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98화 (198/207)

#198. 마신 아수라를 상대할 방법

운명이든 뭐든 훗날의 내가 결국 유마정을 부순다면 마신 아수라를 상대할 방법이 있기 때문일 거다.

난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는 불나방처럼 무모한 성격이 아니니까.

그러니 마신 아수라를 상대할 방법.

그걸 찾아야 한다.

***

호남성 악양.

무해.

천종천마교에서 돌아온 화운은 자신의 거처에 칩거하는 사람처럼 틀어박혔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알지 못해 걱정을 했다.

“벌써 나흘째인가?”

백리명이 잠깐 쉬는 시간을 이용해 화운의 거처가 보이는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주 총관께서 매 끼니마다 식사를 문 앞에 두고 있는데, 갈 때마다 이전에 가져다 둔 식사가 그대로 있더랍니다.”

담명이 옆에서 염려스럽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하! 진짜 모르겠다.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인생, 다 같이 있는 힘껏 싸워보고 안 되면 마는 것이지······.”

“우리야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지만,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운이는 그럴 수가 없겠지요.”

“그런가?”

“형님도 나중에 백리세가의 가주가 되고 나면 수장의 무게를 알게 될 겁니다.”

“하지 말까?”

“뭐를요?”

“가주 말이야. 사실 내 성격이 수장이 되서 책임지고 그러는 거랑 좀 안 맞거든. 난 워낙 자유로운 영혼을 가져서 말이야.”

“백리세가를 내팽개치겠다고요?”

“세가야 운이랑 연이한테 줘버리지 뭐.”

“못할 것도 없겠지만 숙부님이 정말 좋아하시겠습니다.”

“노발대발하시겠지?”

“다시 가주자리 내놓으라고 불호령을 내리실 겁니다.”

“그럼 더 좋고.”

“형님을 가문에서 쫓아버리려고 하실 텐데도요?”

“아, 그건 안 되지. 풍류란 모름지기 돈이 들어가는 법이거든.”

“형님도 참.”

졌다는 듯 고개를 저은 담명은 다시 화운의 거처를 바라봤다.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운이도 자유로워져야죠.”

“아, 그것도 그러네. 녀석도 젊음을 불태우며 놀아야지.”

“그냥 한가한 휴식을 취하라든가 편하게 쉬라고 하면 되지 뭘 또 불태웁니까!”

“으흐흐! 젊었을 때 아니면 언제 불같은 시절을 보내보겠냐! 이번 싸움이 끝나고 나면 어디 가지 마라. 나랑 운이랑 같이 천하유람이나 떠나자.”

“아, 이건 정말······.”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지?”

“으흐흐흐!”

담명이 실없게 웃고 백리명 역시 히죽거릴 때였다.

멀리 연무장 출입구 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현재 무해의 전반적인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담대후와 주 총관 그리고 무영투였다.

“어?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데요?”

“그러게. 가볼까?”

“우리가 필요할 일이라면 부르셨겠지요.”

“흠, 그런가?”

“혹시 모르니 수련하느라 힘 빼지 말고 기다려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자. 설 누님께는 내가 말하마.”

잽싸게 한창 수련중인 북궁설에게로 달려가는 백리명.

담명은 그런 백리명의 모습에 그저 피식 웃었다.

***

“담대후라고 합니다. 장문인들의 내방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담대후는 정중히 읍했다.

담대후 자신도 일가의 수장이지만, 한꺼번에 찾아온 칠대문파의 수장들은 대부분 그보다 연배가 높았다.

“아미타불! 담 대협 반갑습니다. 헌데 늙은이들을 불러놓고 정작 당사자는 보이지가 않는군요.”

“죄송합니다. 근래에 천종천마교의 행보가 수상쩍은 일이 있어 그곳엘 살피러 다녀오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며칠째 폐관수련 중입니다. 아직 천사련의 분들이 오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양해를 구합니다.”

소림사 장문인은 주름진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내비치지 않다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차갑게 외치고 나선 이는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다.

그녀의 성난 음성에 담대후는 다시 한번 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화운이 나오지 않은 결례를 담대후의 마중으로 감싸준 이가 있었다.

“이렇듯 스승께서 직접 마중을 나왔으니 꼭 결례를 범했다고 볼 일도 아닐 것이외다.”

