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지랄이 풍년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대학 동기들과 휴일을 허무하게 보내고 나면, 다시 우울한 직장 생활이 시작된다.
한 번 더 소개하겠다.
내 이름은 마동수.
나이 29. 직장생활 2년차.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회사에 다니면서 열심히 저축해 예쁜 마누라도 얻고 토끼 같은 자식들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찬 꿈에 부풀어 올라 있었었다.
2달 동안의 회사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마케팅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나의 믿음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첫 만남은 나의 부푼 희망을 어지 없이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그곳에서 만난 직장상사들은 하나같이 개또라이들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옥의 직장생활이 시작됐다.
‘Welcome to hell'
먼저 김수현 대리.
나이 27. 직장생활 6년차.
학번은 나보다 한 학번 어리지만 빠른 생일에 조기졸업까지 해서 벌써 6년차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완벽하게 핏이 된 까만색 정장에 머리 한 올 빠져나갈 틈 없이 질끈 묶은 머리, 거기에 은빛 안경테까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녀의 모습을 한 채, 나를 향해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을 들고 까닥였다.
사람을 부르는 건지 개새끼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황당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입사한 우리 회사 정도의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뒤에서는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도 앞에서는 점잖게 사람을 대한다고 들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줬었다.
“거기 신입! 그래 곰같이 생긴 당신 말입니다. 귓구멍이 막혔어요? 이리 와 보라고요.”
‘뭐야. 나? 정말 나를 부르는 거였어? 뭐 저런 이상한 여자가 다 있어?’
속으로야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갓 들어온 신입이 감히 선배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제지하는 사람은 사무실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군기 바싹 든 신병처럼 쪼르르 달려가는 수밖에. 그녀의 손가락질에 잔뜩 긴장하고 달려갔더니 커피 좀 타오란다.
‘뭐 이런 XXX’
속에서 욱하는 무언가가 올라왔지만, 그래도 난 신입. 첫 출근이니 이미지가 좋아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요구에 큰 소리로 대답하고 후다닥 사무실 입구로 튀어나갔다.
“이봐요, 신입. 멍청이처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런데 재빨리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니. 정말 이 여자가 언제 봤다고, 사람을 멍청이라고 부르는 거야!
“네 커피 뽑으러 갑니다.”
“네? 커피를 왜 뽑아요? 혹시 바보에요? 내가 커피를 타오라고 했지, 언제 뽑아오라고 했나요? 아직 20대라던데 벌써 가는귀가 먹었어요?”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다. 분명히 타오라고 했다. 내가 언제 커피를 타 봤어야지 알지. 대학에서도 항상 뽑아 먹었고, 군대에서도 항상 자판기를 이용했다. 첫 출근을 하자마자 뜻하지 않은 갈굼을 받다 보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사무실 어딘가에 있을, 커피 탈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고개를 맹렬하게 돌렸다.
“세상에, 탕비실도 몰라요? 말귀도 못 알아들어. 어휘력도 부족해. 이런 어수룩한 신입이라니. 참...”
찾았다. 사무실 왼편에 ‘탕비실’이라고 적힌 문패를 그제야 찾았다. 그래. 솔직히 탕비실이 뭔지 몰랐다.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단어다. 그 단어 하나 모른다고 졸지에 어휘력 딸리는 멍청이가 돼버렸다. 첫 날 좋은 인상을 보였어야 했는데, 완전 망했다. 저년은 대체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나를 팔푼이로 만드는 걸까?
생각을 길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만회해야 한다. 재빨리 탕비실로 뛰어 들어갔다. 탕비실 안에는 별의 별 것이 다 있었다. 정수기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싱크대도 있었다. 한 곳에는 커피와 각종 차들이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다. 얼핏 컵라면과 과자도 보였다.
‘아! 이런 곳을 탕비실이라 하는구나.’
