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결국 부딪쳐야 할 일이었군
화운과 무영투가 마귀들처럼 상대해 주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이 계속되었다.
백리명은 사백을 채우지 못하고 퍼져 버렸다.
북궁설보다 백 마리 정도 덜 잡은 것이다.
담명은 제외되었다.
무영투에게 공공무영비까지 배운 탓에 이런 수련이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
무영투는 화운을 무영천에 붙잡아 둘 생각이 없었다.
화운이 워낙 대단한 존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혹여 화운이 무영천을 나가 버릴 때를 대비하여 담명을 다음 천주로 낙점했다. 공공무영비를 가르쳐 준 이유였다.
백리명 다음으로는 백리연 차례가 되었다.
“방패를 써도 되나요?”
화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백리연이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 대견해서다.
“물론.”
백리연은 연무장 한쪽에 각종 무기들이 비치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동안 방패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져 가지고 와서도 거기에 두곤 했다.
왼팔에 방패를 장착하고 자리로 돌아온 백리연.
그녀는 왼팔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고는 화운을 향해 섰다.
“시작해요.”
화운과 무영투는 마귀들을 흉내 내며 백리연을 공격했다.
역시나 백리연이 눈치를 챈 게 맞았다.
방패를 정말 잘 사용했다.
급한 공격을 억지로 피하느라 공력과 체력을 낭비하지 않고 방패를 적절히 활용하여 막았다.
방패로 막고 검으로 찌르고, 또 막고 찌르고.
몸의 움직임은 최소화가 되었고, 공력과 체력은 오랫동안 유지 되었다.
백리연은 오백에 가까운 숫자를 쓰러트리고 검을 내렸다.
열네 살의 백리연이 스물다섯 살의 북궁설만큼 해낸 것이다.
방패가 그 정도로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백리연이 자리로 돌아오자 백리명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치켜세워주었다.
“연 매, 대단해. 정말 잘했어.”
담명도 칭찬을 해주었고.
“최고였다.”
북궁설 역시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감사해요.”
백리연은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때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벌떡 일어섰다.
“우리도 방패를 가져오겠습니다.”
“갔다 와.”
화운이 허락하자 냅다 뛰어 사라지는 두 사람.
화운은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본 후 북궁설을 비롯한 네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방패를 만들어 드린 이유를 이젠 알겠지요?”
화운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의 무인들은 방패를 사용하는 걸 경시하는 편이다.
가지고 다니는 것 자체를 창피해 하거나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화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방패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병기가 될 수 있고, 합공을 받았을 때 특히 유용한 방어구였다.
지금 막 백리연이 증명했듯이 무인들의 무공보다는 단순한 마귀들을 상대할 때는 더욱 더 유용할 수밖에 없었다.
“방패를 사용하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혹여 비웃는 자들이 있거든 방패로 짓이겨 버리십시오. 당해보면 알게 되겠지요. 방패가 얼마나 대단한 방어구이자 무기인지.”
화운의 말에 모두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은연중에 방패와 흉갑을 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거처에 처박아 두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바꿔야 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지고 왔으면 하는데, 괜찮을까?”
북궁설이 물었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화운이 웃어주자 북궁설을 필두로 하여 다들 각자의 거처로 향했다.
“뭣 좀 물어보자.”
“예?”
화운은 물어볼 게 있다는 무영투를 향해 돌아섰다.
“몸뚱이가 단단한 놈들이 수만이라고 했지?”
“예.”
“그럼 저들만으로는 숫자가 턱없이 모자란 거 아니냐?”
“모자라죠. 칠만의 마귀를 상대로 사천과 섬서 무림의 일만으로 상대를 해봤습니다. 섬서에서는 화산과 종남이 사천에서는 청성과 아미의 고수들을 총동원했습니다. 거기에 당문의 독과 암기까지 사용했지만 참혹하게 대패했습니다. 오만에 달하는 마귀가 살아서 돌아갔고, 우린 절반이 넘게 죽었습니다. 각파의 고수들은 대부분 전멸했고요.”
