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붉게 물든 나폴리 항구의 아름다운 모습은 잠시, 피터팬이 나타나 당장에라도 나를 네버랜드로 데려갈 것 같은, 환상에 빠질 만큼 몽환적이고 신비로웠다. 휴, 다 끝났다.”
나는 시연이가 준 다이어리를 덮으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생각보다 엄청 많은 양이었다. 대체 여행을 다녀와서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길래 이런 많은 양의 글을 적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본사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은 나는 그때부터 설렁설렁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틈틈이 시연이가 준 여행일지(?)를 읽었다.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잘 만든 여행일지였다. 20살 소녀가 처음 떠나는 낯선 여행에 대한 두근거림과 맑고 깨끗한 시선으로 바라본 유럽 전역의 모습들이 풋풋하고 아기자기하게 적혀 있어서, 읽는 나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글을 다 읽은 후 곧바로 시연이에게 여행가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고, 그녀의 글과 사진을 컴퓨터 파일로 옮기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연이 몰래 책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끔 적혀 있는 나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글은 일부러 뺐다. 그래도 문맥상 잘 어울려 빼기 아까운 부분은 고국의 부모님이나 친구를 떠올리게끔 약간의 수정만 해서 남겨두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100권정도 만들어 시연이를 아는 사람에게만 기념으로 돌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글과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면서 시연이가 쓴 글을 천천히 음미하다보니 정식으로 출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판단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출판사를 다니고 있는 여자 대학동기를 찾아갔다. 나는 동기를 만나 시연이의 여행일지와 내가 편집한 파일을 넘기며 평가를 부탁했다.
“오. 마동수에게 예쁜 아가씨가 생겼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사람이 만든 거라 이 말이지? 우리 과 10년 후배라며? 그럼 한 번 봐줘야지.”
그냥 읽어보라고 넘기고 내일 와서 의견을 물어보려고 했던 나는, 대학동기의 장난기 어린 적극성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가 시연이의 여행일지를 다 읽을 동안 멀뚱멀뚱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읽더니 조금 시간이 지나자, 동기는 자세를 바로 잡고 진지한 자세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야. 이거 괜찮다. 소녀의 감수성이 너무 잘 표현됐어. 우리가 출판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어? 나도 읽어보고 괜찮다 싶어 조언이나 구하려고 왔는데. 나는 좀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서 긴가민가했거든.”
정말 확신은 없었다. 읽으면서 혼자 읽기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책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동기의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다.
“사진도 전문가 느낌 없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좋아. 비전문가라서 그런지 톡톡 튀는 재기발랄함이 있어. 요즘 여행서적은 초보자의 마음으로 발행된 책도 꽤 인기가 있는 편이거든. 게다가 문체에서 묻어나는 풋풋한 감수성 때문에 글 자체가 주는 재미도 쏠쏠해. 솔직히 여행안내서적이라기 보다는 여행에세이 같아. 그래서 말인데 다이어리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안 될까?”
“하하하. 장난이지?”
당연히 안 된다. 지금 이렇게 내 멋대로 책을 내는 것도 어떻게 보면 실례다. 그리고 내가 일부러 뺀 부분들은 시연이가 내게 말하는 우리 둘만의 은밀한 세레나데와 같은 것이다. 이런 내용을 내 마음대로 공개해버리면 그건 정말 실례가 된다.
“진담인데.”
“그럼 다른 쪽에 가보지 뭐. 너 말고 00학번에 출판사에 다니는 녀석 한 명 더 있는 것 알지? 후배니까 더 잘해주겠지. 난 간다.”
“에이. 농담. 농담이야. 호호호. 그럼 우리와 계약하는 거야. 내일이라도 여자 친구 데려와. 그럼 바로 계약하고 교정봐서 출판할게.”
“흠흠. 그게 말이지. 내가 여자 친구 몰래 만드는 거라서 말이지. 나 나름대로의 깜짝 선물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호호호. 아이고, 마동수 정말 많이 변했다. 덩치는 곰 같은 녀석이 이게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이래? 깜짝 선물? 어린 후배랑 사귀더니 애처럼 변한거야?”
“웃지 말고. 가능한지만 말해.”
