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화산의 검은 정말 쉽게 뽑히는군요
“우릴 찾아오신 것이오?”
우진궁주가 정중히 물었다.
그는 물론이고 다들 천하정파의 기둥이라 불리는 이들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화운을 응시했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화운의 모습이 워낙 비범해 보여서였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화운은 우진궁주가 다시 말하려는 순간 뱃전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는 우진궁주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저에겐 두 분의 스승님이 계십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우진궁주는 갑작스런 말이었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며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한 분은 저에게 검의 기초부터 궁극에 이르는 길까지 열어주신 분입니다. 명성을 쫓는 분이 아니셔서 별호 하나 없으시지요. 그리고 또 한 분은 천지만물은 결국 하늘의 법도 안에 있음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도(道)는 이미 내 안에 있고 이미 나의 것이니 굳이 받아들일 필요도, 굳이 내칠 필요도 없다고 하신 분입니다.”
화운은 무당검성의 가르침을 말했다.
그러다 보니 무당의 색채가 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공(功)이라는 건 음과 양이 어울린 것이다. 음과 양이 하나 되니 어찌 힘(力)이 되지 않을까. 공력이라 함은 그저 음과 양의 어울림일 뿐이라고······ 하셨지요.”
우진궁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짙게 떠오르자 화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무엇을 좇고자 가시는 길입니까?”
화운이 물었다.
그 물음에 우진궁주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나한당주와 매화검주 그리고 멸절신니와 일양신수까지 차례로 쓸어보며 잇달아 물었다.
“거기에 도(道)가 있습니까? 거기에 진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공(功)이 있습니까?”
모두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의 물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무슨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자 애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시주의 정체가 무엇이오? 대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이오?”
나한당주가 물었다.
화운은 나한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림에 불목하니와 금강을 돌려준 사람입니다.”
불목하니는 절에서 밥 짓고 물 긷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영자가 소림에 불목하니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금강은 금강부동을 의미했다.
나한당주가 놀랄 수밖에.
“시주께서······?”
“그리고 무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사람입니다.”
무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모두를 굳은 표정을 지었다.
“무해에서 왔단 말이냐!”
일갈과 함께 차가운 검을 뽑아든 이는 화산의 매화검주였다.
화운의 시선이 매화검주에게로 향했다.
“화산의 검은 정말 쉽게 뽑히는군요.”
“상대가 악도라면 화산의 검은 결코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게 대단한 검이 어찌 하여 천마와 천종천마교를 향해서는 뽑히지 않은 겁니까?”
“그들이 이 땅에 침범하였을 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던 화산이다! 감히 능멸하려 들지 말라!”
“수십, 수백 년 동안 수만의 아이들을 납치해 간 건 침범한 게 아닙니까?”
“······!”
매화검주는 반박을 못하고 눈만 치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이 얼굴에 한 가득이었다.
“설, 설마 무영천?”
“맞습니다.”
화운의 대답에 매화검주의 검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졌다.
천종천마교에 납치되는 아이들을 구하고, 천종천마교로 쳐들어가 강시당주를 없앤 자가 악도일 수가 없어서다.
화운은 시선을 돌려 나한당주를 바라봤다.
“제 정체를 물으셨지요? 전 무영천의 천주이며 지금 무해를 찾아가시는 분들과 그 분들의 문파를 지켜주려는 사람입니다.”
“······!”
강한 충격과 의문이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은 멸절신니였다.
화운은 멸절신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매화검주님처럼 검을 뽑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사실이다.
이미 벌어졌던 일이고, 이 자리의 모두가 죽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광경까지 봤다.
하지만 이들은 알지 못한다.
그 높은 자존심에 화운의 말만으로도 분노하고 격노할 만 했다.
다행이라면 멸절사태가 이 자리의 누구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다.
아미파의 장문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사문에 머물지 못하고 늘 세상 밖으로 떠돌고 있었기에 온갖 군상들을 만나보았고, 별별 일도 다 겪어본 그녀였다.
어렵고 복잡한 일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를 터트리기보다는 의문부터 풀고자 했다.
“그토록 대단한 무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이유가 무엇이냐?”
화운은 멸절사태가 고마웠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에게 딱 필요한 물음이었으니까.
“세상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세상을 지킨다고? 무엇으로부터 지킨단 말이냐?”
