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천종천마교
섬서성 화산파.
온 화산이 새파란 신록으로 뒤덮인 계절.
물경 삼만에 달하는 숫자의 무인들이 화산으로 모였다.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한 정파의 무인들과 구룡성, 적성대도문 그리고 이화태양종을 필두로 한 천사련의 무인들이었다.
각파에서 제몫을 다할 만한 이들로 골랐으니 당대천하무림계의 정예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천하무림 삼만의 정예.
무척 많은 숫자였다.
이토록 많은 숫자가 움직이다 보니 필요한 것도 많았고, 소모되는 것도 엄청났다.
먹을 것부터 시작해서 비바람을 막아줄 천막과 환자들을 치료할 약제 등등.
화산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숫자였다.
“장주님이 아니었다면 화산이 우스운 꼴을 당할 뻔했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이 고마움이 담긴 얼굴로 대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대륙전장의 장주 화경천이었다.
대륙전장이 막대한 비용을 지원해 준 것이었다.
“이번 전쟁은 무인들만의 생사가 달린 게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돈이야 다시 벌면 된다지만 하나뿐인 목숨은 그렇지 못하잖소. 상계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지원을 할 것이니 모쪼록 최소한의 피해로 끝났으면 합니다.”
“그래야지요.”
화산파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요염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인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하오문의 사미희였다.
“황보세가가 당도하였기에 오대세가 쪽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먼 길 오느라 지친 것 같아서 술이랑 먹을 것들부터 챙겨주었습니다만, 재고를 살펴보니 비축한 술과 음식들이 바닥날 판인데, 어찌할까요?”
“술과 식자재는 하오문에서 준비하되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본장이 지원하기로 했잖소. 사 소저가 찾아오면 달라는 대로 금전을 내주라고 했으니 필요한 만큼 맘껏 가져다 쓰도록 하시구려.”
“정말 맘껏 가져가도 돼요?”
“그렇소.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묻지도 말고 내주라고 했으니 가셔서 달라고만 하시구려.”
“아, 이러면 딴 주머니 차고 싶어지는데.”
“하오문 분들이 안내하고 음식도 나르는 등 애 많이 쓰고 있잖소. 그분들께 임금도 챙겨주고 술과 고기도 따로 대접하고 하려면 딴 주머니가 필요할 게요. 그러니 이왕 찰 거 큰 주머니로 차시구려.”
“어머! 통도 크셔라.”
“칭찬으로 듣겠소. 껄껄껄!”
화경천이 호탕하게 웃자 옆에 있던 화산 장문인 역시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장주님만 믿고 갑니다. 어째 제가 제일 바쁜 것 같으니까 절 위해서도 딴 주머니 하나 더 차야겠어요.”
“그러시구려.”
사미희는 요염한 웃음만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화경천과 화산 장문인은 다시 산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화산 여기저기에 천하 각파의 깃발들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하나 된 천하.
두 사람은 지금 하나가 된 천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
정파무림은 광명정대함과 협의를 숭상한다.
사악함을 멀리하고 악인들을 처단한다.
때론 사악함이 너무 악랄하여서 또 때로는 마두가 익힌 마공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서 큰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금단의 마공!
역천의 무공!
정파무림은 그렇게 부르며 철저히 경계하고 금기시했다.
아수라파천권 역시 그런 금단의 마공 중 하나다.
그런 마공을 소가주가 익혔으니 황보세가로서는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아닐 수가 없었다.
황보세가주는 아수라파천권을 익힌 자식의 단전을 부수고 지하에 가뒀다.
그리고 고민 끝에 이번 전쟁에 참전했다.
뿐만 아니라 칠대문파와 오대세가 수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같은 사실을 밝혔다.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쉬쉬하고 덮어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개했다.
그런 황보세가주의 결단과는 별개로 금단의 마공을 익힌 자가 나왔다는 건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정파 내에서도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는 걷는 노선이 조금은 달랐다.
상황에 따라 정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알력다툼을 벌일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칠대문파에서 엄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강하게 나왔다.
“천하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엄중한 결단을 내려야만 해요.”
시종일관 엄벌을 강조한 이는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다.
아수라파천권은 수백 년 전 아수라혈마황이 천하를 마구 짓밟으며 등장한 마공인데, 당시에 아미파의 피해가 무척 많았다.
게다가 무해에서 화운이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일로 문제 삼고 나섰다가 결국엔 그녀와 그녀에게 동조했던 이들만 머쓱하게 끝난 일이 있어 이번 일로 자신들의 입지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식의 무공을 전폐하고 지하에 가두기까지 했거늘 무엇을 더 엄단한단 말입니까?”