“가능은 해. 대신 뭐 권리를 모두 넘긴다는 각서 같은 거라도 받아와. 그래도 인세는 네가 먹을 것 아니잖아? 통장번호랑 주민등록증 사본이 필요한데. 뭐 그건 인세 줄 때 필요한 것이니 일단 넘어가자. 그리고 음. 맞다. 내가 좀 이따 종이 하나 줄 테니까 다이어리에 그려진 그림들 있지? 그거 좀 다시 그려달라고 해.”
동기와 헤어진 후 시연이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다이어리에 적힌 사진과 글에 대한 권리는 모두 내게 넘긴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그녀는 호기심에 커다란 눈을 껌벅이면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각서를 완성했다. 그리고 동기가 준 종이에 다이어리에 있는 그림들도 그리게 했다.
“그림은 뭐하려고요?”
“네가 쓴 다이어리를 읽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일할 때도 좀 써볼까 싶어서.”
“우와. 그런 것도 가능해요?”
“그럼 가능하지. 참 주말에 놀이공원에 놀러와. 9월이라 그런지 경치가 예전과는 또 달라졌어. 그리고 나도 다음 주 월요일이면 본사에서 다시 출근하거든. 그전에 마지막으로 놀기도 하고, 사람들이 시연이 네가 홍보모델을 해준 덕분에 방문객이 늘었다고 나 송별회 할 때 같이 데려오라고 하네.”
“네. 저도 좋아요. 그리고 선생님. 저도 이제 카메라 바꿔보면 안될까요?”
“하하하. 그러게. 사진 많이 늘었더라. 꼭 내 카메라와 같은 것으로 할 거야?”
“이왕이면요.”
“그럼 토요일에 일단 선생님 카메라로 한 번 찍어봐. 몇 시간 들고 다니면서 얼마나 무거운지 겪어봐야 사놓고 후회하는 일이 없지. 괜찮지?”
“네. 좋아요. 히히히.”
시연이를 바래다주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시연이의 행동이 이상하게 유혹적이었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쑥 내밀기도 하고, 팔짱을 낄 때도 그녀의 가슴이 내 팔에 더 많이 닿는 느낌이었다. 시연이는 그냥 순수하게 나를 대하는 것일 텐데, 그런 것을 의식하고 있는 나만 짐승이 된 것 같아 미안했다. 솔직히 20살 여자와 자본 적은 몇 번 있다. 그렇지만 그때는 나도 비슷한 또래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같은 20살인데 자꾸 내 나이가 의식이 되다보니 행동이 조심스럽다. 이놈의 죄책감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시연이에게 어색하게 대할 것 같아 걱정이다.
다음날 이사님에게 보고만 하고 서울로 다시 왔다. 요즘 내 생활은 말년병장과 비슷한 삶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것도 마음 좋은 행보관을 만나 아주 탱자탱자 팔자 좋게 놀고 있는 말년병장이다. 동기를 만나 시연이가 작성해준 각서를 보여주고 직접 계약을 맺었다. 책의 가격은 15,000원으로 하고 5,000부까지는 5%, 10,000부까지는 7%, 그 이상은 10%의 인세를 받는 것으로 계약했다. 설마 10,000부까지야 팔리겠느냐마는 그래도 이렇게 계약을 하고나니 어느 정도는 팔릴 것 같은 기대가 든다.
기분 좋게 계약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장희가 뭔가를 놓고 끙끙 앓고 있었다. 이제 일을 시작하는 입장이니 배울 것도 많고 고민거리도 많을 것이다. 저 거머리가 나를 귀찮게 하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아 살금살금 걸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야! 마탱이.”
“응? 어 그래 밤톨. 일은 잘하고 있냐?”
“나는 이렇게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넌 요즘 계속 노는 것 같더라? 좀 너무 한다고 생각 안 해? 동기가 고생하면 옆에 와서 거들 생각은 안하고 의리 없이 말이야.”
“에이. 나는 며칠 후에 본사로 돌아가잖아. 너는 알랑가 모르겠다만 내가 너 없는 동안 엄청 고생했거든. 그래서 이사님이 이렇게 방목시켜 주시는 거야. 하하하.”
“월급 받는 놈이 그런 게 어딨어?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봐.”
