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셋으로 무림지존-183화 (183/207)

#183. 천옥당

호북성 무한.

하오문 총단.

하오문주 천옥당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화운이었다.

화운이 경천보패를 탈취하러 가는 길에 들른 것이었다.

“이렇게 오실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탁자 건너편에 앉은 천옥당이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뭐 감춰야 할 거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

“한 미모 하지 못한 부분들을 감춰야지요. 이렇게 민낯을 보여주는 건 정말 싫거든요.”

“그런 의미라면 감출 부분이 없어 보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미인들은 대개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잘 알고 있다던데, 어찌하여 그런 염려를 하십니까?”

“제 눈에 아름다우면 뭐합니까. 화 공자 눈에 아름다워 보여야지요.”

“제 눈이요?”

“유혹하고 싶은 사람이 화 공자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천옥당이 빙그레 웃었다.

눈꼬리가 휘어져라 웃는 것이 정말 유혹이라도 하고 싶다는 게 느껴졌다.

“하아, 사 소저도 그렇고, 하오문 분들은 다들 왜 그러십니까. 자꾸만 절 부담스럽게 만드십니다.”

“아, 사 향주도 그랬군요. 하긴 뭐······. 근데 하오문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예?”

“여자라서 그래요. 세상 여자들 전부 다 데려다 놓아 보세요. 엄마가 아닌 다음에야 남자로써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지. 우리가 화 공자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게 아니라 화 공자가 우릴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 얼굴은 정말······ 원수라도 사랑하게 만들고 말 거예요.”

화운을 빤히 쳐다보며 말하던 천옥당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화운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던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 소리가 나게 두들겼다.

그 소리에 천옥당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하,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화 공자만 만나면 이렇게 경계심이 풀어져 버린다니까.”

“좋게 봐줘서 고맙습니다만, 제 가슴속엔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어서 한눈 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

“세상 모든 여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예에?”

“가슴속에 있다는 그분만 이기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화 공자를 얻을 수 있다는 거네요.”

천옥당이 방글방글 웃었다.

화운은 멍청히 바라보다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문주님의 마음까지 어쩌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그보다 한 가지 청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예. 말씀만 하세요. 저랑 교제하자는 청이라면 당장이라도 들어드릴 수 있어요.”

천옥당이 더욱 눈웃음치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본인도 민망했던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화운은 그런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부탁하려던 것을 바로 이야기 했다.

“천종천마교 내에 잠입하고 있는 분 좀 알려주십시오.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분으로요.”

천종천마교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작들 중 가장 고위급을 알려달라고 하자 천옥당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분에 대해 알고 오신 건가요?”

“천하의 모든 정보를 주무르는 하오문이니 천종천마교 내에도 있으리라 봅니다.”

화운의 말에 천옥당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대답은 단호했다.

“그분만은 안 돼요. 화 공자의 부탁이라 해도······ 미안해요.”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화운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천옥당이 화급히 말했다.

“다른 건요? 다른 부탁은 없나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천종천마교로 가시려는 건가요?”

“예. 가서 회수해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화운의 대답에 천옥당은 ‘그렇구나.’라고 흘려듣는 한편 뭐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천옥당은 화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하다 보니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 얼굴로 거길 가도 되겠어요?”

“이목 좀 끌겠지요? 사실은 그래서 하오문 소속이신 분께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온 길입니다.”

“그랬군요.”

천옥당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았다고 하여 최고등급의 세작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대신 다른 방도로 도와줄 수가 있었다.

“역용을 하세요.”

얼굴을 바꾸라는 소리다.

화운은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변장하는 것조차 생각해 보지 않아서였다.

‘내가······ 교만했구나!’

그랬다.

교만한 것이다.

천마 외에는 자신을 어쩔 상대가 없으니 자신을 감추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화운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더욱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역용술을 모릅니다.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에? 역용술은······!”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화운이 공손히 두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천옥당은 눈만 끔벅거렸다.

반 시진 후.

화운의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뚝했던 코가 낮아졌고 광대가 좀 더 도드라졌다.

변한 건 그것뿐인데도 단지 피부만 깨끗해 보이는 평범한 얼굴로 전락해 버렸다.

“와우! 진짜 못생겼네요.”

천옥당이 놀렸다.

“지금 그 얼굴로 절 비웃은 겁니까?”

화운이 반격했다.

“그래도 화 공자님의 얼굴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제가 얼굴을 가리는 사람이 아닌데 그 얼굴은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화운이 고개까지 저어대자 천옥당은 얼른 동경을 들여다봤다.

눈꼬리는 처졌고, 코는 날카롭게 우뚝 섰다.

그리고 입술은 잔뜩 불거져 매기 입 같았다.

“크크큭! 그래도 이 입술은 매혹적이지 않아요?”

동경에서 얼굴을 뗀 천옥당이 화운을 향해 입술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화운이 화들짝 놀란 척하며 말했다.

“사람 잡아먹을 주둥이 같습니다.”

“주둥이가 뭐예요! 꽃 같은 여인에게요! 큿큿큿!”

천옥당이 도끼눈을 뜨고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금세 배를 잡고 웃었다.

화운도 그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정말 대단한 역용술입니다.”

“백면기환술을 반 시진만에 익혀내는 분은 첨 봤어요. 저도 꼬박 이틀이나 걸렸는데.”

천옥당이 본래의 얼굴로 바꾸며 말했다.

화운은 그 변화하는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얼굴이 본 모습입니까?”

“어? 궁금해요?”

“진짜 얼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얼레 얼레! 그거 관심인데요?”

“관심이 아니라 그냥 궁금한 겁니다.”