“아수라혈마황이 벌인 짓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것이었는지 그 기록이 아직도 본파에 남아 있답니다. 하나하나 상기시켜 드릴까요?”
남궁검가주의 반박에 아미파 장문인이 서슬 푸른 안광을 발하며 맞섰다.
“그동안 천하를 위해 힘써 온 황보세가의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사사로운 정으로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안이오.”
점창 장문인도 낯빛을 굳히며 한 마디 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선우세가주가 점창 장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예전 같으면 자리가 파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구도 선우세가주를 무시하지 못했다.
무영천의 천주인 화운이 조카이거늘 누가 감히 무시할 수 있겠는가.
“삼십 년 봉문 정도가 타당하다 사료되오.”
점창 장문인의 입에서 결국 봉문이 튀어나왔다.
그에 황보세가주는 눈을 감고 말았다.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봉문이었기 때문이다.
삼십 년 봉문이면 황보세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황보세가주는 다시 눈을 떴다.
가장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고맙네. 이 우형을 위해 그렇게 나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황보세가주는 담담한 얼굴로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의연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봉문을······.”
황보세가주가 봉문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이었다.
한쪽에서 제삼자처럼 구경만 하고 있던 무영천의 우호법 무영투가 툭 내뱉었다.
“어이가 없네.”
무영투의 말은 칠대문파 장문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말조심 하세요!”
아미파 장문인이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이번 일은 무영천이 개입할 일은 아닌 듯싶소이다.”
점창 장문인도 점잖게 말했으나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무영투는 아예 삐딱한 자세를 취하며 팔짱까지 꼈다.
“내가 입을 다무는 건 쉽소. 근데 귀파들의 장래 역시 황보세가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도 입을 다물어야 하오? 이대로라면 정파가 아예 끝장이 날 텐데도 말이오? 그렇다면 뭐 지금부터 입을 다물겠소. 이거 실례했소이다.”
무영투의 말에 아미파 장문인의 미간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고, 점창 장문인은 언성을 높였다.
“그 무슨 망발이오. 본파가 어찌 봉문한단 말이오?”
“말해도 되겠소?”
무영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말하시오! 허나 허튼 말로 본 장문인을 농락할 생각이라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점창 장문인이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그에 무영투는 고개만 끄떡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림사 장문인 앞의 탁자에 놓여있는 아수라파천권의 비급을 집어 들었다.
불태웠다고 하면 믿지 않을까봐 황보세가주가 일부러 없애지 않고 가져온 것이었다.
“그건 무얼 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점창 장문인이 경계하며 소리쳐 물었다.
그에 무영투가 히죽 웃었다.
“이걸 가지고 말이오. 점창이나 아미의 제자한테 익히게 하면 어떻게 되겠소? 이 비급이 아니어도 누군가가 귀문파에 악의를 가지고 제자들한테 금단의 마공을 익히게 하면 어쩔 것이오? 천하의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고 하셨소? 아니오. 황보세가를 봉문시키는 건 천하의 악인들한테 칠대문파와 오대세가를 봉문시킬 아주 기막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일 뿐이오.”
무영투는 비급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아미파 장문인에게 던져 주었다.
“아미파에서는 그 같은 일을 감당할 자신이 있소? 모든 제자들을 눈코 뜰 새 없이 감시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오. 또 그로 인해 문도들 간에 생길 불신은 어떻게 해결할 거요?”
무영투의 말에 좌중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미파의 장문인도 점창파의 장문인도 놀란 눈으로 아수라파천권의 비급만 응시했다.
“황보 대협.”
소림사 장문인이 넌지시 부르자 황보세가주가 고개를 돌렸다.
“자식의 삶을 스스로 끊어놓았으니, 그 심정 그 아픔이 어떠했을지 노납은 상상도 못 하겠소.”
“······.”
“아마도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이었겠지요. 그런 고통을 안고도 많은 이들의 지탄이 뻔한 자리로 나선 건 오랫동안 이어져온 황보세가의 협의지심만큼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소림사 장문인의 말이 무겁게 흐르자 황보세가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소림 장문인은 칠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온 세상을 품어주는 부처의 미소처럼 보이는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손가락 하나에 오물이 묻었다고 손목을 자를 순 없는 법입니다. 오물을 닦아내야지요. 물론 이미 썩기 시작했다면 손가락을 잘라야 할 테구요. 이번 일은 천하에 본보기가 될 듯 합니다. 제자와 자식의 악행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아울러 무공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건 올바른 인성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림 장문인의 말에 무당파 장교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검가주와 선우세가주 그리고 백리세가주는 무거운 얼굴로 소림사 장문인의 말을 곱씹었다.