하여간 거머리가 따로 없다. 하는 짓은 강소현과 닮았는데, 동기라서 그런지 아니면 회장 딸이라서 그런지 내가 자꾸 작아진다. 이렇게 되면 강소현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내가 장희집 개도 아니고, 사나이 자존심에 부른다고 달려갈 수는 없다.
“나 바쁜데. 무슨 일이야?”
“바쁘긴 무슨. 노느라 바쁜 거 다 알아. 잔말 말고 여기 일단 앉아봐.”
“매출 증대를 위한 방안 모색이라. 야. 난 이제 그런 일에서 빼주면 안되냐?”
“아이디어 하나만 주고 가라. 응?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부탁을 안 한다. 본사에서 빵빵하게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나도 골치야. 현호 오빠가 본사에 들어가면 도와준다고 했다만, 그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기다릴 수는 없잖아. 나도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하고 왔는데, 전부 돈이 많이 드는 장기 프로젝트라 당장 쓸모가 없어. 한번만? 응?”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콩알(?) 만한 아이들이 조르면 이상하게 거절을 잘 못한다. 저렇게 불쌍한 눈으로 날 쳐다보면 외면할 수가 없다.
“음. 하나 있기는 한데. 좀 치사한 방법이기도 하고, 나나 고 이사님이 진행하면은 욕먹을 게 걱정이 돼서 관뒀던 것이 있긴 있어.”
“오. 역시. 있긴 있구나. 뭔데? 응? 뭔데?”
“너 회장님께 사랑 좀 받냐?”
“아빠한테? 그럼 그래도 내가 막내에다 유일한 딸 아니냐. 우리 아빠가 좀 엄하긴 해도 내 부탁은 오빠들보다 잘 들어주는 편이지.”
무서운 독재자라고 해도 역시 피붙이에게는 조금 약한 모습이 있다.
“너 내부거래라고 알지?”
“뭐야? 동심이 가득해야 할 곳에 그런 좋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는 저의가. 그리고 동지랜드와 다른 계열사 간에 내부거래 할 일은 또 뭐가 있다고? 이 자식! 나를 그런 파렴치한 일에 끌어들이려는 것이냐?”
부당 내부거래는 나쁘다. 그렇다고 내부거래 자체를 완전히 근절할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가 자기들 직원에게 직원가로 차를 할인해주면 그것도 내부거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회사의 경우도 섬유에서 만든 옷이나 식품에서 만든 제품을 구입할 때는 할인해주는 해택이 있다. 그리고 그런 할인혜택은 직원들의 복지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세금할인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전부 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공정하지 못 한 거래다. 그렇지만 그런 거래가 공공연한 것도 사실이다. 설사 할인혜택이 없다고 해도, 현대자동차 직원이 다른 회사 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삼성전자나 엘지전자 직원이 타사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닌다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그냥 그런 정도의 가벼운 내부거래를 해보겠다는 뜻이다.
“뭘 또 파렴치하다는 표현까지 써. 너도 생각 해봐라. 현대자동차 직원이 대우차 끌고 다니면 좋게 보겠냐? 그리고 우리 회사 직원이 다른 회사 주유소를 이용하면 좋겠냐?”
“그. 그런가? 하긴, 내가 옷을 살 때도 우리 회사 제품을 먼저 찾아보긴 한다.”
“그러니까. 놀이공원도 연간회원권 같은 것을 우리 직원들에게 할인된 가격에 팔자는 것이지. 여기 있는 우리 직원들도 웬만하면 우리 그룹에서 만드는 제품을 이용하는데, 그들도 우리 놀이공원을 자주 이용한다고 해서 나쁠 것이 뭐가 있어? 이 오라버니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밤톨아?”
“그건 또 그러네. 우리는 왜 그동안 그룹에 회원권을 안 팔았데?”
“팔긴 팔지. 그런데 홍보도 미흡하고, 강제적인 성격도 없으니 거의 이용을 안 하지.”
“그래서?”
답답하다. 고 이사와는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 녀석에게 놀이공원을 믿고 맡겨도 되는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니까. 네가 회장님에게 가서 계열사 사장들에게 할당을 주라고 부탁을 좀 해보라는 말이야. 너무 강제적이지 않게 은근히 말이야. 회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기만 해도 계열사 사장단에서는 알아서 나설걸? 예를 들어 ‘왜 우리 그룹은 동지랜드 회원권 판매가 이렇게 지지부진 하지?’라는 식으로 한마디만 하시면 돼.”
