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적이 아니니까요
사연홍이 죽고 감숙성을 벗어난 시점으로 되돌아간 화운은 무거운 얼굴로 무해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사황은 화운이 도착하자마자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너의 대책인 것이냐?”
화운은 사황을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웃지도 않았고, 분노한 얼굴도 아니었다.
“아닙니다.”
“허면······?”
“어르신의 입장을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허면 시간을 되돌린 이유가 무엇이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말장난 하자는 것이냐?”
“그렇게 보이십니까?”
“흥!”
코웃음 치는 사황.
화운은 그런 사황을 빤히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을 다시 만나주십시오.”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황보세가주는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감내하며 자식의 단전을 부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이기적이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들이 니놈의 친족이더냐?”
“사람이라면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제가 아버지께 그리고 어머니께 가르침을 받은 입장에서는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그분들을 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싸우자는 것이구나!”
“전 어르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사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기도 짙어졌다. 그러나 화운은 빤히 응시할 뿐 맞설 생각이 없었다.
“다행이 어르신의 입장을 막지 않아도 제 입장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르신께서는 어르신의 입장대로 하십시오. 전 제 입장대로 하겠습니다.”
“지금 같은 일을 반복하자는 것이냐?”
“저와 어르신의 입장이 평행선인 이상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황은 자신이 입장을 바꾸거나 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언젠가 무한 반복으로 자신이 생각을 바꾸도록 했던 것처럼.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백 년의 원한을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고, 화운이 괘씸해서다.
“흥! 누가 바꾸는지 보자!”
사황이 냉랭하게 내뱉으며 밖으로 나갔다.
무해를 찾아오는 칠대문파의 무인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일백이 넘어가는 시체들이 참혹하게 죽어 있는 가운데 사황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시체들을 둘러본 화운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합니다.”
사황의 얼굴이 심하게 꿈틀거린 순간 화운의 심장이 터졌다.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무얼 이해한다는 말이냐?”
“어르신껜 어르신만의 입장과 고충이 있음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흥!”
사황이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냉랭했다.
화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자신의 심장을 다시 터트렸다.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이해합니다.”
“닥쳐라!”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이해합니다.”
“닥치라고 했다!”
***
호남성 악양.
무해.
화운이 무해에 도착했을 때 사황이 보이지 않았다.
화운은 스승 담대후를 찾아갔다.
“한 식경 전부터 보이지 않는구나.”
“사라지셨다구요?”
화운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로 가시는지 아무런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다만, 왜 그러느냐?”
담대후가 반문했다.
화운의 표정을 보니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화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역정을 가라앉히기 힘드신 모양입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예.”
화운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황과의 일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담대후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어렵구나. 그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원한이 어찌 그리 쉽게 눌러지겠느냐?”
“그래서 말리지 못했습니다. 어르신의 입장이 이해가 되어버렸거든요. 제가, 제가 감히 그 입장을 무시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깨닫게 되니까 그러지 마시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음······.”
담대후는 무겁게 침음했다.
화운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낼 순 없는 일이다.
일개 문파의 일이라면 모인 사람들끼리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지금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은 인간세계 전체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자신들만으로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담대후는 침음 끝에 화운을 바라봤다. 그리고 화운이 실수한 부분부터 바로 잡기를 바라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했다.
“이해한다는 말처럼 무성의한 말도 없는 법이다.”
“그렇습니까?”
“이해하니까 그러지 말라는 뜻도 되고, 이해하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뜻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
화운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다. 자신은 그저 사황의 입장이 이해가 되어서 한 말인데, 듣는 사황의 입장에서는 무심하고 건방진 말로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운아, 스승은 사람들 사이엔 진심이 통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너도 은연중에 그 같은 생각을 하며 진심을 내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해한다는 말이 오히려 그분의 역정을 자극한 것 같구나.”
“그럼 어찌 합니까?”
“글쎄다. 너의 진심을 납득하도록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다른 방법······.”
중얼거리는 화운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담대후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 지켜봐주었다.
스승의 품을 벗어난 제자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고민을 들어주고 지켜봐주는 것 말고는 더 필요한 게 없는 법이었다.
***
닷새가 지났다.
사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깜짝 놀랄 소문이 날아왔다.
소림사가 멸문했다는 것이었다. 불목하니부터 시작해서 소림장문인까지 모조리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문이었다. 그리고 닷새가 더 지나자 이번엔 무당이 피에 잠겼다는 말이 들려왔다.
이어서 사천의 아미파와 청성이 그리고 며칠 더 지나자 섬서의 화산과 종남이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흉문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열흘이 지나자 사황이 찾아왔다.
흉신악살처럼 흉포한 기운을 숨결처럼 내뿜으며.
“말해봐라. 내가 참아야하는 이유를.”