“······!”
무영투는 놀란 눈만 끔벅거렸다.
분명히 들었던 이야기다.
당시에는 그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어서 흘려들었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끔찍한 일이다.
“그럼 어쩌려고?”
“다시 당문의 도움을 받고, 천하 각파의 힘을 하나로 모아 대비해야지요.”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을 거다.”
“천종천마교로 쳐들어갈 때 모아본 적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사황을 앞세워 정무맹과 천사련의 고수들을 동원하여 천종천마교로 쳐들어갔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역시 들려주었다.
“그땐 고수들로만 한정한 거잖아?”
“그랬지요.”
“그럼 다를 수도 있다. 일반제자들까지 동원한다는 건 각파의 기둥과 대들보로도 모자라 주춧돌까지 몽땅 내놓는 거다. 자칫 한 번의 싸움으로 문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너 같으면 쉽게 내놓을 수 있겠냐?”
“아!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각파의 고수들을 동원했던 경험 때문에 너무 쉽게 생각해 버렸다.
분명 실수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실수는 아니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사황을 앞세워 정무맹과 천사련의 고수들을 동원했던 기억만 가지고 거기에 각파의 제자들을 추가하면 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무영투의 말을 듣고 보니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다.
“이 문제는 스승님이랑 사황 어르신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겠다.”
무영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북궁설 등이 앞서 갔던 남궁현, 선우유성과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방패와 흉갑을 착용한 모습들이었다.
***
화운은 스승 담대후를 모시고 무영투와 함께 사황을 찾아갔다.
사황은 근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북궁설 등을 가르칠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거처에 처박혀 지내다시피 했다.
“해서 천하각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데, 우호법께서 하신 말을 들어보니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화운이 말했고, 담대후 역시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대세가 쪽은 혈연과 인연들이 있어 하나가 되었다만, 그나마도 우문검가가 멸문하고 황보세가는 봉문하다시피 하게 되었으니 반쪽이 되었구나.”
“황보세가는 제가 한번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그들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으니 어쩌면 합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칠대문파와 천사련이 문제로구나.”
“예. 특히 칠대문파가 문제입니다. 워낙 대의명분과 체면을 중시하고 자존심이 높은 곳이라서요.”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 아미 등을 생각하는 화운의 얼굴이 복잡하게 변해갔다.
이때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사황이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천하를 부리려면 천하를 발밑에 두면 되겠지.”
“······!”
모두들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천하를 발밑에 두라는 건 군림하라는 뜻과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담대후와 무영투는 화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 화운의 무위라면 천하에 군림하고도 남았다.
사황과 천마 정도만이 화운의 상대가 될 것인데, 천마는 그의 둥지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고, 사황은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그건 싫습니다.”
화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싫은 거냐, 그만한 배포가 없는 거냐?”
사황이 물음을 던졌다.
화운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이 막지 않으신다면 솔직히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전 패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해버리면 천하가 무해를 인정하고 우러러보게 만들어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화운이 천하제일고수가 되어 천하에 군림해 버리면 천하는 화운만 쳐다보느라 무해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질 거라는 뜻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황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곧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놈과 본좌가 천마를 상대하기 전에 쓸어버리면 되겠지.”
“죄송하지만 그것도 싫습니다.”
“어째서냐?”
“우선 천마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고요. 설사 그럴 수 있다 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습니다.”
화운의 말에 사황은 물론이고 담대후와 무영투마저 의외라는 얼굴로 쳐다봤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뭐냐는 뜻이리라.
“제가 어르신이랑 목숨을 걸고 막았다고 쳐요. 돌아왔는데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으면 굉장한 허탈감을 느끼게 될 겁니다. 전 그 기분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천하가 무해에 대해 꼼짝 없이 동경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기회인데 모두가 보도록 만들어야지요. 어르신께서 천마와 싸우는 모습을요.”
