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지랄이 풍년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신입사원 받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이런 절망적인 회사에서 우울한 연말을 보내면서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나도 3년차가 되었다. 명함에 주임이라는 직급이 들어간다. 시작부터 뭔가 조짐이 좋다. 틀림없이 똘망똘망한 후배가 들어와 나의 아픔을 나눠줄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내가 다니는 ㈜동지는 우리나라 재계순위 5위의 무척 큰 그룹이다. 전자, 식품, 조선, 정유, 섬유, 리조트 등 세계에서도 경쟁력 있는 계열사가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부채비율도 굉장히 낮아 세계 유수의 투자회사에서도 군침을 흘리는 알짜배기 회사다.
우리 회사의 오너는 다른 사람과 다른 특이한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다재다능한 인재의 양성에 힘쓴다는 점이다. 좋게 표현하면 다재다능이지만, 쉽게 말해 중앙집권식 독재 경영을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계열사에는 마케팅부서를 따로 두지 않는다. 지주회사인 ㈜동지에만 마케팅 부서를 만들고 그곳에서 모든 정책을 총괄한다. 우리 회사 마케팅 부서 총책임자는 전무이사가 담당하고, 총괄부장 또한 이사급에서 담당한다. 그리고 5개의 마케팅부와 15개의 마케팅 팀이 있다. 각 부가 3개의 팀으로 구성된다는 이야기다. 팀의 성격에 따라 10여명 내외의 팀원이 있고, 필요에 따라 비정규직 직원들도 고용한다. 오너의 독특한 경영마인드 덕분에 인원이 무려 200명이 넘는 막강한 부서가 탄생한 셈이다. 쉽게 말해 우리 회사 오너의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다.
마케팅 2부에서 5부는 계열사 별 마케팅을 담당하고, 내가 속한 1부는 ㈜동지의 마케팅과 총괄업무를 맡는다.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내가 있는 3팀은 결국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한다. 부서 회의를 하면 회의록 작성과 핸드아웃 제작부터 잡다한 심부름이 우리 몫이 되고, 다른 팀의 누군가가 휴가를 가면 우리 팀 누군가가 대타로 투입될 때도 있다. 영업부에서 보고만 받아도 충분할 리뉴얼 감독 또한 우리 팀의 쓸데없는 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봤을 땐, 참 비효율적인 부서운용이다. 업무 영역에 대한 경계가 약해져서 계열사나 타부서와의 다툼도 잦고, 같은 일에 여러 팀이 따로 투입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의욕 넘치는 어떤 팀장은 외국에 직접 나가서 선박에 대한 수주계약을 따내서 돌아오기도 했다. 알고 보니 ㈜동지조선해양 영업부에서 6개월간 작업하던 과정에 난데없이 끼어들어 계약을 따냈다고 한다. 선박계약을 한 외국 회사에서는 같은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계약을 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영업부장은 뒷목잡고 쓰러졌지만 우리의 대단하신 오너는 껄껄 웃으며 잘했다고 포상까지 하셨다.
지금의 회사 오너는 내가 느끼기에도 엄청난 천재라서 지금의 부서 운용이 오히려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서서히 후계구도도 생각해야 하는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 될 수 있다. 오너 자식들도 하루빨리 마케팅부서가 분리되어야 효율적으로 계열사를 물려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알기로 오너의 맏아들이 벌써 40대 초반이다. 그런데도 확실한 후계구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혹시라도 회장님에게 무슨 일라도 생긴다면, 현대그룹처럼 왕자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쨌든, 팀이 15개나 되다 보니 팀별로 신입사원이 보충되는 경우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히 우리 팀의 조용하고 비중(?) 없던 여자 선배가 결혼과 함께 퇴사를 했고, 덕분에 따끈따끈한 신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업무량이 늘면서 티오도 늘어 하반기나 늦어도 내년 초에는 신입이 더 들어온다고 한다. 하하하. 기다려라 신입아. 형아는 착해서 다른 놈들처럼 괴롭히거나 그러지는 않을게. 내가 많이 도와 줄 테니 우리 힘내자. 그리고 커피 심부름 해방시켜줘서 고맙다.
“어이 말똥(이 대리 이 자식은 마동수라는 내 이름으로 저따위 별명을 만들어냈다.) 뭐 좋은 일 있냐? 왜 미친놈처럼 히죽거려?”
“하하하. 신입 오는 날 아닙니까? 아, 내일부터 커피 심부름에서 해방이다.”
이 대리가 괜히 시비를 걸었지만 그 정도 시비는 이제 친근하다. 내가 개의치 않고 대꾸하자 이 대리도 그 동안 미안했는지 그냥 웃고 지나갔다.
‘오호. 오늘부로 막내 생활 끝이니 이제부턴 제대로 대접해주겠다는 의미인가? 으흐흐 우리 막내 예뻐 죽겠다. 얼른 와라. 이 선배님이 아주 많이많이 예뻐해 주마.’
막내가 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회사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다, 혹시나 싶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윈도우 키를 눌러 컴퓨터 시간도 확인했다. 시간은 조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디게도 지나갔다.
‘젠장. 겨우 5분밖에 안 지났네. 시간아 빨리 가라.’
