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9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드디어 이사가 끝났다. 예전 같으면 친구들 불러서 같이 짐을 옮기느라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요즘은 돈만 있으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포장이사를 불러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풀 옵션이고 학생 때부터 쓰던 물건들이 대부분이라 거의 버리고 오다보니 막상 옮겨야 할 짐은 책을 제외하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전날은 아현동에 있는 가구단지에 들러 책상과 의자, 침대, 테이블, 2인요 소파까지 제대로 질렀다. 특히 침대는 유명 가구 매장에 들러 100만원이 넘는 퀸 사이즈로 구입했다. 뭐니 뭐니 해도 잠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쓰던 침대는 제대하면서 산 침대다. 횟수로 5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쓸 만하지만 내 덩치를 생각해보면 좀 작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일어날 때마다 삐걱삐걱 하는 소리가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봐꿨다. 사실 동생이 신혼침대를 자랑했는데 좀 많이 부럽기도 했다. 앞으로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공덕 오거리에 있는 20평형 오피스텔을 전세로 계약했는데 아직 거의 새 건물이라 커튼만 바꿔 달았는데도 깔끔하고 좋았다. 회사 근처로 잡을까 했는데 너무 비싸기도 했고 회사와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좋다는 생각에 그냥 이곳으로 정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마포를 떠나기 힘든 운명 같다. 주문했던 42인치 TV가 도착해서 거실에 놓자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았다.
“으아~. 여기가 내 집이야? 이렇게 해놓고 보니 꽤 좋은데. 또 필요한 것은 없나? 아 여기다 아까 과장님이랑 봤던 그 차만 사면 딱 인데. 아 사고 싶다. 안되지 안 돼. 이제 겨우 2년 넘은 내 불쌍한 소렝이(소렌토)를 버릴 수는 없지.”
나는 요즘 매일같이 지름신과 싸우고 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더 잘 먹는다고 딱히 뭘 사고 싶어도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 정도 크기의 집(전세금이 1억 8천)과 편안한 침대 그리고 신형 TV. 끝이다. 전세금은 나갈 때 가져나가는 것이니깐, 결국 5백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거의 만족했다.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자동차다.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자동차. 한 때는 시계에도 집착했지만 건전지가 떨어진 시계를 놓고 다니다보니 지금은 없는 게 더 편해졌다. 휴대폰도 있으니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차는 그렇지가 않다. 매일 인터넷을 검색하며 멍하니 구경만 하고 앉아 있다.
에이 그냥 사. 그럼 지금 차는? 팔아? 그렇게 되면 다들 내 차가 바뀐 것을 알 텐데 뭐라고 변명을 해? 그럼 두 대를 몰고 다녀? 세상에 그런 낭비가 어디 있어? 그렇게 되면 추가로 내는 세금이 얼만데? 한 사람이 두 대의 차를 몰고 다녔다간 바로 세금폭탄 맞는다. 게다가 아직 지금 내차는 관리를 잘해서 거의 새 차나 다름없다.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Rrrr
세브란스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고 있는 윤석이었다.
“그래. 닥터 리. 무슨 일이야? 술 한 잔 사라고?”
“술은 무슨. 술을 사려면 내가 사야지. 뭘 또 집에 선물까지 보내고 그랬냐?”
“그냥 겸사겸사. 좋아하시지? 으하하하.”
“그래. 이 놈아 좋아하시더라. 안 그래도 너희 부모님만 올라가서 건강검진 받으시는 바람에 심기가 불편하셨는데, 너희 어머님이 선물 들고 찾아가셔서 내 칭찬을 하도 많이 사셔서 입이 귀에 걸리셨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 조금만 신경 쓰면 모두가 편한 길이 있는 법이다.
“역시. 하하하. 난 가끔 내가 천재 아닌가 싶어.”
“나도 너 보고 놀랐다. 회사 들어가더니 완전 능글 이가 된 것 같아.”
“너도 직장생활 해봐라. 눈치 볼 사람 많아서 사는 게 피곤하다. 야”
“나도 직장인이야. 이거 왜 이래? 아무튼 너 하는 것 보고 많이 배웠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렇게 예쁘게 하는지 나도 환자분들에게 좀 더 친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꼭 그렇게 해라. 내가 이야기했지? 예전에 우리 아버지 아프실 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던 그 의사새끼.”