“그니까 관심이지요. 오호홍! 제게 관심이 있었구나.”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게 만드십니다.”

“이럴 땐 그냥 그렇다고 해주시면 돼요. 말 한 마디 그렇게 한다고 당장 가까워지는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그런 말 좀 했기로 가슴 깊이 품고 있는 백리연을 잊을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천옥당이 싱글싱글 웃고 있어서다.

분명 뭔가를 얻어내어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화운은 난감했다.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난감할 땐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예.”

“하루만 묵고 가시면 안 되나요?”

“아까 그 주둥이가 달려들까 봐 안 되겠어요.”

“이런 들통났구나!”

천옥당이 히죽 웃으며 따라서 일어났다.

화운은 자신을 향해 계속 웃고 있는 천옥당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중히 포권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화 공자님.”

화운이 예의를 갖추자 천옥당이 웃음을 지웠다.

“말씀하시지요.”

“과례는 비례라는 말도 있고 하니 그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지 않으셨으면 해요.”

“지킬 건 지켜야지요.”

“물론 그래요. 하지만 가슴에 품고 있는 분 때문에 절 경계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거잖아요.”

“······!”

“슬퍼지려고 해요. 그러니까 조금은, 아주 조금만이라도 틈을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천옥당의 얼굴에 간절함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웃고 떠들고 하던 얼굴과는 완전히 달랐다.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여 그 간절한 마음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화운은 그런 천옥당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간절함이 가득한 천옥당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그녀를 오랫동안 알았고, 그 오랜 시간만큼 내 가슴속에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화운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하자 천옥당의 얼굴에 처연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부럽군요. 그분이 부러워요.”

“미안합니다, 그럼.”

화운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돌아섰다.

천옥당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화운의 뒷모습을 망부석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화운이 사라진 문을 통해 풍채 좋은 중년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오문의 호법인 풍백이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시진 않겠지요?”

“이기지 못할 싸움이요?”

풍백의 물음에 천옥당이 정신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저런 사내는 가슴에 품은 한 여인만을 맹목적으로 사랑한다고나 할까, 마음을 나눠 다른 여인을 함께 사랑하지 못합니다. 절대요!”

“그럴까요?”

“문주님이 제아무리 유혹을 해도 절대 눈을 돌리지 않을 겁니다. 장담하지요.”

“하아! 죽고 싶다.”

“문주님?”

“제게 가장 가까운 분께서 이 가녀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는데 어찌 안 그렇겠어요? 거짓말이라도 반드시 기회가 있을 테니 잘 해보라던가, 그렇게 응원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원은 무슨, 깜짝 놀랐잖습니까!”

“어마마마! 지금 놀라게 했다고 화를 내시는 거예요?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으시고요?”

“제가 심장이 좀 약하잖습니까.”

“누가 뭐가 약하다고요?”

천옥당이 눈을 흘겨 뜰 때였다.

“사천에서 온 지급입니다. 사천독왕이 문주님을 노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풍백의 아래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분류하는 일을 도맡고 있는 이가 화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사천독왕이 누굴 노린다고?”

풍백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본문을 휘하에 두고 천사련에 합류하려는 거 아닐까요?”

보고를 한 자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천옥당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천독왕이면 까다로운 인물인데 어쩌죠?”

“뭘 어쩝니까. 이럴 때 부탁드린다며 잠깐이라도 더 보러 가야죠.”

풍백이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멍청히 쳐다보던 천옥당이 세찬 바람처럼 쌩하고 사라졌다.

“늦으면 사천까지 간 줄 아세요!”

멀리서 천옥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러라는 게 아니잖아요!”

풍백이 깜짝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천옥당은 금세 사라지고 보이지가 않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포기한 듯 그냥 창가에 몸을 기대는 풍백.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녀석, 사랑이라는 것도 해보고······ 축하한다.”

***

하오문은 천하에 지부를 두었고, 철저히 점조직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총단을 공개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총단 외에는 천하 각 성의 지부들 중 어느 한 곳도 드러난 곳이 없었다.

점조직의 이점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천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하오문도들은 자신과 연결된 사람만 알았지 자신의 주위에 누가 또 있는지 심지어 자신의 상관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천지부가 당문에 점유당했다는 건 오랫동안 분석되고 철저히 당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성도 거리를 걷고 있는 천옥당의 마음은 무척 심란했다.

당문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둘째 문제였고, 가장 시급한건 문주로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천을 처음부터 다시 일굴 것인지 아니면 화운의 도움을 받아 사천지부를 살릴 것인지였다.

처음부터 다시 일군다면 자신과 하오문 전체가 안전해지지만 기존의 사천 문도들은 철저히 버림받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천옥당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운데 화운 역시 그녀의 고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화운 자신이 정무맹 시절에 천옥당을 만났을 때의 하오문은 지금 그대로였다.

당문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곧 지금의 위기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버렸겠지······.’

화운은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그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니까.

안타깝지만 모두를 위해 소수를 버리는 것이다.

옳은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틀린 결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건 그냥 하나의 선택일 뿐이고,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최선에 가까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화운은 자신의 처지로 생각을 옮겼다.

어쩌다보니 인간세상의 괴멸을 막아야하는 입장에 놓인 자신.

나름 최선을 다한답시고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고, 혹여 천옥당과 유사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날이 오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혹시라도 그런 날이 왔을 때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거리를 걷고 있는 화운은 그런 생각 끝에 자신이 옳은 결정을 해오고 있었는지 그간의 행보를 더듬고 있었다.

특히 사황을 끌어들인 것에 대해 잘한 것인지 심각하게 되짚어보고 있을 때 나란히 걷고 있던 천옥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예요. 저기 녹선다루가 바로 사천지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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