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시연이 방.
시연이는 오늘 동수 때문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이미 어떤 책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걱정이 컸었다. 그런데 그가 건네는 책을 받는 순간 그를 속였다는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에 왈칵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알고 받는 선물인데도, 그 책이 정말 마음에 들었었다. 연기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너무 큰 감동에 눈물이 펑펑 흘러나왔다. 이게 바로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출판사의 문제로 화가 난 동수를 보자, 책을 받은 감동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미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따지고 보면 시연이도 출판사와 가세를 해서 동수의 뒤통수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분노가 마치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를 말리고 싶었다. 혹시라도 눈치챌까봐 불안한 속내는 최대한 숨긴 채 열심히 웃음을 지으며 그를 달랬다. 열심히 설득을 한 덕분인지 다행히 동수는 화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았다.
“휴. 어떡하지. 나도 동수씨를 속이는 일에 가세했다는 사실을 알면 크게 실망할 텐데.”
Rrrr
시연이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진경이에게 전화가 왔다.
“네. 언니.”
“어떻게 됐어?”
“제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다행히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도 동수씨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이제 동수씨 속이는 일은 다시 못할 것 같아요.”
“휴. 어쨌든 다행이다. 동수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정말 나도 몰랐다. 나도 앞으로 이런 일은 심장 떨려서 못할 거야. 동수 기분은 좀 풀린 것 같아?”
“네. 조금은 풀린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정말 다행이다. 시연아!”
“네? 언니.”
“이번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알았지?”
“그 말은 제가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이에요. 언니도 무덤까지 가지고 가셔야해요.”
“당연하지! 아무튼 나는 그렇게 알고 전화 끊을게.”
시연은 전화를 끊고 동수가 선물해준 책으로 눈을 돌렸다. 빙그레 웃음이 났다. 동수를 속였다는 미안한 마음도 저 책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품에 한 번 꼭 껴안았다가 다시 펴서 열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쓴 책인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나는 시연이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 앞으로 출판사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나도 행동이 과했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에서 가끔 등장하는 막무가내 고객처럼 ‘여기 사장 나와.’라고 꼬장을 부린 격이다. 난데없이 판매중지를 요청했으니 채 사장도 황당했을 것이다. 그 부분이 약간 미안하긴 했다. 그래도 나를 물로 보고 법적으로 해결하라고 했으니 계속 강압적으로 나오면 법적으로 해결해 줄 생각이다. 시연이의 부탁이 있으니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만 않으면 된다.
Rrrr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진경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
“미안해.”
“됐어. 너도 그렇고 너희 사장도 그렇고 법적으로 해결하라고 했으니 나도 법에 좀 호소해볼 생각이야. 그러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야! 마동수. 정말 이렇게 나올래? 내가 잘못했다고.”
지금 누가 누구에게 성질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어쩌라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네. 괜찮습니다.’라고 할 줄 알았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공덕오거리 쪽에서 산다며? 나 지금 그 근처야.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직접 찾아온 성의를 봐서 얼굴을 봐 줄 생각이다. 과연 진경이라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알았어. 대학 다닐 때 가끔 갔던 마포OO족발 집 알지? 거기서 기다려 금방 갈게.”
나는 진경이와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머리를 짜내서 고민해봤자 소용은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는 일이다.
“야. 여기 앉아. 내가 너의 먹성을 생각해서 족발 ‘대’자로 시켰다.”
족발집에 가니 진경이는 이미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테이블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끈한 족발이 식욕을 자극했다. 먹을 것으로 유혹하면 화가 풀릴까봐? 좋은 생각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법이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젓가락을 들고 고기 세 점을 한꺼번에 집어 들었다. 짭조름한 새우젓에 살짝 찍어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자 족발 특유의 달달하고 쫀득쫀득한 맛이 입안 전체에 퍼졌다.
“하여간 너는 먹는 게 하나도 안 변했냐? 고기도 세 점. 회도 세 점. 은근히 3자에 집착하는 것 같아. 자 한 잔 받아. 족발에는 소주가 최고야.”
나는 고기를 씹던 도중에 잔을 내밀어 그녀가 따라주는 소주를 받았다.
“캬... 좋구나.”
“이야기 좀 하자.”
“있어봐. 네 이야기 들으면 식욕 떨어질지도 모르니 일단 배부터 채우고.”
앉자마자 허겁지겁 고기부터 먹는 내 모습에 화가 좀 풀렸다고 생각했나보다. 먹을 것은 먹을 것이고, 화는 화다. 나는 그렇게 쉽게 화가 풀리는 남자가 아니다. 어디서 겨우 족발 하나로 내 기분을 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가까이 살면서도 족발은 너무 오랜만에 먹는 것 같았다. 일단 고기의 참맛을 느꼈으니, 이젠 쌈을 싸먹어 줘야 한다. 상추에 깻잎 하나를 올리고 고기 세 점을 그 위에 얹었다. 마무리는 역시 쌈장에 찍은 마늘.
