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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96화 (196/207)

#196. 천마탑 안으로

무해는 평화로웠다.

대전각의 일꾼들은 주 총관의 지휘 아래 매일같이 쓸고 닦느라 분주했고, 북궁설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하루 종일 무공수련을 했다.

사황은 오전에 한번 모두의 무공을 다듬어 주고는 하루 종일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혔다.

화운은 사황이 무공을 가르쳐 주는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사황이 돌아가고 나면 모두와 함께 수련했다.

북궁설도 그렇고 모두들 수련에 열심히 임했다.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에 대해 화운의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였을 뿐, 실체를 본 적도 없었음에도 잠깐의 게으름도 피우지 않을 정도로 열중했다.

자신들의 무공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진 데다 함께 수련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화운은 무영투와 함께 정신없이 몰아치는 마귀들처럼 틈틈이 비무를 해주었다.

다들 처음엔 허둥댔지만 방패를 이용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공력의 소모를 크게 줄여가며 적응하기 시작했다.

방패와 흉갑.

개떼처럼 밀려드는 마귀들을 상대할 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는 다들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이무기의 비늘로 만든 방패는 어지간한 강기조차 거뜬히 막아낼 정도로 단단했으니까.

그럼에도 다들 무인이라는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 무인끼리의 싸움에서는 거추장스러울 거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다.

방패를 잘만 사용한다면 비슷한 무경이 아니라 한 단계 위의 고수를 상대할 때도 큰 힘을 발휘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분발해야겠군. 이러다 저 녀석들한테도 추월당하는 거 아닌지 몰라.”

백리명이 선우유성과 남궁현을 힐끔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곁에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들의 성장이 정말 눈부시죠?”

“어. 연이도 그렇고 한 단계 더 올라설 때가 된 모양이야. 하, 그러고 보면 나만 헤매고 있는 것 같아.”

백리연은 화운에게 운연검을 배운 후부터, 선우유성은 혈존에게 혈천멸살강기 즉 자령신공을 배운 다음부터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남궁현은 새로운 걸 배우진 않았다.

다만 사황에게서 버려야 할 것들을 배웠다.

남궁검가의 무공은 육신의 단단함과 공력의 공고함 그리고 초식의 무결까지 너무 많은 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성장이 더뎠다.

사황은 무공이 강해질수록 자연적으로 성장하는 부분들은 굳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검학의 초식을 단순화시켰다.

어려서부터 복잡한 초식을 익힐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남궁현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선우유성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사황의 가르침을 잘 따랐고, 그 역시 가파르게 강해졌다.

성장이 가장 더딘 건 백리명이었다.

어느 정도 성장해 버린 상태에서 검학과 심공 둘 다를 다시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사황은 백리세가의 난화십이검이 원래는 여인의 검술이었다는 걸 꿰뚫어보고는 사내에게 맞도록 좀 더 패도적으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백리명이 익히고 있던 심공 역시 강렬하게 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성장이 가장 더디다는 것에 탄식하고 있는 백리명.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무재가 뒤떨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황이 손봐준 검학과 심공이 백리세가의 무공을 더욱 강하게 탈바꿈시켜 놓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제가 운이만큼 강해지지 못하는 것에 낙담할 때 그 녀석이 해준 말이 있어요.”

담명이 화운을 언급하자 백리명이 돌아보며 관심을 보였다.

“사람은 성향이 다들 달라서 성장하는 방식도 속도도 다 다른 법인데, 하물며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지금 앞서 간다고 우쭐댈 일도 아니고, 지금 한 걸음 늦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라고 웃어주더군요.”

“그래,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지.”

백리명이 동감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백리연과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화운을 응시하며 불만이라는 듯 말했다.

“근데 저 녀석은 어째서 오만할 줄도 모르는 걸까? 좀 그런 모습도 보이고 그래야 그러면 안 된다고 형으로써 한마디 해주고 그럴 텐데 말이야. 씁!”

“삼류로 살아봤으니 아는 거죠. 가진 자들의 오만함이 얼마나 꼴불견인지.”

