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사방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휩싸였다.
꿀꺽.
누군가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얼굴 생김새도 그렇고 체형 자체가 약간 통통한 편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조금 도드라져도 그런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최소한 C컵 이상은 되어 보이는 엄청난 가슴이 숨어있을 줄이야.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 위에는 적힌 ‘도롱뇽’과 ‘우리 뇽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피켓을 들고 움직일 때마다 풍성한 가슴이 덜렁거리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칫 브래지어가 그녀의 가슴을 감당하지 못하고 풀리기라도 할까봐 지켜보고 있는 내가 더 조마조마했다.
“다가오지 마. 내 몸에 손대기만 해! 저기 카메라 들고 있는 기자 보이지? 다 찍고 있어. 그러니까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아. 거기 음흉해 보이는 아저씨! 너무 노골적으로 제 가슴만 쳐다보는 거 아니에요?”
정 주임에게 다가가던 남자직원들은 그녀의 거침없는 모습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옷을 벗은 것은 정 주임인데 쳐다보는 사람이 오히려 나쁜 놈(?)이 되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말에, 힐끔힐끔 쳐다보는 남자들은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가슴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정 주임의 엉뚱하기까지 한 배짱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책임자가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정 주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그 웃지 못 할 상황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여인으로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직장동료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그녀의 열정에 반했다. 정 주임의 반나체에 전혀 음심이 들지 않았다. 맡은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남자보다 더 과감한 배짱으로 엄청난 결단을 내린 그녀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울긋불긋하게 글씨가 적힌 그녀의 몸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칵. 찰칵.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았다. 사진 기자인척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정 주임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고보고 싶다는 아마추어 사진가로서의 욕심도 있었다. 물론 오늘 일이 끝나면 그녀에게 전부 전해 줄 생각이다. 저런 배짱을 가진 정 주임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담긴 사진을 추억으로 생각하며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어 할 것 같았다.
과감한 그녀의 모습에 준호를 끌고 가던 직원들도 넋을 놓아버렸다. 준호는 그 틈을 타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정 주임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대형 철거 중장비의 무한궤도 앞에 가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녀의 과감한 배짱에 감동을 받아 충동적으로 한 행동 같았다. 운전기사가 실수를 해서 중장비를 조금 이라도 움직이면 큰 사고로 이어질 판이었다. 농담처럼 했던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은 정말 이 일에 목숨을 걸어버렸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준호를 말리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정체가 들통 나면 두 사람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미쳤다고 욕을 하고 싶었는데, 왜 갑자기 가슴이 울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처럼 잔머리를 돌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평생 가도 이해하기 힘든 모습들이었다. 조 팀장님이 보여준 믿음에 보답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시켰다면 절대로 나올 행동들이 아니었다. 팀장님이야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갑자기 그 양반이 야속해졌다.
AM 11:20
삐뽀 삐뽀.
갑자기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자기들로는 도저히 두 사람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자 경찰에 협조를 요청한 것 같았다. 상세한 상황 설명을 들었는지 여경 두 명이 담요를 들고 경찰차에서 내렸다. 우리도 이제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직 조 팀장님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아니 대체 왜 이러세요. 우리는 단지 안양천 도롱뇽을 살리자고 이러는 거예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철거반대. 철거를 중단하라.”
정 주임이 다가오는 여경들을 피해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달아나려고 했지만, 얼마가지 못해 결국 잡혔다. 중장비 밑에 기어들어간 준호도 직원들이 달라붙기 시작하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끌려나왔다. 상황이 정리되자 공사현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장비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내 전화는 오지 않았다.
잠시 후면 건물이 무너질 것이다. 정 주임과 준호가 했던 노력은 결국 의미 없는 개고생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경찰들은 정 주임과 준호만 데리고 공사현장을 떠났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옆에서 편하게 사진만 찍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조 팀장님의 말씀처럼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나를 합리화했지만, 왠지 자꾸 두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결심을 했다.
“뭐... 뭐야, 저 자식은 또. 잡아. 당장 잡아와.”
나는 미친 듯이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직원들이 우르르 뒤를 쫓아왔다. 지금 잡히면 절대 안 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왼쪽에 비상구가 보였다. 나는 비상구 계단을 타고 무조건 위를 향해 올라갔다.
“이봐요. 기자 양반. 대체 뭐하는 짓이야. 당신 미쳤어? 이거 업무 방해야.”
그들의 협박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상의를 탈의한 정 주임이나 정말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중장비 밑으로 기어들어간 준호를 생각하니 어떻게 해서든 철거를 늦추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헉. 헉.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계단을 오르려니 금방 숨이 가빠왔다. 나는 SD카드만 빼낸 다음 들고 있던 카메라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동안 내 손때가 묻은 소중한 카메라였지만,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었다.
휘이잉...
옥상에 도착하자 강한 바람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철거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라서 입구를 막을 쇠붙이하나 보이지 않았다. 건물의 옥상은 숨을 곳 하나 없는 그야말로 뻥 뚫린 공간이었다. 이대로 잡히느냐 모험을 하느냐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AM 11:30
“조심해!”
나는 결국 옥상의 난간위에 올랐다. 급하게 뛰어 올라오느라 다리가 덜덜 떨렸다. 6층 높이의 건물에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몰려왔다. 난간에 서서 휘청거리자 따라왔던 직원 중 한 명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젠장, 누구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 기자양반.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도... 도롱뇽이 죽는다잖아요.”
나는 끝까지 도롱뇽을 팔았다.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인간들의 욕심에 밀려나 어딘가 산속에서 고생하고 있을 진짜 도롱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의식 있는 환경운동가들에게도 미안했다.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 그들의 노력을 한순간에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었다. 일이 잘 끝나면 미친척하고 회사에 건의를 해서 우리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환경단체에 기부라도 하고 싶었다.