짧은 깨달음과 함께 이곳저곳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급한 것은 커피다. 정수기에 물을 받고 재빨리 커피를 타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군대에서 인사과에 근무했다. 우리 대대 주임원사님은 참 오지랖이 넓은 양반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종종 우리 과에도 들르는데, 그 때마다 계원(행정병들을 계원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중대 행정병들을 부르는 말인데 언젠가부터 참모부 병사들도 계원이라고 부르게 됐다)들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내가 신병일 때는 당현히 커피 심부름이 내 몫이었다. 처음 커피 심부름을 하던 날 나는 주임원사님에게 엄청 구박을 받았다.
커피를 쟁반에 받쳐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버릇없다고 이놈 저놈 욕하시더니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배웠다며 우리 부모님까지 들먹였다. 아, 그 주임원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가 없었다. 신병이던 그때도 나는 참 갈굼을 많이 받았었다. 딱히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래서 신병이고, 신입 아니겠는가? 원래 다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주임원사에게 욕먹던 일이 생각나 커피를 얼른 쟁반에 다소곳하게(?) 담아 가지고 나갔다. 흥. 이제 더 구박받을 일은 없을 거라며 나의 기특함에 속으로 흐뭇해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흐뭇한 미소를 제대로 짓기도 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봐요! 미련 곰탱씨.”
아 정말. 미련 곰탱씨? 이제는 곰탱이란다. 그냥 곰탱이도 아니고 미련 곰탱이. 정말 사람 바보로 만드는 어휘선택 하나만큼은 탁월하다. 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런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나도 이제는 그게 더 궁금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이게 커피입니까? 아니면 숭늉입니까? 누가 커피 탈 때 물을 이렇게 많이 넣으래요? 그리고 나만 입인가요? 우리 팀 사람들은 주둥이고? 그 정도 센스도 없어요?”
그래그래. 내가 다 잘 못 했다. 고개를 팍 숙이고 다시 탕비실로 기어들어갔다. 뒤에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신고식 뭐 그런 건가? 어딜 가나 신고식이 있다고 해도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팀원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
처음 알았다. 내가 이렇게 단세포라는 사실을. 고민해봐야 소용없다. 이판사판이다. 문을 벌컥 열고 당당하게 그녀(그년, 망할 년, 나쁜 년) 앞에 섰다. 커피도 없이 맨손으로 나온 모습에 내가 과연 무슨 행동을 할지 모두들 궁금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내 키가 185cm다. 체중도 81kg에서 83kg을 왔다 갔다 한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한마디로 거구라는 소리다. 나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거기다 시커먼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 때문에 얼구에서 웃는 표정을 싹 지우면, 누가 봐도 움찔하기 마련이다. 오! 이 여자 생각보다 대가 세다. 그녀는 표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나를 올려다봤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왼쪽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으하하. 그러면 그렇지. 기회는 이 때다. 당당하게 말을 걸어야 한다.
“저... 커피 탈 때 물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요? 제가 커피를 타 본적이 없어서요.”
순간 사무실이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내가 무슨 폭력이라도 행사하길 기대했나보다. 미친놈들. 여기가 무슨 무림이나 판타지도 아니고 내게 뭘 기대한거야! 우리 아버지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친가나 외가 어느 쪽에도 부자 하나 없는 집안의 장남인 내가 선택할 길은 열심히 회사생활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참, 자랑이세요. 이거 보나마나 과일도 한번 제대로 깎아 본적 없는 마마보이구만. 그 큰 덩치가 아깝네요. 미련 곰탱씨.”
말도 참 곱게 하는 여자다. 솔직히 우리나라 남자들 결혼하기 전까지 과일 제대로 깎을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과일 깎을 일 자체가 거의 없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 보통 과일은 어머니가 깎기 마련이고, 자취하면 집에 과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런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한방에 마마보이로 몰아버리다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커피는 종이컵의 4/7정도만큼만 부어요. 그게 제일 맛있으니까.”
