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격전의 시작
쿠구구구구구궁!
성곽도시인 천종천마교의 육중한 철문이 요란한 굉음을 터트리며 활짝 열렸다.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뻥 뚫린 철문을 통해 뭔가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긴장하는 정사연합의 대군.
말이 사라지고 숨소리와 마른침 삼키는 소리만이 모두의 긴장을 대변하는 가운데 천종천마교 쪽에서 귀청을 때리는 섬뜩한 음성이 거대한 울림을 터트렸다.
“마신 아수라의 종들아! 이 땅은 이제 너희들의 땅이다! 살을 취하고 피를 마셔라! 그 모두가 너희의 것이다!”
화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분명 천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마신 아수라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하더니 정사연합군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예상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지 않을 것이다!’
화운이 결의를 다지는 순간.
“나, 나온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누군가의 외침.
두두두두두두두두!
흡사 수만에 달하는 군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것처럼 대지가 진동했다.
그 엄청난 울림에 정사연합의 대군이 굳어버린 순간.
인간세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괴물들이 활짝 열린 철문 밖으로 개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수라도의 마귀들이 흑귀들의 몸을 매개체로 삼아 인간들의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금강마인보다 더 단단하고 빠르다는 괴물들이 그야말로 성난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더니 급기야 천종천마교의 성곽 위를 새떼처럼 날아오르는 마귀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저저!”
“맙소사!”
정사연합의 진영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이들이 속출했다.
인세에서 보지 못한 흑귀들의 모습에 싸우기도 전에 기세가 눌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신풍영웅대조차 아연 긴장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바로 이때 화운이 허공으로 부상하며 정사연합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네 발 달린 짐승은 몽둥이로 후려패고, 날개가 달린 짐승은 날개를 꺾으라고 했다!”
화운의 음성은 크게 울리진 않았다.
하지만 화운의 내력과 천지간의 기운이 감응하여 웅장한 울림이 되어 정사연합군을 강타했다.
화운의 목소리에 실린 묘한 힘이 가슴을 두들기고 두려움을 걷어내 주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수십 장 허공으로 부상한 화운이 벼락처럼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콰-앙!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와락 일어난 뿌연 먼지구름이 후폭풍과 함께 날아가 버리자 수백의 마귀들이 초토화되어버린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화운의 모습이 보였다.
악귀들 속으로 뛰어든 영웅신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모습에 백리명이 눈을 번쩍 뜨며 흑검을 뽑아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신풍영웅! 의기충천!”
일부러 내력을 실은 백리명의 외침이 정사연합군을 뒤흔들었다.
“신풍영웅! 의기충천!”
“신풍영웅! 의기충천!”
“악귀들을 몰아내자!”
“나가자!”
“싸우자!”
“와아!”
삼만이 질러대는 거대한 함성이 벌판을 뒤흔들었다.
마귀들을 쓸어버리고 천종천마교를 단숨에 짓밟아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몰려오는 마귀들은 일순간도 움츠리지 않았다.
마신 아수라의 권능에 결속되어 있었기에 진격 또 진격할 뿐이었다.
“쇄궁단! 출진!”
당문 쪽에서 터져 나온 명령이었다.
당문과 하오문도들로 구성된 삼백여 명이 신풍영웅대를 지나쳐 선두로 달려 나와 수평으로 긴 대열을 갖추었다.
모두들 석궁을 들고 있었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석궁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런데 석궁에 장전된 철시는 오히려 더 작았다.
길이가 훨씬 더 짧은 것이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삼백 발의 철시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장전!”
결과를 보기도 전에 명령이 떨어졌다.
당문과 하오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철시들을 장전했다.
석궁이 무서운 이유는 관통력과 장전 속도가 빠르다는 것인데, 지금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석궁은 그렇지가 않았다.
당문과 무영천의 좌호법 사마공이 머리를 맞댄 결과물로 관통력을 높이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석궁이었다.
장전속도는 느려졌으나 관통력은 월등히 높아졌다.
퍼버버버버버버벅!
두 번째 철시를 장전하는 동안 삼백 발의 철시들이 마귀들을 강타했다.
금강마인들보다 단단하다고 알려진 몸뚱이에 철시들이 틀어박혔다.
이백에 가까운 숫자가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 숫자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마귀들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숫자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태반이 벌떡 일어나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철시가 팔에 박힌 놈은 팔을 덜렁거렸고, 다리에 박힌 놈은 다리를 질질 끌었다.
머리 쪽에 박힌 놈들만이 땅바닥에서 바동거리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쏴라!”
다시 명령이 떨어졌고 철시들이 쏘아졌다.