무당파의 장교진인이었다.

무당파가 화운의 존재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무당이야 남이 아니니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본파는 이렇듯 무시를 당하고도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아미파 장문인은 청성파를 비롯한 다른 칠대문파 장문인들을 둘러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고, 슬쩍 시선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나 무영천의 우호법이오. 무시를 당했든 안 당했든 이 자리의 모든 분들께서는 무해곡의 곡주님과 대면하고 나면 본천의 천주께서 당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는 걸 알게 될 것이며 모두들 감사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오.”

무영투의 말에 모두들 의구심이 가득 차올랐다.

‘대체 무해곡주가 어떤 자이기에 이토록 담대한 말을 한단 말인가?’

‘칠대문파 전부를 내려다보는 자라는 건가?’

‘허허허! 광오하구나!’

칠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무해곡의 곡주에 대한 궁금증과 칠대문파의 위신이 무시 받은 것 같은 격분 사이에서 어찌 할지 주춤하고 있을 때였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자 녀석은 천종천마교에 다녀왔습니다. 본천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멸제가 반란을 획책했는데, 그 자리에 천마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제자 녀석이 급히 달려갔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제자 녀석이 두문불출하는 걸 보면 천마를 만났고, 그의 강함에 놀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허니 넓으신 아량으로 제자의 무례를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담대후는 원래 꼿꼿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올바르다 여기는 일에는 결코 허리를 숙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세 번째 읍을 하며 머리까지 조아렸다.

세상을 위해 크나큰 일을 하는 제자를 위해 자존심을 버린 것이었다.

“천마가 나타났단 말이오?”

“천, 천마라니!”

천마의 등장은 칠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놀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들어봅시다. 담 대협!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당파 장교진인이 말했다.

담대후는 재빨리 돌아서며 응대했다.

“귀한 분들이시라 성심을 다해 준비해 두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미파의 장문인은 더는 억지를 부릴 수가 없었다.

담대후는 칠대문파의 수장들을 데리고 무해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넘어 이동하던 장문인들은 말은 하지 않았으나 무해의 거대한 규모에 놀랐다.

칠대문파 어느 곳과 비교해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규모였다.

이토록 거대한 규모가 도심에 지어져 있다는 사실이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신풍영웅대?”

주위를 둘러보던 점창파 장문인이 멀리 높다랗게 걸려 있는 깃발을 발견했다.

순간 바람처럼 점창 장문인의 옆으로 이동한 무영투가 침을 튀겨가며 설명해주었다.

“천종천마교와의 싸움에서 선봉에 설 아이들입니다. 천하무림에 새바람을 일으킬 차세대 영웅들이지요.”

듣는 사람에 따라 광오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본천은 조만간 벌어질 천종천마교와 큰 싸움을 준비하고 있습지요.”

“천종천마교가 쳐들어온답니까?”

“아까 태상호법께서 천마가 등장했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천마가 쳐들어오든 우리가 쳐들어가든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는 한바탕 전쟁이 불가피 합니다. 본천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싸움에 대비하고 있습지요.”

무영투가 가슴을 펴며 말했다.

옆에서 물었던 점창 장문인은 물론이고 다른 칠대문파의 장문인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가 파악한 천종천마교의 전력은 본천과 칠대문파 그리고 천사련과 무해곡까지 힘을 합쳐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무해곡을 세상으로 불러냈고 여러 장문인들을 모신 겁니다. 그러니 눈앞의 상황에만 역정을 내지 말고 좀 멀리 내다보셨으면 합니다.”

무영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의젓하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히죽 웃었다.

칠대문파 장문인들의 눈에는 그 웃음이 자신감으로 비쳐졌다.

‘무영천의 등장은 강호의 커다란 홍복인가 아니면 피바람을 불러올 재앙인가? 모르겠구나!’

화산파 장문인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그날 오후에 구룡제를 비롯한 사파 삼천의 지존들이 당도했다.

담대후는 그들을 맞아 동편으로 안내했다.

무해의 전각군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서편으로 안내한 칠대문파와 당장 마주칠 일은 없었다.

문제는 화운이었다.

칠대문파 특히 무당과 소림이 화운을 만나고 싶어 했으나 수련에 깊이 빠져든 모양인지 저녁이 되었음에도 거처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일이 약조한 날인데 어쩌지요?”