“후대를 위해서라는 게 답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이유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답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화운은 근래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를 말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사황의 장력이 화운의 머리를 후려쳤다.
화운은 즉사했고, 경천보패의 신력이 발동되었다.
***
“이번엔 오대세가까지 모조리 죽이겠다. 말해봐라. 내가 참아야 하는 이유를.”
사황이 흉포한 숨결을 쏟아냈다.
화운은 당황했다.
아직은 답을 찾지 못해서다.
사황은 흉신악살처럼 성난 기세로 답을 재촉하고 있는데 머릿속은 하얀 백지처럼 비워져갔다.
“흥!”
더는 기다리지 못한 사황이 콧방귀를 뀌며 창을 향해 움직였다. 다급해진 화운은 언제부터인가 가슴 한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적이 아니니까요.”
“뭐?”
사황이 황당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었다.
화운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를 꺼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용할 생각만 했습니다. 어르신은 제 적이었으니까요. 천마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쓰러트려야할 적이라고 생각하여 제 마음에 걸리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대를 위한다는 말로 참으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냐?”
“·····예. 지금은 적이 아닙니다.”
화운이 대답하자 사황이 입을 다물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사황의 얼굴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멍청한 놈.”
“······!”
“멍청한 데다 한심하기까지 한 놈!”
“······.”
“어찌 하늘은 너 같은 놈을 내게 던져주셨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 살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날 움직이고 싶었다면 넌 그것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우리가 적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이다.”
“죄송합니다.”
화운은 고개를 숙였고, 사황은 잠시 침묵했다.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 화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다가도 방금 들은 말을 떠올리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사황은 침음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며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탁 트인 정경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심사가 다소 정리가 되었다.
- 지금은 적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적이 아닌 것 같다는.
그러니 그 말 한 마디에 분노가 가라앉은 것이겠지.
‘허······!’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황.
고작 그 한 마디에 그토록 오랫동안 쌓아왔던 분노가 사그라진단 말인가!
‘지쳤던 겐가?’
아니다. 오랫동안 쌓아왔던 분노는 쉽게 지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지. 그럴 수가 없지. 허면 결국 이놈 때문이라는 겐가?’
암만 생각해봐도 그거 외에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놈의 존재가 가슴 깊이 들어와 버린 모양이다. 그러니 그 말 한 마디에 그리 쉽게 잦아든 것이겠지.
‘망할 놈 같으니!’
사황은 다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흉신악살처럼 넘실거리던 분노는 그렇게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히 사그라졌지만, 아직 자존심이 남아 있었다.
“무해를 찾아오는 자들을 돌려세워라. 그리고 그들은 물론이고 사파까지 온 천하를 하나로 모아라. 설득을 하던지 협박을 하던지 니놈의 주둥이만으로 그들을 모아봐라. 나의 존재와 마신 아수라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예.”
“그들이 무해곡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다면 나 역시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려울 것이다. 내가 분노를 참는 것보다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더.”
화운은 대꾸하지 않았다.
사황의 말대로 어려울 것이라는 걸 알아서다.
“멍청한 놈.”
사황은 한심하다는 말을 끝으로 밖으로 사라졌다.
화운은 사황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황의 뒷모습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단순히 적이 아닌 정도가 아니어서다.
아직은 어떻다 라고 말할 순 없었으나 사황이 어깨에 짊어진 원한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
장강의 선박.
천년소림의 나한당주, 대무당의 우진궁주, 화산파의 매화검주, 아미파의 멸절신니 그리고 점창파의 일양신수가 각파의 제자들을 이끌고 장강의 선박에 몸을 싣고 호남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무해노괴의 흉심이었을까, 아니면 우리들의 시기심이었을까? 심란한 마음을 가누질 못하겠구나.
일양신수가 어렸을 때 조사각에서 우연히 읽게 되었던 선대의 일기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어느 한 분의 일기만 가지고 다섯 문파의 선대가 남긴 정식 기록을 무시하자는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기사멸조가 아니고 무엇일까!”
화산파의 매화검주가 차갑게 일갈했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나한당주와 우진궁주가 나직이 불호와 도호를 중얼거리는 중에 멸절신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다스렸다.
“캬악, 퉤!”
걸쭉한 가래침이 장강의 수면 위로 뱉어졌다.
일양신수는 매화검주를 향해 두 손을 잡고 읍했다.
“사형의 심기를 어지럽혔나 봅니다.”
매화검주는 장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일양신수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치뜨며 당황성을 내뱉었다.
“저기······!”
모두들 일양신수가 쳐다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일양신수처럼 놀람을 금치 못했다.
하늘빛 청의자락을 펄럭이며 하늘의 신장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절세미장부가 보였다.
겨우 십여 장 밖에 안 되는 거리였음에도 청년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단 한 사람도 감지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