“무영천과 무해 그리고 칠대문파와 오대세가 거기에 천사련까지. 모두가 힘을 합쳐 상대해야 할 적입니다.”
그야말로 천하무림 전부를 합쳐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엔 다들 놀랐다.
하지만 곧 의구심이 떠올랐다. 세상에 그런 적이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천종천마교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다들 진한 의구심만 드러내자 일양신수가 물었다.
그는 화운이 한 무리의 수장이라는 걸 알게 되자 존중해 주고 있었다.
“그에 관한 대답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무해곡의 당대 곡주께 직접 듣는 것이 낫겠습니다.”
“너는 무해와 어떤 관계냐? 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우리의 앞을 막고 무해를 대변하는 것이냐?”
멸절신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화운의 말을 들을수록 무해와 가깝게 느껴져서다.
“적으로 시작했다가 같은 길을 걷게 된 사이입니다.”
“손을 잡았다는 말이냐!”
멸절신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무해는······!”
멸절신니는 대답을 못하고 큰소리만 치려다가 말았다.
아직은 명확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때 매화검주가 물었다.
“무해는 과거의 원한을 잊었소?”
화운을 대하는 매화검주의 자세가 달라졌다.
단순히 일문의 수장이어서가 아니다.
사천과 섬서 일대에서 청성이나 화산이 전혀 알지 못하던 아이들의 납치사건을 해결했고, 천종천마교의 앞마당까지 찾아가 강시당주와 십이무상 중의 한 명까지 처치해 놓고도 무영천의 이름은 그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무영천이 명성을 쫓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청성이나 화산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무해는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았습니다.”
화운의 대답에 매화검주는 물론이고 모두의 얼굴이 무겁게 굳었다.
“그럼 우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들이 거기에 있음을 세상에 알린 것이란 말인가?”
멸절신니가 물었다.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해에 관해서는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함정을 파고 음모를 꾸며야 할 정도로 무해가 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흥! 그토록 강하다고 하니 직접 보아야겠군!”
멸절신니가 부아를 터트렸다.
무해로 쳐들어갈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화운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다.
지금 멸절신니는 무해보다 화운에 대해 더 궁금했다.
‘대체 이 어린 녀석은 어디서 툭 튀어나온 것이란 말이냐? 저 나이에 천하를 위진시킬 정도로 강해 보이니 실로 놀라운 일이로다! 대체 누가 이 녀석을 가르친 것이란 말이냐?’
멸절신니는 무해로 곧장 쳐들어가겠다는 얼굴로 화운을 쏘아봤다.
그녀의 그런 심사를 알지 못한 화운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말만으로 천하의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건 정말 어렵겠지요.”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화운.
그런 화운을 지금까지 빤히 응시하고만 있던 우진궁주가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사실대로 말해주었으면 하네.”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본파의 자허도장님을 아시는가? 세상엔 무당검성이라고 알려지신 분이시네.”
무당검성에 관한 물음이 튀어나오자 다들 관심을 보였다.
화운은 내심 고민했다.
이곳으로 올 때는 무당검성의 이름으로 대화를 풀어갈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우진궁주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바꿨다.
왠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 협박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진궁주가 무당검성을 들먹인 이상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무당의 검도 아니오, 오롯이 이 늙은이의 심득에서 시작하여 너의 검이 되었다. 허니 무당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도다.”
화운은 무당검성이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그런 후 우진궁주를 빤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절 자유롭게 놓아주시고자 그리 말씀하셨습니다만, 제 마음은 이미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당에 묻고 싶습니다. 자허도장께 가르침 받은 저를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화운의 물음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근래 이삼백 년의 정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무인이라 칭송받는 무당검성.
천마대겁! 사황혈천!
일백여 년 전, 동시대에 나타나 천하를 공포로 몰아간 천마와 사황의 대혈겁을 한 자루 검으로 막아낸 위대했던 검의 신화!
그런 무당검성에게 무공을 배웠다고 하니 실로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받을 수밖에.
“그분께서 살아계신단 말인가?”
멸절신니가 놀란 얼굴로 물음을 터트렸다.
정파의 위대한 무인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와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다는 의혹이 동시에 떠오른 얼굴이었다.
“제게 오 년의 시간을 허락하시고 등선하셨습니다.”
오 년의 시간 동안 무공을 가르쳐주고는 등선했다는 말이다.
