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설마 거기까지 의도한 것일까요?
사연홍은 두 팔이 잘리고도 한 식경을 버텼다.
그때까지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강시당이 외진 곳에 자리한 데다 처음부터 화운이 기막으로 둘러쳐 싸움으로 인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화운은 사연홍이 죽기 직전에야 경천보패를 부쉈다.
시간은 일각 전으로 되돌아갔고, 그때는 화운이 경천보패를 손에 넣은 채 사연홍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각이었다.
“널 위해 되돌아갈 시간 따위는 이제 없을 거야.”
화운은 죽어가는 사연홍에게 냉랭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강시당에는 강시들과 사혼귀수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운은 그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다음 기감을 풀어 지하를 살폈다.
일전에 자신이 무너트린 것 때문에 지하로 내려갈 통로가 없었고, 흑귀들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단한 몸을 가진데다 원래 땅속에 살던 이들이니 대부분 어딘가에 살아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참에 전부 베어버리면 좋을 텐데······.’
화운은 기감을 더 넓게 퍼트려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흑귀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천마가 데리고 있으려나?’
천마탑 쪽도 살펴볼까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금세 천마에게 발각이 될 것이 분명해서다.
그와 싸운다면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절대검력을 완성했고, 금강부동도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다.
하지만 천마의 놀라운 신위를 생각하면 정면으로 격돌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었다.
“그래, 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아직은 천마에게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한 화운은 강시당 밖으로 나갔다.
아직은 어둠이 짙었다.
화운은 땅을 박차고 떠나려다 퍼뜩 떠오른 것이 있어 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돌아갈 일이 아니지! 명왕과 멸제 그리고 마존을 처치할 수 있잖아! 구호법들이랑 십이무상들까지 쓸어버리면 천마만 남는 거잖아!”
화운은 자기가 생각해도 아주 좋은 기회라며 명왕부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거대한 존재가 화운을 향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게 느껴졌다.
절대 이상의 경지에 오른 화운이기에 느낄 수 있는 초감각이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화운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천마탑을 돌아봤다.
‘천마다! 천마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화운은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천마가 막고 있어서였다.
명왕부로 향하는 화운의 걸음을 천마가 막고 있었다.
화운은 천종천마교 밖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천마의 기운이 다소 수그러들었다.
‘정말! 정말 그런 거냐?’
화운은 다시 몸을 틀었다.
이번엔 멸천부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순간 천마의 기운이 다시 커졌다.
화운은 다시 천종천마교 밖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천마의 기운이 수그러들었다.
이로써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도망가는 건 막지 않겠으나 명왕이나 멸제를 죽이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화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명왕과 멸제 등을 죽일 땐 가만히 있던 천마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을 죽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
왤까?
그땐 그럴 줄 몰랐고, 이젠 그걸 알아서 막겠다는 건가?
정말 그런 건가?
화운은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채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단숨에 천종천마교의 성곽을 넘어 사라졌다.
***
반 시진 후.
감숙 땅을 벗어난 화운은 다시 한 번 경천보패를 부쉈다.
다시는 사연홍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인이라고는 하나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두 팔이 잘린 채 죽어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녀가 죽고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경천보패를 발동시켰으니 그녀가 이 땅에서 숨을 쉬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화운은 사황이 있는 무해를 향해 다시 질주했다.
호남성 악양.
무해.
화운이 특별히 부탁하여 넓게 만들어달라고 한 연무장에서는 무공수련이 한창이었다.
북궁설은 화운이 보여주었던 저돌적이고 강렬했던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녀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백리명이 감탄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연무장 한쪽에서는 선우유성과 남궁현이 죽이 맞아 서로 검을 보여주고 설명하며 함께 수련했고, 또 한쪽에서는 백리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참 운기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 같은 광경을 쓱 훑어보던 담명은 백리명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게으름피우다간 동생들에게 추월당할 겁니다.”
“너도 놀고 있으면서 그러냐.”
“에이, 저랑 형님은 다르죠. 전 이미 이기제기의 경지에 들어선지 오래고, 형님은 이제 그 문턱에 다다랐잖습니까.”
“어쭈, 그래서 이 형님을 얕잡아보겠다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설 누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수련도 게을리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담명이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백리명은 장난기 가득한 악동처럼 웃었다.
“우후후훗! 설 누님을 내가 먼저 차지할까봐 걱정이 되어서가 아니고?”