나는 진경이에게 먹어보라는 소리도 하지 않고 열심히 족발을 먹었다. 그 모습에 기가 차는지 그녀는 내가 먹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끔 소주잔만 채워줬다.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는 나도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화를 내기는 했는데, 시연이 때문에 어느 정도 그 화가 좀 풀리고 나니 계속 화를 내기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속없는 인간처럼 실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이야기 해.”
족발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다.
“미안해.”
“그 말은 필요 없고. 너도 알겠지만, 너는 내 믿음을 이용했어. 그냥 미안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지. 이렇게 뒤에서 공작을 펼쳐놓고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날 너무 쉽게 봤어.”
“공작이라니? 어떻게 보면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책이 많이 팔릴 테니, 수입도 늘고. 게다가 사진으로 본 네 여자 친구 엄청 미인이더라. 남자들 엄청 꼬일걸? 그런데 공개적으로 애인이 있다고 공개하는 거잖아. 얼마나 좋은 기회야.”
“지랄. 그걸 왜 네가 걱정하는데. 그런 쓸데없는 소리할 거면 나는 먼저 일어나고.”
정말 한마디로 ‘지랄’이다. 나도 오지랖이 넓은 편이지만, 남의 연애사까지 간섭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출판하는 책 많이 팔아보겠다고 사람 뒤통수 쳐놓고는 이런 식으로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면 곤란하다.
“자... 잠깐. 솔직히 나도 처음엔 절대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그런데 사장이 인터넷 서점이다 뭐다 하면서 사업을 몇 번이나 말아먹었거든. 그것도 1년 사이에. 그러다보니 회사 형편이 어려워졌어. 수당도 대폭 삭감되어서 거의 월급만 받고 사는데, 솔직히 직장생활하면서 월급만 받고 살기 힘들잖아.”
그건 맞는 말이다. 나 또한 순수한 월급만 따지면 그렇게 큰돈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9급 1호봉인 공무원 월급이 약 백만 원이다. 막말로 하루 8시간 아르바이트를 해도 한 달에 그와 비슷한 돈을 받는다. 그렇지만 정근수당, 성과수당, 가족수당, 초과근무수당, 관리업무수당, 급식비, 직급보조비, 교통비 등 수당으로 받는 돈이 거의 월급만큼 된다. 그러니 월급만 가지고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그게 내 뒤통수를 친 이유로 납득하기는 어렵다.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사장은 자꾸 하라고 강요하지. 이 책만 성공하면 삭감한 수당 다시 올려준다고 하니,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주지. 그런데 너는 절대 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 않지. 그래서 내가 네게 부탁하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이렇게까지 왔다. 미안해.”
“회사가 어려우면, 회사를 옮기면 되잖아. 너는 경력도 있겠다. 출신 대학도 나쁘지 않겠다.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
나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계속 다닌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진경이는 나와 상황이 다르다. 나이도 겨우 서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력이 6년이면 취직은 어렵지 않다. 경력이 3년도 되지 않아 다시 시작해야 했던 나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래도 마음은 자꾸 약해진다. 냉정한 척 해도 다른 사람의 상황이 어렵다고 하면 이상하게 동정이 가고 이해가 가려고 한다. 그래서 김 대리도 쉽게 이해 해버렸고, 최 대리의 어려운 가정형편에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다.
“6년이야! 6년 동안 같이 일한 사람들을 상황이 어렵다고 팽개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나도 뭐 좋아서 계속 다녔는지 알아? 사장이 오늘 일을 가지고 ‘이래서 여자들에게 일을 시키면 안 된다.’하더라. 나도 이번일은 내 잘못인지 알아. 그래도 그동안 출판사 말아 먹은 게 누군데. 누구 때문에 우리가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일하는데. 어휴. 정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혼자 열 받은 진경이가 소주를 연거푸 세 잔을 마시면서 짜증을 냈다. 보아하니 사장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진경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틈을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사장이 사고 많이 쳤어?”
“그럼. 말해 뭐해? 우리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모가 예쁜 작가에게 빠져서는 억지로 밀어붙였다가 말아먹었지. 이미 인터넷 서점은 제대로 낄 틈도 없는데, 자신 있다고 덤벼들어갔다가 엄청 손해만 보고 접었지. 휴, 내가 정말 속상해서 못 살겠다. 우리가 계약했던 작품들 중에 스테디셀러도 어느 정도 있어서, 조용히 그것만 팔았어도 직원들 월급은 제대로 줬어. 빌린 돈에 대한 이자는 예전 사장님이 계약했던 책으로 겨우 메꾸고, 그러면서도 만드는 책은 말아 먹으니 감당이 안 된다. 그래도 그렇게 말아먹으면서 보는 눈은 좀 생겼는지 네가 만든 책은 무조건 될 것 같다며 밀어붙여서 일이 이지경이 된 것 아니야.”