“미친. 산속 계곡에서나 사는 도롱뇽을 안양천에서 대체 왜 찾아.”
“그 사람들이 봤다잖아요. 확실해질 때까지 철거는 중단하시죠?”
“이봐 당신. 솔직히 말해봐. 정체가 뭐야? 기자 아니지? 아까 그 연놈들이랑 한 패지? 대체 원하는 것이 뭔데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응?”
사진을 찍던 나까지 가세를 했으니 그들도 우리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다. 아마 조금만 지나면 윗선에 보고가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이제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냥 난간에 서서 조 팀장님의 전화가 올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 주식회사 동지 회장실.
“회장님. 미래그룹과 전화연결이 되었습니다.”
“흠. 바쁜 일이라도 있었나보지?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전화 돌리게.”
고 회장은 고풍스럽게 꾸며놓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고 회장님도 잘 지내셨지요? 급한 회의가 있어서 전화가 늦었습니다. 허허.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미래그룹에서 목동에 주상복합건물을 짓는다면서요?”
“흠흠. 그 일이야 동지에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저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땅을 미래에서 노리고 있었다면 우리도 다른 땅을 선택했겠지요. 밑에 사람들이 과잉충성을 한다고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미래그룹의 회장이 불편한 어투로 말을 하자 고 회장은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존심이 강한 그였지만, 일에 있어서는 프로였다. 여기서 잠깐 고개를 숙이면 큰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는데 굳이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우리도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그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지요. 그런데 주상복합건물은 왜 물어보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래백화점 건물을 포함한 부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구입한 홈플러스 옆 부지와 교환하지 않겠습니까?”
“교환요? 그것도 건물까지 필요하시다고요? 음. 제가 알기로는 그 건물이 철거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오늘 철거가 시작 된다는 이야기는 고 회장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팀원들이 목숨까지 걸었다는 조 팀장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요? 그 건물에다가 리노베이션을 해서 우리가 좀 쓰려고 했는데 이것 참 곤란하군요. 듣기로는 백화점 부지는 높이 제한이 있어서 여러모로 곤란하다고 하던데.”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군요. 이러면 어떻습니까?”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미래그룹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어떻게요?”
“지금 철거를 중단시키겠습니다. 건물이야 어느 정도 부서졌겠지만, 그래도 새로 짓는 것보다 빠르지 않겠습니까? 백화점 건물을 사용하시려는 것을 보니 빠른 시일 내에 건물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만.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가 너무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고 회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가 원하는 패를 먼저 펴도록 여유를 가지고 압박만 했다. 고만고만했던 동지그룹을 재계 서열 5위 안에 오르게 한 그의 진가가 발휘되고 있었다.
“대신 건물 가격을 받지 않겠습니다.”
“허허. 그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거기다 부지 가격도 차이가 날 텐데요?”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 더 추가하죠. 시공을 우리 미래그룹에 맡겨주신다면 저렴한 가격에 건물을 지어드리지요.”
“얼마나 저렴하게 말입니까?”
“그건 실무자들이 와서 계산을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통화를 하던 고 회장의 눈빛이 빛났다. 그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그다. 승부를 걸 시기라는 것을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렇게 하시죠. 무너진 층당 100억을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으면 미래건설에서 무료로 리노베이션을 해야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미래 측에서 전혀 손해 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음. 나쁜 제안은 아니네요. 그렇게 하시죠. 그럼 고 회장님 말씀을 믿고 철거는 바로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저도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계약은 실무자를 통해서 정식으로 맺도록 하죠. 덕분에 우리도 빠른 시일 내에 건물을 확보할 수 있겠군요. 고맙습니다. 허허.”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우리도 고 회장님 덕분에 원안대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대기업 총수간의 전화 통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전화를 끊은 고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자기의 속내는 숨기고 상대를 내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함이었다. 조 팀장의 단언처럼 그의 팀원들이 무사히 철거를 막았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건축비용도 아끼고 가야그룹의 회장에게도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게 된다. 비서실에 연락해서 이번 일과 관련된 진행 상황을 최우선으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정말로 성공했으면 회사차원에서 후한 포상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AM 11:50
나와 미래건설 직원간의 대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만 하고 내려오지. 자꾸 그러면 정말 콩밥 먹게 해준다. 너 지금 이게 얼마나 큰 손해를 끼치는 행동인지 알아?”
“손해나지 않도록 해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이제 정말 전화가 올 때가 되었다. 그리고 안전장치 하나 없이 여기서 버티기도 지쳤다. 조금만 삐끗해도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의도를 드러냈다.
“뭐? 당신이 무슨 수로?”
Rrrr
“잠시 만요. 전화 좀 받고. 여보세요. 네. 팀장님. 정 주임하고 준호는 경찰서에 끌려갔어요. 회사에서 처리 좀 해달라고하세요. 저요? 저는 지금 옥상 난간에서 버티고 있죠. 어떻게 됐어요? 네? 정말요? 알았습니다. 여기 상황 정리해야 하니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 하하하하하. 만세다. 만세.”
조 팀장님은 전화로 두 그룹간의 협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절로 ‘만세’라는 소리가 나왔다. 여태껏 일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렇게 가슴 뭉클하고 반가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역시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어어...”
그런데 만세를 부르다가 균형을 잃은 바람에 건물 밖으로 몸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젠장,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데...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 시연이의 얼굴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는 여기까지 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에 많은 분들이 재미있어 해주셔서 감동받았습니다. 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고 독자님들께 혼날까봐 조마조마했었거든요.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죠.^^
어제 3편을 올려서 그런지 다음편은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ㅠ 가능하면 낮에라도 한 편 올리도록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