2/3도 아니고 3/5도 아니고 4/7이라니. 5/9라고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뭐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지. 그래도 이번엔 팀원들을 재빨리 파악할 수 있었다. 6명이다. 앗싸! 저 여자 성격으로 봤을 때, 괜히 눈치 없이 팀원 숫자까지 물었다간 ‘넌 눈깔을 장식으로 달고 다녀?’라며 소리칠게 분명했다.
어쨌든 표독한 첫 인상을 가진 김수현 대리의 갈굼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멈출 줄을 몰랐다. 그래도 첫날처럼 어이없는 일로 지랄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기적 대리
나이 34. 직장생활 8년차. 나와는 정말 상극인 인간.
김수현 대리가 나를 갈굴 때는 그래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녀는 일도 잘한다. 그런데 이름부터가 이기적인 개자식은 그냥 갈군다. 이유? 없다. 일은 전부 내게 떠넘긴다. 게다가 내가 만든 기획안을 그동안 5번이나 가로챘다. 몇 번은 공동 명의로 올렸지만 진급 대상이 되고부터는 진급하면 끌어주겠다며 막무가내로 빼앗아 갔다.
지방에 매장 리뉴얼이 있으면 우리 부서 직원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매장 리뉴얼이란 결국 고객이 우리 제품을 좀 더 많이 구매할 수 있도록 상품 진열을 재배치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제품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 직원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 일반 매장이면 괜찮지만 대형 마트나 백화점의 경우는 모든 업무가 끝난 밤에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끝나야 새벽이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고용한 매장 직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사에 있는 영업부 사람들이다. 감독이라는 명분으로 내려가지만 전부 고참들이니 싸가지 없이 멀뚱멀뚱 구경만 할 순 없다.
밤을 새워 일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다음날은 휴식을 준다. 혹시 회사가 바쁘거나 내가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으면 오전 근무나 오후 근무만 하고 퇴근하게 배려해주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이 대리 이 자식에게는 그런 원칙이나 관례 따윈 없다. 바쁜 일이 없어도 무조건 불러내서 일을 시킨다.
심지어는 내가 내려간 리뉴얼을 자기가 참여했다고 거짓 보고를 하고 나만 강제로 출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도 꼭 목요일에 리뉴얼이 있어 금토일 연달아 쉴 수 있는 그런 날만 골라서 거짓보고를 올린다. 고생하는 후임을 위해 자신이 대신 지방 출장을 갔다며 뻔뻔하게 자랑질도 한다. 약삭빠름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이다.
“하루 날밤 까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래? 오늘만 고생하면 토일 이틀이나 동안 쉴 수 있잖아.”
차라리 닥치고나 있던지 이런 식의 말을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다.
혹시나 싶어 과장님께 은근슬쩍 이 대리가 리뉴얼 담당이던 시절을 물어본 적이 있다.
“이 대리? 출장 간 다음날은 무조건 출근 안했어. 지가 처리해야 할 급한 일이 있어도 나나 김수현 대리한테 부탁하고 출근 안 해. 원래 여직원들은 지방출장 거의 안 보내니깐 김 대리가 미안한지 편의를 꽤 많이 봐 주던걸?”
아! 냉혈녀 김수현 대리에게 그런 면이 있다니. 확실히 일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지, 그럼 뭐야. 결국 이 대리 이 자식 완전 호래자식이라는 이야기잖아.
가끔 과장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해볼까 고민도 했다. 아니면 회사에라도 보고할까 하다가 참았다. 회사에 보고하면 얼마 못가 이 대리는 아웃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직장상사를 고발하는 직원은 그날부터 회사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생각해봐라. 이 대리가 잘못했다고는 해도, 그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언제 또 그런 고발을 할지 모르는 사고뭉치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부하는 나 같아도 찝찝해서 싫을 것 같다.
============================ 작품 후기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현실에서 저럴 일은 거의 없죠. 그냥 코믹한 느낌으로 썼습니다. 시트콤처럼요. ‘저런 직장 상사가 어디 있어.’라며 피식하고 한 번 웃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