담명이 친근한 눈길로 화운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 그랬지. 그러고 보면 삼류 밑바닥에서 천하제일까지. 정말 대단한 길을 걷고 있는 거군!”

“대단하죠. 어쩌면······.”

“······?”

“어쩌면 우린 천하에 두고두고 회자될 전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설······ 그래 전설이 될 지도 모르겠다.”

담명과 백리명이 화운을 높이 우러러보고 있을 때 오늘은 웬일인지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던 무영투가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모여봐라!”

무영투의 외침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모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무영투는 모두가 모이자 얼굴 가득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보자기를 풀더니 곱게 접혀있는 푸른 천을 활짝 펼쳤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깃발이었다.

다섯 글자가 용이 힘차게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활기차고 웅혼한 필체로 수놓아져 있는 깃발.

“신풍영웅대(神風英雄隊)!”

백리명이 깃발의 다섯 글자를 읽었다.

“그래! 니들은 신풍이 되어 마도를 쓸어버릴 영웅들이다.”

무영투가 모두를 쓸어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깃발의 다섯 글자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신풍영웅이라는 호칭이 젊은 피를 들끓게 한 것이다.

화운과 북궁설만이 평소의 얼굴 그대로였다.

화운은 신풍이라는 두 글자가 감회가 새로운 정도였고, 북궁설은 이름 정도에 가슴이 뛰기에는 나이와 배포가 남달랐다.

“좋은데요.”

화운이 감사의 눈길로 바라보자 무영투의 어깨가 한 치는 더 올라갔다.

“그치? 진짜 좋지? 이 명칭보다 너희들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다들 열심히 해서 진짜 영웅이 되어야 한다. 알았지?”

“옙!”

“옛!”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대표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벌써부터 영웅이 된 것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천종천마교를 막고 나면 이곳은 무해로 남을 거고, 니들은 각자 문파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신풍영웅대라는 걸 절대 잊지 마라. 무영천은 천하를 살필 거고, 천마와 같은 괴수가 또 나타나 니들의 힘이 필요하면 이 깃발을 천하에 내걸 테니까.”

무영투가 꿈꾸는 무영천의 미래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다들 눈치를 챘는지 웃었다.

“왜? 왜 웃어?”

“멋집니다.”

화운이 웃으며 말했다.

“그치? 멋지지? 이건 진짜 멋진 거다.”

“예. 정말 멋집니다. 무영천은 천하를 어둠으로부터 지켜주는 등불 같은 존재가 될 겁니다.”

화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며 말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무영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직은 네가 천주라는 걸 잊지 마라.”

***

이틀 후 하오문의 사미희가 찾아왔다.

“신풍무영대가 뭐예요?”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장대에 걸려 있는 깃발을 본 것이다.

“아, 이곳에 모여 있는 후기지수들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모여 있는 면면도 그렇고 명칭도 그럴 듯한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세간의 관심 좀 받겠는데요?”

“그럴까요?”

화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굴자 사미희가 다시 말했다.

“제가 알기로 천종천마교를 상대하려고 모인 것으로 아는데, 그들이 알면 가만히 있겠어요?”

세간의 지나친 관심은 좋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화운은 웃었다.

“알아도 습격자들이 올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마는 알고 있다.

화운이 경천보패를 손에 넣었음을.

그러니 신풍영웅대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도 알고 있다.

화운이 시간을 되돌려 방비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거기까지 알지 못한 사미희는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화운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과신한다고 여긴 것이다.

“뭐, 대단한 분이니 알아서 잘하시겠죠. 그보다 전해드릴 일이 있어서 왔어요.”

“급한 거 아니면 우선 앉으십시오.”

“급할 수도 있어요. 아니 중요한 일일 거예요.”

“······?”

화운은 사미희가 이렇게 말하는 걸 처음 보는 것이라 궁금한 얼굴로 쳐다봤다.

“천마가 나타났어요.”

천마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도 천마대겁을 일으켰던 그 천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천마의 등장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등장이 원래보다 빠르다는 걸 알고 있는 화운으로서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천종천마교에 본문의 세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예.”