주 총관이 걱정인 얼굴로 물었다.

답이 없기는 담대후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식사 후에 찾아가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수련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담대후는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뭐가 그리 걱정입니까?”

무영투였다.

그는 어둠에 찬 창밖을 내다보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화운을 만났을 때부터의 일들이 창밖의 어둠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온 길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게 있었다.

바로 화운에 대한 믿음이었다.

“천주가 두문불출하고 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무슨 일로 그러는 것인지,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인지 혹은 무슨 무공을 수련하느라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늘 그랬듯이 천주는 답을 찾을 것이고, 원하는 걸 해낼 겁니다. 그러니 우린 그저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웃는 얼굴로 말입니다.”

무영투의 말에 담대후는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호법이 스승보다 낫구려.”

“스승이기에 걱정이 태산인 법이지요. 부모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무영투가 돌아보며 웃었다.

그제야 담대후 역시 편안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콰-앙!

무해의 밤하늘을 뒤흔드는 굉음이 갑자기 터졌다.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천주의 거처가 있는 쪽입니다!”

가장 먼저 무영투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백리연은 오늘도 그곳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항상 같은 자리로 찾아가 자정이 될 때까지 앉아 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화운이 나오질 않고 있는 문 앞이었다.

‘운 오라버니는 바쁘니까 내가 다가갈 게요. 그날 말했지요? 난 이미 장대비에 젓듯이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그러니까 나에게 다가올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요. 내가 이렇게 매일매일 보슬비처럼 다가갈 게요.’

열한 살 시절이었던 것 같다.

화운을 처음 만난 게.

그땐 한참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때라 제법 까칠하게 굴었었다.

아홉 살 때 영약을 보내주어 환골탈태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이가 누구인지 궁금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며 얼굴도 모르는 무영천주를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열네 살인 지금, 화운이 시간을 되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보통사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기뻤다.

아닌 척 굴기도 했지만, 속마음은 정말 기뻤다.

자신에게 영약을 보내 준 무영천의 천주가 화운이라는 사실이 기뻤고, 스무 살 즈음의 자신이 그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다는 말에는 심장이 요동칠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이 크면 클수록 가슴 한쪽에 자리를 잡은 불안감 역시 자꾸만 커졌다.

천마와 마신 아수라.

그들을 상대하다가 이대로 더 가까워지지도 못하고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그 불안감이 커질수록 자꾸만 그를 쳐다보게 되었다.

화운만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응원할게요.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그래도 이곳에서 매일매일 응원할 테니까 바라는 게 무엇이든 얻기를······ 해내기를 바랄게요.’

백리연은 자신의 응원이 화운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출입문 앞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어둠은 점점 깊어졌고, 사위는 어둠에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순간 굉음과 함께 영롱한 오색의 광채가 전각의 벽을 부수며 사방으로 파문처럼 퍼졌다.

깜짝 놀란 백리연은 손을 들어 막으며 터져 버린 출입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로 이때 사방으로 퍼져나갔던 오색의 광채가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아!”

백리연이 탄성을 터트렸다.

실내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화운.

파-앗!

오색의 광채가 화운의 미간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곧 화운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도 오색찬란한 신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백리연은 자신이 목격한 게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화운이 눈을 떴으니 잘 된 것이리라 믿었다.

화운은 둥실 떠오르듯 몸을 일으키더니 다가왔다.

그리고 말했다.

“응원해 줘서 고마워.”

“아!”

백리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화운만 쳐다봤다.

‘알고 있었어! 내가 매일매일 찾아와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백리연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준 것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다쳤군.”

화운이 손을 뻗어 백리연의 팔을 들어올렸다.

문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터져나간 파편을 막느라 생겨난 상처였다.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아.”

화운이 말한 순간이었다.

화운에게서 오색의 광채가 흘러나와 다친 팔을 휘감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길게 찢어져 나간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었다.

아니 치유되어 아물었다기보다는 다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백리연은 이 놀라울 정도로 기이한 광경에 두 눈을 더욱 치뜨며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은 말없이 웃어주다가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무영투가 바람처럼 도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담대후 역시 도착했다.

“그냥 나오면 되지 꼭 그렇게 요란을 떨어야겠느냐?”

무영투가 면박하듯 말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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