무당검성의 죽음과 그의 검을 배운 제자의 등장.
모두들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중에도 심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어 혼란스런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무당장교진인에게 태사백조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우진궁주는 차분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당내에서는 오래전부터 태사백조의 등선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기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의혹을 가질지언정 놀라지 않았다.
“증명하실 수 있겠는가?”
우진궁주가 물었다.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졌으나 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다.
“무엇으로 증명한단 말입니까? 제가 그분께 배운 건 건곤무상의 검인데 무당에 그 검을 알아볼 분이 계십니까?”
“······!”
우진궁주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장교진인께 여쭈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무당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분께선 무당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셨지만, 그분의 뿌리가 무당이거늘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돌려줄 수 있다면 돌려줄 생각이었습니다.”
“검을 돌려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네. 그분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당엔 경사스런 일이라네.”
우진궁주는 단호했다.
무당은 태사백조의 검을 탐내지 않는다.
그분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음을 더 기쁘게 생각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역시 무당은 무당이구나!’
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나한당주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시주, 말 나온 김에 소림에도 사실대로 말해주었으면 하오.”
“말씀하시지요.”
“시주께서 구해온 불목하니의 말이 시주께서 금강을 익힌 것 같다고 하더군요.”
화운이 금강부동을 익힌 것 같다는 말을 무영자가 한 것이다.
무영자 나름대로 무영투와 화운을 위해서 소림과 남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일부러 드러낸 것이다.
소림의 천년전설인 금강부동을 익힌 이를 결코 내칠 수 없을 것이니 속가제자로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냐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리만 된다면 무영천의 앞날은 탄탄대로 일 것이다.
화운은 무영자의 그런 의도를 간파했다.
무영자답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으며 나한당주를 향해 대답했다.
“소림에는 송구합니다. 꼭 필요하여 익혀야만 했습니다.”
화운의 대답에 나한당주의 눈이 커졌다.
놀람과 당혹스러운 얼굴로 일순 말문이 막혀 버린 나한당주는 이내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얼마나, 얼마나 익히셨소?”
“완성경의 직전입니다.”
“······!”
나한당주는 경악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육조 혜능선사께서 남기신 금강부동을 완성경에 다다를 정도로 익혔다니!
화운의 나이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그런 자를 소림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소림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올 일이었다.
“시, 시주, 소림으로 함께 가 주셔야겠소.”
“그러지 못합니다.”
화운이 거부하자 나한당주의 얼굴이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화운은 소림과 반목할 생각이 없었기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한당주님, 들으셨다시피 전 무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몸입니다. 소림으로 돌아가셔서 장문인께 보고부터 하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아, 아미타불!”
나한당주는 불호를 외었다.
금강부동을 완성경에 가깝도록 익힌 이를 자신이 무슨 수로 감당할 것이며, 설사 감당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칫 무당과 불화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소림만의 일이 아니라 무당과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화운은 무당의 우진궁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으셨다시피 전 소림의 절학을 허락 없이 익혔습니다. 장교진인께 그 말씀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금강이라면 혹시······?”
우진궁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문을 드러냈다.
화운은 대답하지 않고 나한당주를 돌아봤다.
“금강부동입니다. 여기 계신 시주께서 한 분의 불목하니를 소림으로 모셔왔는데, 그분께서 금강부동을 가져오셨습니다. 아미타불.”
또 한 번의 충격이 모두를 강타했다.
무당검성에 금강부동!
매화검주와 일양신수 그리고 멸절신니는 놀란 눈만 끔벅거리며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모두를 한 차례 둘러본 후 말했다.
“두 달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가시려고 했던 악양에서 다시 뵙지요. 외람되지만 그땐 칠대문파의 장문인들께서 직접 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장문인들은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일신에 문제가 생기면 각파에 엄청난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확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장문인들이 참석할 수밖에 없는 화운의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그 자리엔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께서도 함께할 것입니다.”
모두들 각파로 돌아갔다.
소림과 무당이 발걸음을 돌리자 나머지 문파들 역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화운은 무당검성과 금강부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조차 밝히지 않고서는 애초 말로만 설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화운은 구룡성으로 향했다.
구룡제와 적성대도황 그리고 태양존자를 두 달 후에 있을 정사파의 대회합 자리로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천사련의 건물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사파 삼천의 지존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에 웅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