상상을 하며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제 슬슬 작품상 9월이 끝나가네요. 출판사 이야기가 슬슬 등장 할 때가 되었죠.
5층 이상의 옥상은 유사시 대피장소라고서 항상 열어둬야 한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ㅠ 그런데 알아보니 비상문자동개폐장치를 설치하면 항상 열어두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데 맞나요?
1시간 정도 이따가 다시 한 편 올릴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