아직도 그 의사의 모습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의 수술경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의사가 한다는 말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였다. 그때 우리 어머니 그 말 듣고 쓰러지셔서 한 동안 정신도 차리지 못하셨다. 지금은 건강하게 회사 잘 다니시는 우리 아버지를 보고 가망 없다고 하다니 돌팔이 의사새끼. 우리가 의사말을 듣고 포기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의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 인간은 지금까지 용서가 안 된다.
“그럼 알지. 네가 한동안 술만 마시면 그 욕을 했잖아. 나보고 맨날 너는 제대로 된 의사되라면서 구박했는데 내가 기억 못 할까봐?”
“그렇지? 그래 그러니깐 너는 좋은 의사되라. 그런 의미에서 주말에 시간 한번 내라.”
“내려면 낼 수야 있지. 왜?”
“우리 과가 고아원하고 자매결연 하면서 거의 매주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찾아가고 있거든. 거기가 좀 시골이라 네가 가서 노인분들하고 애들 건강검진 좀 해줘라.”
“야! 싫어. 우리도 두 달에 한 번씩은 봉사활동 다녀. 나도 좀 쉬어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좀 전에 좋은 의사 된다며? 내가 대신 그날 예쁜 여자 후배들만 모아서 데려갈게. 어때? 너도 친구 좀 데려오고. 즉석 소개팅을 하는 거지. 너도 알겠지만 거기 오는 애들은 마음도 예쁜 애들이야.”
“음. 그런가? 그래도 약이랑 뭐 아무튼 준비하려면 비용도 드는데.”
역시나 여자에 약하다. 언제 제대로 여자 볼 시간이나 있었겠어? 봐도 맨날 씻지도 못해 구질구질한 같은 의사밖에 없다. 이정도면 거의 넘어 온 것이다. 정말 여기까지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큰 부담 없이 건넨 홍삼절편이 이런 일까지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역시 한국은 ‘정’이 중요한 곳이다.
“걱정 마. 걱정 마. 우리 선배님들 바빠서 참여 못한다고 항상 아쉬어 하시거든. 그렇게 돈 쓸 일 만들어 드리면 좋아하셔. 그리고 너도 깔끔한 애들도 좀 만나봐야지 않겠냐? 만날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병원에서 꼬질꼬질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동기들만 보면서 살고 싶냐? 공기 좋은 곳 가서 고기도 구워먹고 그렇게 놀 수도 있어. 알았지?”
“알았어. 와. 너 정말 무서운 놈이 되었구나. 그래도 예전엔 정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무섭다 무서워.”
역시 넘어왔다. 하는 김에 일을 좀 크게 벌여야겠다. 동문회에 말해서 물품 지원도 좀 받고 국회 계신 선배님들에게 가서 돈도 받아내고. 그 분들이야 바빠서 사진만 찍고 가시겠지만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 신문사에 계신 선배들에게도 연락을 해야겠다. 봉사활동도 하고 후배들 재롱도 보고, 취재도 하고 완전 일석삼조다. 나 같은 사람 정말 없다. 불쌍한 의사 소개팅 시켜줘. 정치하시는 선배님들 선거운동 해줘. 선배님들이 다니는 회사 위상 높여줘. 기사거리 없는 선배 일 만들어줘.
“야 꼭 다른 과로 5명 이상 구해야 해! 그리고 약품에 대한 예산서 만들어서 보내주고. 내가 신문사 다니는 선배들도 데려갈 테니깐 봉사활동을 원래 좋아하거나 신문에 얼굴 비추는 것 좋아하는 펠로우 선생들 계시면 은근슬쩍 찔러봐. 알았지?”
“야 그걸 내가 어떻게 해? 그냥 친구들만 데려가면 안 될까?”
어휴 저 순해빠진 녀석. 그러니 어릴 때도 친구가 없어서 빌빌거렸다.
“그럼 명단만 수배해 놔. 네가 예산서와 참석자 명단만 확정해주면 내가 선배님들에게 결재 받고 봉사활동 계획서 만들어서 직접 말씀드릴게. 규모가 커졌으니깐 한 달 정도 여유를 두자. 그래야 높으신 분들이 스케줄 조정해서 움직이지. 일단 예산서는 바로 보내.”