정파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말을 쉽게 한다.
자신의 목숨은 천하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름난 협객들이라면 분명 천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아니 대단한 협객이 아니어도 천하를 위해 싸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웠고, 처절한 피의 지옥을 헤쳐 돌아왔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런 싸움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그때 받을 허탈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격 한번 복잡하군.”
사황이 못마땅한 듯 내뱉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화운의 말에 수긍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아니다 싶으면 짜증을 내고 호통을 쳤을 텐데 전혀 그러지 않고 있었다.
사황의 말을 끝으로 다들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한 식경 정도가 그렇게 흘러가자 화운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무당파와는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당검성께 검학을 가르침 받았으니까요.”
화운이 말한 순간 무영투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맞다, 맞아. 지금의 넌 무당의 사백조쯤 되는 거잖아!”
“무당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다른 칠대문파를 끌어들이는 길이 보일 수도 있겠다.”
담대후가 무영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칠대문파처럼 유서가 깊은 무문에서 무척 중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문의 존장을 공경하고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을 비롯하여 사문의 존장을 기만하고 거역하는 기사멸조의 죄를 특히 중벌로써 엄정하게 다스린다.
무당이 화운을 사문의 존장으로 인정한다면 적어도 무당만큼은 화운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당파의 대소사는 장교진인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천하에 해악이 될 천마와 천종천마교를 징치하러 가자는 것이니 거부할 명분이 없을 터였다.
무영투와 담대후는 그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화운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무당검성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 무당의 검도 아니오, 오롯이 이 늙은이의 심득에서 시작하여 너의 검이 되었다. 허니 무당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도다.
무당검성은 화운을 위해 무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는데, 오히려 화운 자신은 무당검성과의 인연을 이용하여 무당을 움직여야 하니 죄송한 마음이 솟구친 것이다.
화운은 고민이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사황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는 무심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운은 그 눈길을 본 순간 머릿속의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릴 정도로 미안한 감정에 휩싸였다.
“죄송합니다.”
화운은 벌떡 일어나 사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사황에게는 무해곡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수백 년의 원한을 억누르라고 소리친 것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놓고도 자신은 죄송함 때문에 그 같이 고심하고 있었으니 사황이 보기에 얼마나 짜증이 나고 화가 났을까.
사황의 입장에서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어찌 할 것이냐?”
사황의 물음에 날이 섰다.
화운을 응시하는 눈길이 차갑기 짝이 없었다.
화운은 그 눈길을 마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감내할 것은 최대한 감내할 것입니다.”
“흥!”
사황은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후.
사황의 거처에서 물러나온 화운은 담대후와 무영투에게 긴히 말했다.
“전 당장 황보세가로 가겠습니다. 그쪽 일이 잘 해결되면 곧장 무당파로 향할 거고요. 두 분께서는 여섯 명의 무공수련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그러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오늘 보니까 다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더 열심히더라.”
담대후와 무영투가 함께 걸으며 말했다.
화운은 이곳의 일은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황보세가와 무당파를 찾아가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운이 생각한 일의 순서가 바뀌어야만 했다.
황보세가를 향해 출발하기 전에 하오문에서 사미희가 찾아온 것이다.
“칠대문파가 함께 움직이고 있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아무래도 여기 같아요.”
“예?”
“무해가 등장하고, 무당검성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칠대문파 쪽에 흘러들어 갔어요.”
“결국 부딪쳐야 할 일이었군.”
“네?”
“그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마지막 보고가 의창이었으니까, 지금쯤 장강을 따라 한참 내려오고 있을 거예요. 화 공자의 그 말도 안 되는 경신술이라면 형주 근방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헌데 심각한 일인가요?”
사미희가 뭐든 알고 싶다는 얼굴로 물었다.
천마와 마신 아수라를 상대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해서다.
“칠대문파를 상대하는 일은 늘 심각한 법이잖습니까.”
화운은 어물쩍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