“어? 눈치채셨습니까?”
“야, 밥 먹을 때도 힐끔거리던데 어떻게 몰라보냐?”
백리명이 이죽거렸다.
담명은 백리명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러게요. 어쩌다가 반해 버려서······.”
“어쩔 수 없잖아. 저런 누님인데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백리명이 북궁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담명도 북궁설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북궁설은 두 사람이 해바라기처럼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구슬땀을 흘려가며 검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근데요, 형님.”
“어?”
“형님은 정파잖아요. 그것도 무림세가의 소가주씩이나 되시잖아요.”
“근데?”
“설 누님은 사파의 지존이랄 수 있는 구룡제의 여식이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백리세가를 위해서라도 형님께서 마음을 접는 게······!”
듣고 있던 백리명이 손을 들어 담명의 뒤통수를 갈겼다.
“비겁했다.”
“죄송합니다.”
“연이 어떠냐? 얼굴로만 따진다면 설 누님보다 더 아름답고 또 결정적으로 어리잖아.”
“화 사숙이 있잖습니까.”
담명에게는 화운이 할아버지의 제자였기에 사숙이라 불렀다.
“사랑은 전쟁이다. 싸워서 이긴 자가 모든 걸 쟁취하는 법이다.”
“솔직히 화 사숙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어째 난 만만하다는 말로 들린다.”
“화 사숙보단 만만하지요, 뭐.”
담명의 말에 백리명의 미간이 한차례 꿈틀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긴 뭐······ 내가 봐도 잘나긴 했더라.”
“무공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하고 다니는 일도 그렇고, 너무 대단해서 시기질투도 못하겠습니다.”
“내 말이 그거라니까. 걘······ 너무해.”
“맞아요. 너무해요. 사숙이 그 고생까지 하고 있으니 사숙 앞에서는 투덜거리지도 못하겠어요.”
“내 말이! 걘 진짜 너무해. 빈틈이 없다니까!”
백리명과 담명이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였다.
유령처럼 두 사람 뒤로 나타난 이가 있었다.
“니들이 너무한 거 아니냐!”
“으헥!”
“깜짝이야!”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 앞에 무영투가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어째 니들은 자리만 비우면 그렇게 딴 짓거리냐?”
“우헤헤, 오셨습니까?”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백리명이 헤프게 웃었고, 담명은 예의바른 척 허리부터 조아렸다.
“잘되나마나 다음부턴 니들 때문에 자리를 비우지 못하겠다.”
“잠깐 쉬고 있었던 겁니다.”
“맞습니다. 형님께 잠깐 여쭐 것도 있고 해서 왔다가 잠깐 쉬고 있던 겁니다.”
“근데 어째서 니들만 옷이 뽀송뽀송한 것이냐?”
“그야 뭐······ 워낙 땀을 안 흘리는 체질이라서요.”
“맞습니다. 땀이 없는 체질입니다.”
“진짜 땀이 없는 체질인지 내력 없이 한 시진(2시간) 동안 뛰어볼 테냐?”
무영투가 으름장을 놓자 담명이 재빨리 백리명에게 말했다.
“형님, 말씀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만 물러가서 가르쳐 주신 바를 심사숙고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러시게. 나도 말하다보니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았다네. 이 깨달음의 단초가 날아가 버리기 전에 이 우형도 검을 휘둘러보아야겠네. 껄껄껄!”
담명은 잽싸게 튀었고, 백리명은 자기 입으로 소리나게 웃은 후 검을 뽑아 이리저리 휘두르며 무영투에게서 멀어졌다.
무영투는 그 같은 광경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스승님께서도 무영천으로 개명해도 좋다고 하셨으니 도둑에서 정파의 명문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할 수 있겠어.’
세상은 아직 모르고 있으나 정파의 최고 후기지수들은 모두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들을 가르치는 훈련교관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나면 자신과 무영천은 명문 중의 명문으로 우뚝 서리라.
무영투는 자신의 원대한 야망이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멀리 삼층 창가에 사황이 보였다.
아닌 것처럼 행세하면서도 수련하는 모습을 꼼꼼히 지켜보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이토록 뛰어난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복이지.’
무영투는 사황을 향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리 듯 포권했다.
무영투 말고도 먼 길에서 돌아온 사람은 또 있었다.
화운이었다.
사황은 화운과 마주 앉았다.
“회수한 것이냐?”
“예.”