아들이 이런 부탁을 하면 모자란 녀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막내딸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또 다르다. 약간의 애교를 부리면서 조금만 신경을 써달라고 하면 된다. 엄청 많은 돈을 지원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게 다 회사매출증대와 사원복지강화가 된다. 사원복지를 명목으로 할인금액만큼 비용처리하면 세금감면도 받으니 일석삼조다. 이 녀석은 그 정도까지는 아직 무리지만, 회장님이라면 충분히 계산하고 남을 일이다.
“정말. 그 정도만 부탁하면 되는 거야?”
“그럼. 너는 그냥 약간의 애교만 부리면 돼. 그리고 우수 사원에게 주는 상품을 우리 리조트 이용권만 줄게 아니라 놀이공원 이용권도 같이 이용하면 더 좋고. 참. 회장님이 ‘알았다’라고 하시면 회사 사보에서 일하는 사람들 불러서 대대적인 홍보도 좀 해.”
“응. 알았어. 그것도 적어놔야겠네.”
내 말을 열심히 적고 있는 장희를 보면서 얼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정말 놀이공원을 위해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주말에 시연이와 실컷 놀고 나면 여기도 이제 안녕이다.
◆ 서강대학교 솔밭
동수가 만났던 출판사에 다닌다는 대학동기가 벤치에 앉아 마테오관 방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키가 크고 늘씬한 미녀가 두리번거리며 솔밭 근처로 다가오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얘. 너 시연이 맞지? 여기야 여기.”
“아. 안녕하세요. 전화주신 우진경 선배님 맞으신가요?”
“응.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좀 보자고 했어. 동수일로 물어볼 것이 있거든.”
시연은 동수이야기가 나오자 재빨리 진경의 옆에 앉았다.
“선생님일로요? 무슨 일이신데요?”
“호호호. 너 동수보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네”
진경이 웃으면서 묻자, 얼굴이 빨개진 시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것 참 신기하네. 동수는 원래 자기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동수의 친구들에게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자 시연의 표정이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변했다.
“정말요?”
“그건 좀 이따 이야기하고. 얘. 시연아. 원래 동수와 약속을 해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거든. 그런데 너무 안타까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만나자고 했어.”
“무. 무슨 일이 있어요?”
시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경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시연이었다.
“걱정 마. 나쁜 일은 아니니까. 동수가 네게 줄 깜짝 선물을 준비하고 있거든.”
“네? 그게 뭔데요?”
“네가 여행가서 만든 여행일지 있잖아. 그거 동수에게 선물로 줬다며?”
“아이 참. 부끄럽게 그런 이야기도 해요?”
“상황이 그랬어. 그전에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비밀이다. 알았지?”
“그럼요.”
시연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원래는 동수도 혼자만 보려고 했겠지. 그런데 글이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서 너 몰래 책을 만들려고 했어. 내게는 혹시나 싶어 가져왔나봐. 출판이 가능한지.”
“그런데요?”
“나쁘지 않았어. 아니 참신하고 풋풋해서 너무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우리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계약을 했지. 혹시 동수에게 각서 같은 것 써주지 않았어?”
“네. 맞아요.”
“그래. 네 대신 책을 내려고 그런 거야. 그런데 동수가 편집한 내용과 네가 쓴 여행일지 사이에 빠진 내용이 있더라고. 네가 동수에게만 남긴 글귀 같은 것들은 뺐어.”
“와. 감동이에요. 선생님이 그런 것을 다 준비하셨대요? 그리고 제가 선생님에게만 쓴 내용이 빠진 것도 참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좀 부끄러웠을 것 같았는데. 히히”
진경은 시연이의 환한 미소를 보며 승부수를 던질 때가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연이의 글이 여행 에세이로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빠진 글귀들에 달려있다는 것이 출판사의 판단이었다.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사장의 강요와 직원들의 설득에 진경도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 동수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시연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혹시 예전에 동수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알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럴 것 같긴 해요. 너무 멋있잖아요.”