유리문 너머로 팀장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여쁜 막내가... 아니 정말 어여쁘면 안 되는데. 젠장. 여자다. 그것도 예쁜 여자다. 내 친구들이 알았다면 소개시켜달라고 내 목을 조를 만큼 예쁘고 날씬하다. 나? 나는 전혀 반갑지가 않다. 결국 지방 출장은 여전이 내 몫이 되었다. 게다가 새침한 표정을 보니 공주과다. 등 뒤에서 불여우의 후광이 눈부시게 비추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발정난 이 대리(이 대리 이놈은 남자 직원끼리 회식 할 때마다 좋은데 가자고 과장님을 조른다. 가끔 노래방 가서 도우미를 부르면 혼자 애로 영화를 찍는다.)와 의외로 순진한 최 주임(하반기 입사라 대리까지 6개월 남았다)이라면 저 신입에게 홀라당 넘어갈 것 같다. 불길하다.
흔히 여우같은 여자와는 살아도 곰 같은 여자와는 못 산다고 말한다. 난 여우고 곰이고 둘 다 싫다. 팀장이 생각나는 거미 같은 여자도 싫고, 독사 같은 년도 싫다. 뭐? 거미나 독사는 누구나 싫어한다고? 내 친구 태균이는 종종 우리 팀장 소개시켜 달라며 징징거리고, 집이 강남이라 자주는 못 보지만 사인방 이상으로 친한 재형이는 독사 같은 최 대리가 맘에 든다고 볼 때마다 칭얼거린다. 다 제 눈에 안경인 법이다.
나는 개 같은 여자가 좋다. 어감이 좀 이상하긴 하다. 순화해서 강아지 같은 여자가 좋다. 강아지처럼 의리 있고, 귀여우며, 영리한 그런 여자가 좋다. 내가 솔로인 이유다. 친구들에게 난 ‘개 같은 여자가 좋아’라고 했다가 ‘개소리’한다고 욕만 먹고 평생 혼자 살 거라는 저주도 받았다. 심지어 술에 취하면 개로 변하는 여자는 많이 안다며 소개시켜 주겠다는 헛소리도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개 같은 여자’를 만날 거라 믿는다. 이런 내게 신입은 그냥 여우상을 한 불길한 여자일 뿐이다. 나는 성실하고 빠릿빠릿한 남자 후배를 원했을 뿐이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한 강소현이라고 합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신입사원이면 신입사원답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패기 있게 말해야지, 무슨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아니고 ‘예쁘게 봐주세요.’는 또 뭐람? 밉다밉다 하니 벌써 미운 짓을 골라하고 있다. 예쁜 후배는 필요 없다. 내게 제발 머슴 같은 훌륭한 후배를 내려다오!
“자세한 이야기는 환영회 때 하고, 소현씨 자리는 저기니깐 가서 앉아요.”
‘뭐야 이게 끝이야? 신고식 같은 거 없어? 어이 최 대리. 손가락 까닥이며 불러야지? 이년 저년 욕도 좀 하고! 어이 이 대리, 최 주임. 그냥 이게 끝이야? 응? 뭔가를 보여줘!!’
그런데 이 대리와 최 주임이 강소현이 앉은 자리로 갔다. 저 인간들이 설마 군기를 잡으려고?
“강소현씨. 나 이기적 대리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잘 해보자고.”
“네. 저도 정말 잘 부탁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신입이니, 실수를 하더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그리고 앞으로 많이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래. 나만 믿어. 내가 많이 도와줄 테니. 하하하.”
“아... 안녕하세요. 저는 최종현 주임입니다. 힘든 점 있으면 언제든 물어봐주세요.”
“어머. 감사해요. 처음 하는 직장생활이라 걱정했는데, 선배님들이 이렇게 도와준다고 하시니 정말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정말 많이 도와주셔야 해요. 호호호.”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명백한 남녀차별이다. 세상이 어느 땐데, 남자와 여자를 차별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면 예쁜 후배는 갈구지 않는다며 여성부에 탄원서라도 내고 말겠다.
“아 그리고”
오, 역시 팀장님이다. 매번 성희롱을 일삼지만, 우리 회사 최고의 베테랑 직원인데 당연히 뭔가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정말 섭섭한 일이다. 내가 당했던 만큼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긴장이라도 하게 아주 조금이라도 뭔가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정부에서 에너지절약을 위한 협조 공문이 내려왔어요. 종이컵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고, 앞으로는 커피나 차는 개인 컵을 이용해서 각자 알아서 마시도록 하세요.”
아니, 팀장님. ‘님’은 무슨. 양 팀장 이건 정말 아니지. 이게 끝이야? 아! 저 신입은 참 운도 좋다. 김 대리는 오늘따라 왜 저렇게 조용하지. 생리라도 하나? 앞으로 커피는 안타도 되지만, 딱히 즐겁지도 않다. 그리고 순간 나는 꽤 심각하고 엄청난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신입은 내게 어떤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벌써부터 미워하기 시작했다. 내게 보여줬던 선배들의 악의가 내게 옮겨진 것 같아 갑자기 불쾌해졌다. 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했으면서 참 못난 짓을 했다. 내 후임이니 내일부터라도 잘 해줘야겠다.
후배야. 아니 강소현씨. 제발 우리 잘 지내보자고. 내가 우리 팀의 다른 선배들처럼 그렇게 경우 없이 굴지는 않을 테니, 후배라면 당연히 보여줘야 할 상식적인 모습이라도 보여줘. 많이도 바라지 않아.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만이라도 보여줘. 그럼 내가 정말 너를 격하게 아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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