살짝 자리만 펴줬더니 회사 사정을 아주 훤하게 이야기해줬다.. 혼자 자작을 하면서 한 맺힌 사람마냥 구구절절한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뭐라고 달리 물어볼 틈도 없었다. 어쨌든 꾸준히 나가고 있는 책이 있다는 사실은 반가웠다.
“너희 출판사는 브로셔 제작도 하냐?”
“그럼. 출판사라고 소설책만 파는 줄 알아? 책에 관련해서 돈 되는 일은 다해. 왜 이번에 네 책 표지 디자인. 그것도 우리가 직접 디자인 한거야. 우리 디자인 팀은 꽤 능력 있거든. 홍대 쪽에서 먹고 살려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어. 예전 사장님은 영업 능력도 좋아서 홍대나 마포에 있는 작은 회사에서 잘도 계약을 따오곤 했는데, 이 인간은 가서 싸움질이나 하고 와서 그 일도 많이 줄었다. 일을 하다보면 사장 급이 직접 가서 영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개를 숙일 줄을 몰라. 그러니 누가 계약을 하려고 하겠어. 사장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면 계약도 큰 건인데. 어휴. 이야기를 하니 계속 속만 상한다. 꿀꺽... 캬...”
계속 자작을 하더니 새로 시킨 소주 한 병을 거의 혼자 비웠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야?”
“뭘?”
“채 사장 말이야. 그 사람이 출판사 말아 먹게 그냥 둘 거야?”
“그럼 어떻게 해? 사장인데. 그래도 이번에 책 잘 팔리면 당분간 숨통은 틔울 수 있어.”
“그것도 미봉책이잖아. 너희 사장이 하는 것으로 봐서는 얼마 못가서 망할 것 같은데.”
“그래도 어떻게 해. 망하면 회사를 옮기던지 해야지. 나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다 보니 저 녀석을 용서하니 어쩌니 하는 일은 그냥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진경이 술주정을 들어주다보니 여기서 더 화내기도 이상했다. 이게 다 시연이 때문이다. 악독하게 마음을 먹고 살려고 해도, 시연이의 사슴 같은 눈망울을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약해진다. 그래도 이용해먹을 것은 이용해먹을 생각이다.
“방법은 있어.”
“무슨 방법?”
“나는 일단 법원에다가 책 판매중지 가처분신청을 낼 거거든. 그리고 소송 기간도중 너희 책을 판매하는 모든 업체에 자금 동결을 요청할거야.”
돌려 말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내가 계획하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해버렸다.
“뭐? 야. 마동수. 너 정말 너무하는 것 아냐? 그럼 우린 죽어.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 생계를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 거잖아.”
진경이는 내 이야기에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맞다. 시연이만 아니었으면 사람 생계를 가지고 장난을 칠 뻔했었다.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나니 너무 과한 생각을 했었다. 이런 나를 미리 막아준 시연가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안 되려면 네가 날도와. 그게 너도 살고, 출판사도 사는 길인 것 같다.”
“뭐... 뭘 도와?”
“네가 회사를 배신하면 돼.”
“뭐? 지... 지금 나보고 뭘 하라고? 배신? 야! 마동수. 너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냐. 너무 야비한 것 아냐?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 작품 후기 ============================
조아라 관계자와 통화를 하다가 e북 이야기가 나와서 고민 중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외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성을 살짝 바꿔 봤습니다. 책은 내용이 계속 연결이 될 것 같아서, 외전을 앞으로 한 번 보내봤습니다. 적당히 문단끼리 간격을 벌려놨는데, 앞에 나와도 글 읽기에 괜찮으신가요?
1인칭 소설이다보니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에서 시연이가 '미안해요'라고 한 말에서 그녀의 마음을 나름대로 표현한다고 했는데, 부족하죠? 그래서 저도 외전을 이용해서 독자님들과 소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외전도 원래라면 이전 편에 함께 나왔으면 더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보니 여러분의 오해가 더 커진 것 같네요.
일반적인 개념에서 독자님과 마찰을 빚는다고 하셨는데, 가장 큰 원인은 연재 소설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가 글을 쓰는 스타일이 챕터의 초반보다 중후반에 이야기의 속내를 풀어내곤 해서 해당 편만 읽으면 답답하실 때가 많으실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더 많은 독자님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오늘은 새해 기념으로 1시간 안에 2편 더 올리겠습니다. 기다려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_)_
추천과 코멘트 많이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