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6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네가 회사를 배신하면 돼.”
“뭐? 지... 지금 나보고 뭘 하라고? 배신? 야! 마동수. 너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냐. 너무 야비한 것 아냐?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내가 밑도 끝도 없이 배신을 하라고 하니 진경이가 화부터 벌컥 냈다. 독립 운동하다가 잡혀 온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펄쩍 뛰는지 모르겠다.
“진정하지. 넌? 넌 내 믿음에 배신한 것 아냐?”
“그래서 한 번 배신했으니까 기왕에 버린 몸 한 번 더 배신하라고?”
우와. 표현이 좀 너무 과격했다. 야비하다는 말에 내가 욱해서 표현을 좀 노골적으로 했다. 그래도 그렇지 얘가 무슨 드라마 대사를 읊는 것도 아니고. ‘기왕에 버린 몸?’ 아까는 독립투사 역할을 하더니 이제는 자기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술이 사람을 버려놓았다.
“당장 배신하라는 것도 아니니 진정 좀 해. 솔직히 물어보자. 너는 내게 사과를 했다고 치고, 채 사장은 내게 사과를 할 것 갔냐?”
“아니. 그렇게 융통성이 좋았으면 회사가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겠지.”
“나는 정당한 요구를 했어. 사장에게 직접 따지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해도, 너희 사장은 내 요구를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 취급했지. 그러면서 법대로 하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게 말이야. 동수야.”
“조용히 하고 끝까지 이야기부터 듣지? 아무튼 그래서 난 법대로 할 거야. 그렇다고 완전히 망하게 하거나, 채 사장을 쫓아내려고 하는 것도 아냐. 그래 만약 네가 정말로 배신을 한다면 너와 사장 사이는 벌어지겠지. 사장은 널 못 잡아먹어 안달이겠지만, 널 쫓아내거나 그러지는 못해. 그러니 사이가 벌어지는 정도의 불편함은 내 신뢰를 깨트린 대가로 벌 받는다고 생각해.”
나는 그때부터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나 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그럴싸했는지 진경이도 조용히 내 말에 경청했다. 나중에는 빙그레 웃으면서 호응까지 했다. 어쨌든, 진경이를 설득하는데 성공은 했으니, 앞으로의 일은 편해질 것 같았다.
회사에 출근했는데, 왜 이렇게 낯선지 모르겠다. 어제 내가 너무 많은 일을 벌여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나 혼자 농땡이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그래도 요즘은 회사 다닐 맛이 난다. 여전히 무표정한 김 대리를 제외하면 모두가 성격 좋은 사람들만 모여 있다 보니 회사 생활이 재미있기까지 하다. 세상에, 내가 회사 다니는 재미를 알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회의 하자.”
팀장님의 지시에 우리들은 우르르 회의실로 모였다.
“자. 다들 업무 진행 상황 보고부터 해봐.”
“브이걸은 10월 말에 발표할 앨범준비 때문에 다행히 스케줄이 비어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사 진행자로 유수근씨를 섭외했습니다. 그밖에 단순히 런칭행사를 관람 해줄 연예인도 몇몇 섭외했습니다.”
“음. 그것도 필요하지. 요즘은 포토존이다 뭐다 해서 행사 전에 사진촬영도 많이 하더라. 언론의 관심을 끌려면 꼭 필요하니까. 몇 명이나 섭외했어?”
“현재 10명이 섭외에 응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해서 거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5명 정도 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로고 만드는 작업은?”
“5일 안에 3가지 안을 가지고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컨펌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김 대리는 됐고, 준호는 어떻게 되고 있어?”
“네. 남자 배구팀, 여자 농구팀 모두 그날 스케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지원하고 있는 골프선수 두 명도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치어리더 팀은 윤 스포츠센터에서 파견한 GX강사와 함께 동작을 맞춰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치어리더 팀이 의욕이 넘치는지 독자적인 치어리딩을 선보이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 음.”
따로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만의 고유색을 보여주겠다니 멋진 치어리더들이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팀장님은 약간 고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괜찮을까 마 대리?”
“휘트니스 클럽에서 GX프로그램으로 치어리딩을 넣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꼭 윤 스포츠센터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보다 그런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어도 좋잖아요. 그렇게 계획을 짜면 우리 치어리더 팀에서 치어리딩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괜찮네. 준호야.”