“장전!”
“쏴라!”
세 발을 발사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장전하지 않았다.
마귀들의 선두가 수십 장 앞까지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지독히도 빨랐다.
“물러나라!”
당문과 하오문의 궁수들이 물러났다.
이제 다시 선두는 신풍영웅대였다.
바로 이때.
당문 진영에서 머리통만 한 가죽주머니 수십 개가 일제히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머리칼이 회백색인 녹포노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사천독왕 당후!
독과 암기의 조종이라 일컬어지는 사천당문의 당대문주였다.
허공으로 떠오른 당후가 두 손을 빠르게 뿌리자 빛살처럼 날아간 암기들이 가죽주머니를 일제히 터트렸고, 그에 가죽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기름들이 마귀들의 머리위로 쏟아졌다.
“만천화우!”
당후가 당문의 암기술을 과시하듯 장엄하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그의 두 손에서 수백 발의 암기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곧 그의 손짓을 따라 장대비처럼 일제히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후두두두두둑!
지상을 맹폭하는 암기세례였다.
그 맹폭에 강타당한 마귀들이 일제히 휘청거린 순간 암기와 암기들이 부딪치며 발생한 불꽃이 거대한 불기둥을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기름을 뒤집어쓴 마귀들은 살아 있는 불덩이가 되었다.
괴성 같은 비명이 쏟아지고 시커먼 연기가 여기저기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극히 일부의 숫자에 불과하여 성난 파도처럼 돌진하는 마귀들의 숫자에 모래성처럼 휩쓸리고 짓밟혔다.
파도처럼 돌진하던 마귀들이 불타오르는 동료들을 밀치고 짓밟고는 범람하는 물결처럼 계속 진격한 것이다.
“가자! 싸우자! 선두는 나 백리명의······ 엇! 누님, 그건 반칙이에요!”
검을 치켜들고 호기롭게 외치던 백리명이 당황성을 내뱉었다.
북궁설이 가장 먼저 튀어나간 것이다.
“이럴 때 보면 괜히 양보한 것 같다니까!”
담명이 백리명의 곁을 지나치며 튀어나갔다.
“허튼소리! 게 섯거라!”
백리명 역시 검을 쭉 뻗으며 튀어나갔다.
쓰카가가각!
북궁설이 휘두른 검격에 선두에서 돌진해오던 마귀 둘의 머리통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북궁설의 검에 선명한 빛을 발하던 강기가 사그라든 순간 세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북궁설은 방패로 막고 발로 차냄과 동시에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놈에게 검을 쭉 뻗었다.
“컥!”
강기를 거두어들인 검신이 입천장을 뚫고 두개골 속으로 파고들었다.
놈은 진저리를 치듯 부들부들 떨더니 축 늘어졌다.
검을 뽑은 북궁설은 방패를 휘둘러 연달아 막은 후 검을 뻗었다.
이번엔 눈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캬악! 캬악!”
놈이 발버둥치는 순간 검을 비틀어 머리통 안을 휘저어 버린 후 검을 뽑았다.
이때 담명 역시 두 번째 놈을 처치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완전히 잡으며 몰려드는 마귀들을 상대했다.
“뭐, 뭐야! 왜 눈짓을 주고받고 그래!”
백리명이 소리치면서도 숨 가쁘게 마귀들을 상대했다.
세 사람이 제법 넓게 포진했으나 몰려드는 마귀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다.
마귀들은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세 사람을 내버려두고 다른 신풍영웅대를 향해 몰려갔다.
백리연이 마귀들과 격렬하게 부딪쳤고, 남궁현과 선우유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냉랭한 북궁무결의 검이 마귀의 주둥이를 파고든 순간 대도를 등 뒤에 지고 있는 사도강의 검이 마귀의 한쪽 눈을 송두리째 찢어발겨놓았다.
무당명검도 화산기룡 적엽명도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자파의 사제들을 이끌고 빈틈없는 검진을 구축했다.
하나를 죽이면 둘이 달려들었고, 둘을 죽이면 넷이 달려들 정도로 마귀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하지만 신풍영웅대는 싸우면 싸울수록 침착함을 유지해 갔다.
화운이 방패를 사용하라고 한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고, 적을 몰살할 생각을 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라고 한 이유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신풍영웅대가 치열한 격전을 벌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화운은 허공에서 지켜보았다.
한 번 더 마귀들의 숫자를 줄이려고 한 순간 천종천마교 내에서 천마의 살기가 몰아쳐왔다.
화운이 마귀들을 공격하면 천마 역시 싸움에 끼어들겠다는 뜻이었다.