세상을 보면 남을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서 돕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아주 일부지만 봉사단체들 중에는 가끔 어이없는 횡령을 저질러 전체의 이미지를 망치고, 그것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긴다. 선배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이고, 그런 분들에게 우리의 취지를 잘 알리면 두 손 걷어붙이고 도와주실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일을 좀 너무 키운 경향이 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다.
“그래 알았어. 야! 근데 말이 왜 이렇게 흐르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때문에 전화한 것 아니거든?”
“그래? 그럼 무슨 용건이라도 있었어?”
“응. 검진 결과 나와서 전화했어. 원래 내일 나오는 건데 내가 오늘 미리 받아봤어. 괜찮지?”
괜히 건강검진 이야기가 나오니깐 걱정이 되었다.
“당연히 괜찮지.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
“너희 부모님은 건강하셔. 아버님이 약간 혈압이 있으시거든. 아주 약간 높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운동 좀 하시고 채소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면 금방 정상으로 돌아오실 거야. 거의 문제없는 수치인데 그래도 미리미리 건강 챙기시는 게 좋잖아. 예전에 한 번 쓰러지신 병력도 있으시니깐”
“그래 고맙다. 꼭 그렇게 할게. 그리고?”
“상수 장인어른은 건강하신데, 장모님 쪽이 조금 문제가 있어.”
“아이씨! 그걸 왜 지금 이야기 해.”
“야야야. 진정해. 릴렉스. 네 이야기 할 기회를 줬냐? 그리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정밀 검사하고, 조직검사를 다시 해보면 정확한 것을 알 수 있어.”
“그래서 병명이 뭔데?”
“자궁체부암일 가능성이 있어."
“암?”
“그래도 초기에만 발견되면 완치가 가능한 병이야. 걱정하지 마. 원래 병 자체가 초기에 출혈이 일어나는데 그 때 검사받고 수술 받아도 거의 완치돼. 근데 상수 장모님의 경우는 아직 그 정도도 진행된 것 같지가 않아. 그러니깐 안심하고 일단 검사부터 받자.”
“그렇단 말이지. 일단 알았어. 나중에 동생이 전화하면 설명 잘해줘. 고마워.”
“그래”
나는 윤석이의 말에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우선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윤석이의 말처럼 암 중에서는 그나마 완치가 가능한 병이었다. 의사인 친구의 말을 못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을 하고나니 안심이 되었다. 이제 동생부부가 놀라지 않게 잘 전달하면 된다. 동생에게만 이야기 할 까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별로 이런 쪽 일에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내가 이야기를 전하면 되는데 다만 제수씨가 임신 중이라 걱정이었다. 생각은 차안에서 하기로 하고 일단 동생 집으로 향했다.
Rrrr
“어 형. 이사는 잘했어?”
“그래. 언제 한 번 놀러와. 깔끔하고 좋아.”
“그래? 내가 도와준다니깐 왜 못 오게 하고 그래? 여자 친구라도 숨겨둔거야?”
“그래. 여자 친구 숨겨뒀다. 이놈아.”
“진짜? 여보야! 여보야! 여기 와봐. 빨랑. 형 여자 친구 생겼데.”
이놈은 평생 반어법이라는 것은 모르고 살 놈이다. 이야기를 꺼낸 내가 잘못이다.
“야! 마 상수. 농담이야. 내가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 그냥 포장 이사 불렀으니깐 올 필요 없다는 거지. 네가 여기 오면 제수씨가 심심하잖아.”
“응. 그건 그래.”
“그런데. 어디야? 집이야?”
“응 집이야. 왜 형?”
“지금 너희 집으로 가는 중이니깐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자.”
“응. 알았어. 형 여자 친구 있다는 말 농담이었데. 근데 지금 형 우리 집에 오고 있다는데 어떡하지. 지금 먹고 있는 통닭 빨리 먹어 치우고 냄새부터 없애자.”
내가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는지 전화기를 통해 계속 이야기가 들려왔다. 끙. 내가 앓느니 죽지. 그냥 내가 전화를 끊고 운전에 집중했다.
============================ 작품 후기 ============================
그리고 글을 읽다가 이상하거나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꼭 이야기 해주세요. 이런 방식의 연재는, 서로가 소통하면서 피드백을 통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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