화운이 품에서 경천보패를 꺼내 탁자 위로 올렸다.
사황은 손을 뻗어 집어 들고는 살펴봤다.
범상치 않은 신기가 느껴지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기이한 힘이 느껴지는구나.”
이리저리 살펴본 사황은 도로 탁자위로 올려놓았다.
화운이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탐나지 않으십니까?”
“이걸 가져서 뭘 하게?”
“이것만 있으면 거의 불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이 좋을 것 같으냐?”
“아닙니까?”
“이백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만 그것만으로도 영생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제천마존께서는 억겁의 시간은 고통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신 어르신도 공감하시는 반응을 보이셨구요.”
“네놈 주위의 모두가 죽고 없어지면 너도 알게 되겠지. 시간이 고통일 수도 있음을.”
“이 법보는 다르잖습니까. 반복하고 반복하고 그럴 수 있으니 제주위의 모두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거든요.”
“그게 사는 것이냐?”
“예?”
“산다는 건 본시 흘러간다는 걸 의미한다. 머무르고 정체되면 죽은 것과 뭐가 다르겠느냐?”
법보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건 죽은 것과 다름 아니라는 뜻이다.
피부로 생생하게 와닿지 않아서 그렇지 화운도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천마와 마신 아수라를 막으려는 것이다.
화운은 그 생각은 거기서 접었다.
그리고 천마에 대한 말을 꺼냈다.
“제가 왔다는 걸 천마도 알더군요.”
천마의 이야기가 나오자 사황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화운은 명왕을 죽이러 가려고 할 때 천마가 보여준 반응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윽고 화운의 말이 끝나자 사황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물었다.
“명왕과 멸제의 격차는 어느 정도냐?”
“비슷합니다.”
“허면 처음에 네놈이 명왕을 죽이고 멸제를 치러 갔을 땐 어찌하여 천마가 나서지 않았을까?”
“······!”
화운이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명왕과 멸제의 무위에 대해서는 화운보다 천마가 더 잘 알 터.
명왕이 죽은 걸 알았다면 그 즉시 화운을 막아 멸제라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천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화운이 경천보패를 회수한 다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명왕을 죽이려고 하자 그것만은 막았다.
심지어 경천보패를 회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화운은 의혹이 배가된 눈으로 사황을 쳐다봤다.
“설마 거기까지 의도한 것일까요?”
“글쎄, 그 해답은 네놈이 찾아야겠지.”
사황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화운은 그런 사황을 쳐다보면서도 점점 의문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한테 의도적으로 법보를 넘긴 거라고? 그렇게 해서 그들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화운은 다각도로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일부러 법보를 넘겨줄 까닭이 없었다.
“하아, 진짜 이유가 뭐지?”
답을 찾지 못한 화운이 깊은 생각에서 한 걸음 물러났을 때였다.
“그렇게 궁금하면 천마를 찾아가 보지 그러느냐?”
“아직은 천마를 상대할 수준이 못됩니다.”
“내가 함께 가줄 수도 있다.”
“어?”
“······!”
화운이 뭔가를 생각해낸 듯하자 사황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던 화운이 사황에게 놀란 얼굴로 말했다.
“재가 무수한 시간의 반복 속에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겁니다. 발단이 되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은요. 그렇게 보면 유마정이 부서지고 마신 아수라가 강림하게 되는 조건에는 어르신과 저 그리고 천마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보도 있었다?”
“예.”
“법보 역시 조건들 중의 하나라면 뭔가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인데?”
“마신 아수라가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아니면······ 모르겠어요. 여튼 제가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이 유마정이 부서지는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지 않을까요?”
“역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유마정이 부서지는 조건들이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냐?”
“예.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천마를 죽이러 가지 않을 참이냐?”
“가면 틀림없이 유마정이 부서질 겁니다.”
“법보가 네놈한테 있거늘 무슨 문제가 되느냐? 시간을 다시 되돌리면 될 것이 아니냐?”
“아수라가 강림한 순간 빼앗긴단 말입니다.”
“그럼 빼앗기지 않을 방도를 찾으면 되겠군.”
“예?”
화운이 다시 한번 한대 맞은 표정을 지은 순간 사황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던져주었다.
“천마를 상대할 방도는 그토록 열심히 찾아대던 놈이 어찌 아수라를 상대할 방도는 찾지 않는 것이냐!”
“······!”
화운의 얼굴에 제대로 한 방 맞은 표정이 떠오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