천마와 자신이 저 싸움에 끼어들면 정사연합의 피해가 더 커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화운은 어쩔 수 없이 마귀들을 내버려 둔 채 천종천마교를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구룡제를 비롯한 정사연합의 최고수들이 지켜보았다.
“천마가 부른 모양입니다.”
“한 번이라도 더 손을 써주면 좋을 텐데.”
“천마가 전음이라도 보낸 모양이지요. 저라도 끼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겠습니다.”
정파의 최고수들이 두런거리는 가운데 구룡제가 멀리 천종천마교의 정문 쪽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녀석이 한 말이 모두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그러게. 지금 나온 숫자만도 사만은 족히 되겠네.”
적성대도황이 구룡제의 말을 받았다.
“사만이든 오만이든 마귀 따위는 문제가 안 될 것이네. 문제는 명왕과 멸제를 쓰러트리는 것이고, 저 녀석이 천마를 처단할 수 있느냐일 것이네.”
태양존자가 화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 말씀이 맞습니다. 허니 구룡제 시주와 도황 시주께서 천하의 안위를 짊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소림사 장문인이 말했다.
그제야 태양존자가 화운에게서 시선을 떼며 그를 돌아봤다.
“마존을 상대할 고수는 정한 것이오?”
태양존자는 마존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마존의 무위에 대해서는 워낙 알려지지 않은 바가 많아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이 명왕과 멸제를 상대하기로 하였으니 남은 마존은 정파에서 상대하라는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대놓고 주장한 태양존자였다.
“다행히 조 시주께서 와주셨으니 그 점은 염려놓으셔도 될 겁니다.”
“조 시주?”
“조양신검이 온 모양이군.”
태양존자의 물음에 적성대도황이 대답했다.
조양신검은 화운이 신풍대 시절 정무맹의 맹주였던 조극산의 별호였다.
“아, 조양신검 조극산! 확실히 정파에는 고수가 많아. 없는 것 같으면 어딘가에 하나둘씩 은거해 있다니까.”
태양존자가 투덜거릴 때였다.
천년거목처럼 뒷짐을 진 채 천종천마교를 응시하고 있던 구룡제가 돌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적성대도황을 필두로 하여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천종천마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귀들의 숫자가 육만을 훌쩍 넘어가던 어느 순간 더 이상 마귀들은 나오지 않았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종천마교의 거마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녀석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싸움은 마도천하를 막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생존이 걸린 싸움이네. 다들 그 점을 명심하게.”
적성대도황이 정사연합의 최고수들을 한차례 둘러본 후 구룡제의 뒤를 따랐다.
“아미타불! 오늘만큼은 중생들을 위해 살계를 활짝 열겠소이다.”
“무량수불! 빈도 역시 도(道)를 버리겠소.”
그렇게 정사연합의 최고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명왕과 멸제를 비롯한 천종천마교의 최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화운은 천종천마교의 정문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정문을 막 빠져나오는 명왕과 멸제 등이 보였다.
그들 역시 허공의 화운을 보았으나 살의만 살짝 내비칠 뿐 달려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천마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화운은 그들을 곁눈질로 훑어본 후 정문 위를 넘어갔다.
천마탑을 향해 곧장 날아가던 화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탑의 모습이 무척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층부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다.
화운은 천마탑 위로 곧장 날아가 보았다.
천마탑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이 텅 비어 있는 구조였다.
상층부가 날아가 버린 천마탑은 까마득한 지하세계까지 뻥 뚫려 있었다.
마치 화산 분화구처럼.
그리고 그 지하로부터 이전에 본 적이 없었던 강렬한 마기가 폭발하는 화산의 열기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보이느냐? 천마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다!”
머리 위쪽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화운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마신 아수라의 강림을 바라지 않을 순 있어도 우리와 손을 잡을 일은 없다. 결단코!”
단호한 말과 함께 화운의 곁으로 내려온 이는 다름 아닌 사황이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짓밟아 버릴 것 같은 존재가 사황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기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제야 화운은 고개를 돌려 사황을 바라봤다.
강렬한 존재감 속에 폭발할 것 같은 패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폭발할 것 같은 패력 대신에 순후한 기운이 느껴졌다.
“새로운 길을 찾으셨군요.”
화운이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허나 사황은 대꾸하지 않고 천마의 존재가 느껴지는 까마득한 아래 지하세계를 응시할 뿐이었다.
“싸움을 앞두고 쓸데없는 말로 수군거릴 생각은 없다. 가자.”
“예.”
두 사람은 곧장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천마와 일생일대의 격전을 벌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