“그분이 알려온 정보에 의하면 천마가 나타나 멸제를 일격에 쓰러트렸다고 해요. 그런데 의아한 건 그 자리는 분명 반역을 획책한 자리였는데 멸제조차 죽이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죽이지 않았다고요?”

화운이 눈을 치떴다.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했던 바로는 천마가 멸제를 손가락 하나로 쪼개버렸다.

그런데 이번엔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왜지? 그만큼 강해지기 전이라는 건가? 아냐. 그건 아닐 것 같아. 다른 이유가 있어. 지난번에 명왕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막았잖아!’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천보패를 사연홍에게 준 것도 의심스럽다.

자신이 경천보패를 손에 넣은 걸 알았을 텐데도 빼앗으려고 하지 않고, 명왕에게 가지 못하도록 막기만 했다.

‘알아볼까?’

칠대문파와 구룡제 등과 만나기로 한 날짜는 아직 보름이 남았다.

그러니 천종천마교에 다녀오고도 남는다.

“제겐 중요한 정보입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피차 돕기로 한 건데.”

“다른 것도 있습니까?”

“아뇨. 문주님께서 중한 정보 같다면서 화 공자께 화급히 전하라고 하셨어요.”

“문주님껜 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사미희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렇게 감사하면 지난번에 월영을 끌고 본문의 총단까지 찾아간 노인의 정체 좀 알려주세요.”

“그분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그때 문주님께서도 정말 많이 놀라셨는지 머리칼이 조금이라도 붉은 기운이 보이면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어요.”

화운은 잘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예요? 진짜 정체가 뭔가요?”

“······.”

잠깐 침묵한 화운은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상황도 조금 달라졌고, 천옥당이라면 함부로 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와 동급이라고 보고 하십시오.”

“천마와 동급이라고요? 그런 사람이······ 헉!”

사미희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보를 다루는 하오문의 중책답게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더 알려고 가까이 하려다간 하오문이 몰살당할 겁니다.”

끄덕끄덕!

많이 놀란 모양인지 고개만 끄덕이는 사미희.

그녀는 어서 빨리 이 사실을 문주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 돌아가겠어요.”

“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다음엔 놀랄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요.”

화운이 애써 웃어주자 조금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미희.

그녀는 곧 종종 걸음으로 화운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잠깐 골똘히 생각하던 화운은 스승 담대후를 찾아갔다.

천종천마교에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

감숙성 천종천마교.

화운은 하루 종일 천종천마교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그가 알던 것에서 크게 다르거나 뭔가 특별한 변화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지?’

화운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명왕이랑 멸제를 죽이려고 하면 천마가 또 막을까?’

예전엔 명왕이나 멸제 등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어찌 하여 그들을 지키려는 것일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자신이 명왕을 죽이려고 할 때 천마가 또다시 막을지 말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천마가 그러는 이유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천마만이 안다.

‘알고 싶다면 만나보는 수밖에!’

화운은 몸을 날렸다.

천마가 있는 천마탑을 향해서였다.

천마탑.

화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내려섰다.

일부러 인기척을 감추지 않았기에 사방에서 마인들이 몰려왔다.

명왕과 멸제조차 상대가 안 되거늘 무엇이 두려울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천마탑을 향해 걸었다.

일층엔 출입을 막고 있는 석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천마를 이길 자신은 없지만 그에게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시간이 되돌아갈 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화운은 석문을 한 주먹에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화운이 주먹을 쥐기도 전에 석문이 열렸다.

그그그그긍!

석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검은복장의 노인이 나왔다.

천마의 그림자라는 혼마였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지존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혼마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전신에서 후텁지근한 열기를 동반한 시커먼 마기가 폭풍처럼 터져 나와 화운을 엄습했다.

약한 자들에겐 무소불위의 공포와도 같은 혼마의 성명절학 혼돈멸혼의 마기였다.

하지만 화운은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여기며 천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그그그긍!

화운을 집어삼킨 천마탑 일층의 석문이 무겁게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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