“네. 팀장님.”
“치어리더 팀에 가서 그렇게 하라고 전하고, 거기도 특별히 안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냐? 그 사람에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라도 강사를 해줄 수 있는지 알아봐. 호텔 휘트니스 클럽 쪽은 얼마 안 있으면 필요해지거든. 웬만하면 현역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좋잖아. 상징성도 있고.”
“알겠습니다.”
“그럼. 정 주임은?”
“네. 초청장 발송은 호텔 담당 마케팅팀에 협조를 구해놨습니다. 차질 없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GX프로그램과 전통무예 시범공연도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크크크.”
정 주임은 잘 보고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빵 터트렸다.
“응? 왜? 내 옷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뇨. 마 대리님 때문에요. 흐흐흐.”
응? 갑자기 왜 나를 걸고넘어지는지 모르겠다. 정 주임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참다가 소리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마 대리? 왜 무슨 사고 쳤어?”
“제가 무슨 앱니까? 사고를 치게.”
“지난주에 마 대리님이 전통무예 연구회에서 다리 찢는 모습이 기억나서. 죄송합니다.”
“거기서 마 대리가 다리는 왜 찢어?”
“아. 몰라요. 윤 사장님이 갑자기 시키셨어요.”
“넌 참 희한한 놈이다. 전에는 목욕탕 청소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다리를 찢어? 일이 진행되는 모양새를 보면 네게 호의를 가진 것 같은데, 막상 하는 일을 보면 심술을 부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너 윤 사장님께 죄 졌냐?”
“그냥 좀 짓궂으셔서 그래요. 그렇게 고생을 해서 우리가 이렇게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겁니다. 제 다리가 찢어지는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차질 없게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상.”
윤 사장님이 내게 심통을 부리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괜히 사람들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 같아서 미친척하고 회의를 끝내버렸다. 그런데 내가 말로 회의를 끝내자 팀장님까지 서류를 챙겨서 회의실을 나가셨다. 저 양반은 아무래도 자신이 팀장이라는 사실을 아직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Rrrr
나는 시연이의 말도 있고 해서, 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쨌든, 막무가내로 책을 판매 중지시켜 달라고 한 내 잘못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만나서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사과 받을 것은 사과 받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계약위반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도 받을 계획이다.
혹시나 싶어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녹음도 시작했다. 진경이의 말을 생각해보면, 무슨 막말을 할지 모른다. 녹음을 해서 나중에 생길지도 모를 법적분쟁시 사용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혹시라도 억울하게 회사를 빼앗겼다면서 언론플레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 좋다.
“네. 채은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어제 만났던 마동수라고 합니다.”
“누구시라고요?”
이 인간이 사람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 잠깐 만났으니 그럴 수 있다.
“어제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라는 책 때문에 찾아간 마동수라고 합니다.”
“난 또 누구시라고. 무슨 일로 전화했습니까? 용건은 끝난 것으로 아는데요.”
어제 밤에 진경이를 통해 어떤 인간인지는 대충 들었지만, 정말 막가자는 이야기 같았다.
“네. 그래도 일단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이야기 하시죠. 저도 어제는 좀 막무가내로 말을 한 것 같으니 이성을 갖춘 상태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됐습니다. 법대로 하자면서요. 그러니 법대로 하세요. 계약서도 확실히 있으니 저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제 15조 저작인격권 존중. ‘을’은 출판물에 대하여 ‘갑’의 저작인격권을 최대한 존중하며, 저작물의 내용, 표현, 제호 등에 있어서 변경을 가할 경우 반드시 ‘갑의 동의를 구해야한다. 동의 없이 내용을 변경한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화를 냈던 것입니다. 어제는 서로 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도, 성인인데 애들처럼 계속 얼굴을 붉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애들? 지금 제가 애처럼 군다는 말입니까?”