시연의 대답에 진경은 웃음이 나왔다. 동수가 어느 정도 멋있는 것은 사실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도 남자답게 시원하게 생겨 동기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연과 비교하기에는 무리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소녀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아직 자각하고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맹점을 진경은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책을 출판하면서 ‘동수는 내 남자다.’라고 세상에 확 알려버리는 것이지. 그럼 동수에게 접근하는 여자도 없을 거야. 책을 출판함과 동시에 동수는 완벽하게 시연이 네 차지가 되는 것이야.”
“정말 그럴까요?”
시연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했다. 진경은 저 어린것에게 사기를 치는 것은 미안했지만, 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과감해지기로 결정했다. 표정을 보니 거의 넘어왔다. 결정적인 한방만 먹이면 된다.
“그럼. 당연하지. 그리고 네가 잘 모르는 동수에 대해서 많이 알려줄게. 간혹 가다 동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남자가 보는 동수와 여자가 보는 동수는 또 다르거든. 어때? 내 말대로 할래?”
“네. 할게요. 저 할래요.”
“호호호. 잘 생각했어. 그리고 혹시 책에 붙일 제목 같은 거 있을까? 우리도 생각해봤는데 우리 같은 늙은이보다는 작가의 의견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있어요. 원래 다이어리 맨 앞에 써 놓으려다가 부끄러워서 말았던 제목인데요.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 어때요?”
“호호호. 역시. 제목 좋다. 20살 소녀가 여행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움이 가득 담긴 마음을 수줍게 전한다. 느낌 있다. 제목은 그것으로 결정.”
“그럼 다 된 거예요? 선생님 이야기는 언제 해주실 거예요?”
시연에게는 지금 책의 출판보다 요즘 와서 자꾸 자신을 조금씩 어색해하는 동수에 대한 정보가 더 중요했다.
“그럼 내일 우리 출판사로 좀 나와. 여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좋겠지? 그리고 동수에게는 비밀이다. 나중에 욕은 내가 먹을 테니까 너는 책 선물 받을 때 놀란 척 해야 해.”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에게 한 번도 거짓말해본 적이 없는데.”
“이그. 여자가 그러면 안 돼. 잘되자고 하는 일이잖아. 여자는 조금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아. 신비해 보이잖아. 너무 자기를 확 드러내는 여자 인기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줄게.”
“그런 거예요? 그럼 내일 뵐게요. 고맙습니다.”
“호호호. 아니야. 내가 더 고맙지. 그럼 내일 보자.”
진경은 나중에 노발대발할 동수의 모습이 떠올라 약간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게 다 동수를 위하는 일이다. 시연이가 책을 통해 ‘나는 임자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선언하면 그녀에게 붙을 파리 떼가 반 이상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진경은 오히려 동수가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며 자신을 합리화 했다. 그래야 미안한 마음이 덜어질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치사한 면이 점점 나옵니다. 바텐더의 일도 그렇고, 장희에게 내부거래를 종용하는 것도 그렇고. 성격이 항상 정당하지만은 않습니다.
밑에 글은 그냥 서동요에 대한 간단한 제 의견입니다. 지루할 수도 있으니 과감하게 패스하셔도 괜찮습니다. ^^
단군신화처럼 서동요의 경우도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백제 문왕의 부인은 신라왕의 딸이다. 이벌찬의 딸이다. 백제 귀족의 딸이다. 주장하는 설만 해도 여러 가지죠. 고대사다보니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백제 귀족의 딸이라는 근거가 되는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봉안기도 오히려 서동요가 실화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왕흥사의 건립에 35년이 걸렸음을 감안한다면 그보다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의 건립에는 얼마가 걸렸는지 정확하게 추정하기 힘듭니다. 그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한다면 선화공주가 사망하고 나서 완공되었을 가능성도 있죠. 그렇다면 미륵사의 완공 때는 후궁 또는 계비였던 백제 귀족의 딸이 왕후가 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서동요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삼국유사입니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고 무왕으로 등극한 후 그녀를 위해 미륵사를 지었다는 이야기인데,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학계에서는 기사라고 치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동안 미륵사의 건립은 무왕 이전의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에 발견된 사리봉안기는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사실은 실재 역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거의 1,000년 전 일이라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주장들은 전부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무왕은 서동으로 수정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