무공보다 인성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말이 각파 수장들의 가슴에 무겁게 각인되었다.
“황보 대협.”
“예.”
“소림은 황보세가에 더 이상 잘못을 묻지 않겠습니다.”
황보세가주의 눈이 커졌다.
“무당 역시 황보세가주님께서 내리신 엄단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화산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소림, 무당에 이어 화산까지 이 같이 나오자 아미파 장문인과 점창 장문인은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청성 역시 이대로 넘어갔으면 하오.”
“곤륜은 칠대문파와 오대세가가 반목하지 않았으면 할 뿐이오.”
상황이 이렇게 달라지다 보니 황보세가주는 결국 뜨거운 눈물을 참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외다. 황보세가는 오늘을 잊지 않고 협의를 행함에 늘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선재, 선재, 선재로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자, 다들 이의가 없으시면 여기서 끝내기로 하고 얼른 가시지요. 구룡제의 성격이 제법 급한 것 같던데 더 기다리게 해서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무영투가 나서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주자 다들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정사의 두뇌들이 모여 세워두었던 천종천마교를 토벌하는 작전을 마지막으로 점검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천주께서 직접 말하지 않고 나한테 시킨 이유가 뭔가?”
밖으로 나온 무영투가 화운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아미파 장문인께서 절 탐탁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저보단 우호법께서 나서시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근데 싫었습니까?”
“아니, 아니지. 아주 좋았지. 천주, 이런 일이라면 백 번이라도 좋으니 얼마든지 시켜주시게.”
“그러지요.”
화운이 웃으며 대답할 때였다.
선우유성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정말요?”
“그래, 잘 해결되었다.”
“이얏호!”
선우유성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어디론가 잽싸게 사라졌다.
“왜 쟤가 좋아서 날뛰지?”
“황보세가의 영애를 좋아하거든요.”
화운의 대답에 무영투가 알겠다는 얼굴로 멀어지는 선우유성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좋을 때다······.”
어쩐지 부러움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이었다.
***
천종천마교로 향하는 길.
최선봉에서 높이 펄럭이고 있는 건 신풍영웅대의 깃발이었다.
화운이 이끄는 백여 명의 신풍영웅대가 선두에서 이동하였고, 바로 그 뒤를 당문과 하오문 이백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어서 구룡성과 적성대도문 그리고 이화태양종이 움직였고, 그 뒤로는 오대세가와 칠대문파를 비롯한 정파의 무인들이, 마지막으로는 도탑과 잔혈교를 비롯한 천사련의 군소방파들이었다.
그렇게 물경 삼만에 달하는 대군이 천종천마교를 토벌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화운의 곁에서는 담대후와 무영투가 함께 걷고 있었다.
“거의 도착해 가는데 사황은 왜 안 올까?”
“늦지 않게 도착할 겁니다.”
무영투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화운이 대답했다.
살짝 걱정인 무영투와 다르게 화운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안 오면?”
“안 오면 사황 어르신만 손해죠.”
“왜?”
“일이 잘못되면 제가 이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거니까요.”
“그게 왜 손해인데?”
“사황 어르신은 이 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다시 시작해야 하거든요. 그거 상당히 귀찮은 일이거든요.”
“아, 사황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
“예.”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하다. 신의 권능을 이겨내는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어떻게 보면 그냥 자신을 지켜낸 것뿐이니까요.”
“그 말도 일리는 있다만, 그래도 이왕이면 신의 권능을 이긴 거라고 하는 게 좋겠어. 그래야 마신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 안 그래?”
“이길 수 있을 겁니다.”
화운은 살짝 웃었다.
이번 싸움의 승패는 결국 마신 아수라를 막아내느냐에 달렸다.
막아내지 못하면 인간들의 삶이 끝장 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막아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일 뿐 신들의 노예도 전유물도 아니야. 마신 아수라! 내가 그걸 증명해 주겠어!’
화운은 마신 아수라를 떠올리며 그렇게 결의를 다졌다.
성곽도시인 천종천마교가 보이는 광대한 벌판.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
신풍영웅대의 깃발을 앞세운 정사연합의 대군이 이동을 멈추었다.
휘-이이잉!
세찬 바람이 메마른 땅을 할퀴고 가며 누런 흙먼지를 일으켰다.
정사연합의 대군은 무겁게 침묵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성곽도시인 천종천마교의 육중한 철문이 요란한 굉음을 터트리며 활짝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