아! 정말 피곤한 인간이다. 나는 정말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계속 말꼬투리나 잡고 있다. 이정도면 나도 시연이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언제 애들처럼 군다고 했습니까. 성인답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성인답지 못하다는 말 아닙니까? 이봐. 마동수씨. 당신 지금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본데, 우리 출판사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계약서? 계약서 좋아한다고 했지? 그럼 저자는 출판 촉진을 위한 선전에 참여한다는 조항도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는 것도 알겠네. 그렇지 않아도 대형 서점 임원들에게 술 접대를 할 생각이었는데, 작가 얼굴도 반반하니 꽤 도움이 되겠어. 싫으면 나도 계약 위반으로 소송 걸어서 인세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아. 크크크.”
미친놈이 분명하다. 저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저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끊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내용은 그냥 책 판매가 잘되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사인회에 참석하겠다는 추가조항일 뿐이었다. 또라이 같은 놈.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조항으로 술 접대를 시키겠다는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홍대 주변의 어느 모텔.
“그렇지 않아도 대형 서점 임원들에게 술 접대를 할 생각이었는데, 작가 얼굴도 반반하니 꽤 도움이 되겠어. 싫으면 나도 계약 위반으로 소송 걸어서 인세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아. 크크크.”
채 사장은 그렇게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잘했어요. 은성씨.”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예쁘장한 외모의 여자가 몸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그에게 안겼다.
“그런데 봉순아. 계약서 내용 그거 정말 가능한거야?”
“그럼요. 여자 연예인들도 그렇게 이용당하잖아요. 저 법대 나온 여자에요.”
“법대? 흐흐흐. 공부 제대로 안했잖아? 졸업도 겨우 해놓고.”
“흥. 그거야 소설 쓴다고 그랬죠. 그래도 4년간 다니면서 들은풍월은 있어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호호호.”
“그렇단 말이지. 두고 보자. 감히 나를 무시해.”
“그러게요. 감히 우리 은성씨를 무시하다니. 그나저나 제 소설은 언제 다시 출판해줄 거예요?”
“책?”
동수에게 통쾌하게 이야기를 하고 기분이 좋아졌던 채 사장은 그녀의 말에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지난번에도 봉순의 부탁을 받고 억지로 책을 출판했다가 완전히 말아먹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네. 약속했잖아요. 다시 출판해주겠다고요.”
“흠. 지난번에 네가 자신이 있다고 해서 광고비를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알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주 지긋지긋하다.”
“그때는 정말 운이 없어서 그렇죠. 갑자기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나와서 너무 대박을 쳤잖아요. 최근에 다시 책이 좀 팔리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1Q84’가 나와서 쑥 들어가고요. 제가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신경숙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아직 부족하죠. 정말 운이 없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용. 넹? 아잉, 은성씨이~~.”
봉순의 애교를 부리자 채 사장은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신경숙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부족한 것이 분명했다. 지난번 큰 손해가 기억이 났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줘보기로 결정했다.
“그래. 그까짓 것 이번 책만 잘되면 못 내줄 것도 없지. 이리와. 봉순아. 한 번 더 해야지.”
“어머. 짐승. 또요? 그런데 일과시간에 이렇게 나와도 괜찮아요?”
“누가 뭐라 그래? 내가 사장인데. 앙탈 그만 부리고 이리와.”
채 사장의 말이 끝나자 두 남녀의 벌거벗은 몸이 짐승처럼 엉켜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안은 봉순이 지르는 뜨거운 교성으로 가득 찼다.
============================ 작품 후기 ============================
‘녹차’ 이야기 마음에 드신다는 독자님 감사합니다. 따로 참고하는 시집은 없습니다. 가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데, 마침 홍대 마녀로 유명한 오지은님의 ‘당신을 향한 나의 작은 사랑은’이라는 노래의 노랫말 중 홍차를 우려낸다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음률도 좋지만, 가사가 참 좋은 노래입니다. 달달한 음악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표지를 바꿔봤습니다. 예전 표지는 개성이 없어서요. 제가 예전에 대관령 목장에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주인공이 저 풍차같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바람에 부러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고 전기를 만드는 풍차처럼, 고난이 닥쳐도 힘을 낸다는 뜻이죠. 꿈보다 해몽이 좋죠? 나중에 괜찮은 표지가 생기면 그때 수정하겠습니다. 혹시 이상하다고 하시면 다시 예전 표지로 바꾸겠습니다.
잠시 후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