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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으로 무림지존-179화 (179/207)

#179.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잖습니까

호남성 악양 남부.

정문에 현판도 걸려 있지 않은 웅장한 규모의 전각군.

정오를 막 지난 시각 두 사람이 정문에 나타났다.

화운과 사황이었다.

거대한 규모의 전각군을 바라보는 사황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그의 기도는 조금 거칠어졌다.

화운은 그 이유를 짐작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무해곡이 수백 년 동안 척박한 땅에서 숨죽이는 동안 천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전 그 진실을 알기에 빈손으로 모실 수가 없었습니다. 감히 수백 년의 업보를 보상하겠다고 준비한 게 아닙니다. 이번 일을 제발 도와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건방지기가 끝을 모르는구나!”

사황이 분기를 터트리며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오른손 장심에 전륜멸천의 강기가 급속도로 응집하였다.

손 한 번 휘두르면 전각군이 쑥대밭이 되어버릴 판이었다.

“향아랑 몇 년 후에 태어날 아이들이 맘껏 뛰어노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분노가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바꿔주지 못할 정도로 중합니까?”

“시건방진 놈!”

사황이 더욱 격분하여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손은 그대로였다.

천하에 거칠 것이 없는 사황이 화를 내면서도 손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다.

화운은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정문 안쪽에서 바람같이 몇 사람이 달려나왔다.

무영투와 담대후가 가장 먼저 정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북궁설, 백리명, 담명 등이 차례로 달려 나왔다.

사황의 기도에 놀라 달려 나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곧 화운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황을 쳐다봤다.

이때 사황은 정문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냉랭히 쓸어보았다.

담대후와 무영투 그리고 북궁설과 백리명을 볼 때까지만 해도 냉랭하기 짝이 없던 그의 눈빛이 담명과 백리연, 남궁현 그리고 선우유성을 보면서 살짝 흔들렸다.

아직 한참 어려보이는 네 사람을 본 순간 무해곡의 아이들이 떠오른 것이다.

화운이 말한 대로 무해곡의 아이들도 저렇게 깨끗한 비단 옷을 입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다면······.

무해곡의 식솔들이 이 드넓은 곳에서 맘껏 살아갈 수 있다면······.

무해곡의 후손들이 바글거릴 정도로 대를 이어갈 수 있다면······.

사황의 마음이 점점 더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이때 담대후가 포권하며 나섰다.

“그 녀석의 스승인 담대후라고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걸음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담대후는 단박에 사황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자 사황을 알아본 또 한 사람, 무영투도 두려움을 억누르고 공손히 포권했다.

“무영투라는 잡도둑입니다.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사람이 공손히 예의를 갖추자 북궁설 등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에 담대후가 다시 나섰다.

“앞으로 너희들을 이끌어주실 태사부님이시다. 인사 올리거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북궁설 등이 예의를 갖추려고 하자 사황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응집하였던 전륜멸천의 강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담대후가 옆으로 비켜서며 청하자 사황이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걸어서 정문을 넘어갔다.

화운에게 들은 바가 있어 사황과 무해곡의 비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담대후는 사황을 극진히 대했다.

도와달라는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도 않았다.

무인으로써 근래에 자신이 겪고 있는 한계에 대해 잠깐 가르침을 청했고, 배운 무공도 성격도 천차만별인 아이들을 가르칠 때 유념해야 하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는 정도로만 담소를 나누었다.

사황은 대접을 받는 내내 퉁명스러웠다.

담대후가 무안할 정도로 냉랭하게 굴었다.

때로는 눈을 감아버렸고, 때로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홀로 자작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백리연과 남궁현 그리고 선우유성이 함께 있는 자리를 힐끔 살펴보곤 했다.

그날 밤.

붉은 인영이 사황의 거처로 날아들었다.

일백 년 전 사황의 심복이었던 혈사(血邪)의 후예 혈존이었다.

“백리가의 가주에게 직접 확인했습니다. 백리가의 두 아이들을 남궁검가와 선우세가의 핏줄들과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필요하시다면 남궁가와 선우가에도 다녀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다른 명이 없으시다면 물러가겠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예?”

지금껏 명령만 내렸지 자신의 생각을 물은 적이 없었던 주군이기에 혈존은 의아하여 쳐다보았다가 감히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다.

“무해곡의 식구들과 네 아이들이 이곳에서 살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

“속하, 감히 주군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짓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이곳을 쓸어버리겠습니다.”

“멍청한 놈!”

“죄송합니다.”

“내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천하에 얼굴을 내놓고 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주군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감히 주군의 곁을 떠날 생각은 할 수가 없습니다.”

“네 아이들이 그대로 무해곡에 사는 게 좋단 말이냐?”

“혈세천하 할 때까지 본곡의 업보는 계속 될 것입니다.”

“미련한 짓이야.”

“주군!”

혈존이 놀라 부르짖을 때였다.

문 밖에서 화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존이 왔나 보군요. 아침에 올까요?”

화운이 물은 순간 사황에게서 붉은 기운이 뻗어가 문을 왈칵 열었다.

화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황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혈존을 발견한 화운은 빈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참 오랜만에 보는 분이시네.”

“널 본 적이 없다.”

“영감님의 기억으로야 그렇겠지요.”

“닥쳐라!”

“쯧쯧! 주군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할 건 영감님이지요.”

“이, 이익!”

혈존이 감히 소리치지 못하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화운은 피식 웃으며 사황을 쳐다봤다.

“뭐 얼마나 조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천하의 사황 어르신을 상대하는데 감히 거짓을 일삼겠습니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겐 목숨처럼 귀한 분들입니다. 제 약점을 어르신의 손에 쥐어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의심하느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어찌하실 건지만 결정하십시오.”

사실 복수에 미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부하기 힘든 제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사황이라는 존재는 보통의 범주로 판단할 수 없다.

무경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이백 년 가까이 살아온 인물이거늘 어찌 함부로 속단하겠는가.

화운은 사황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염려스런 얼굴로 바라봤다.

사황은 그런 화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화운이 크게 기뻐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조건이 있다함은 수락한 것이나 진배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황은 냉엄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에 무해곡이 있음을 온 천하에 공표하겠다.”

“······!”

단호하게 말하는 사황.

화운은 한 대 맞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건 단순하지 않다는 뜻.

“설마 어르신께서, 그러니까 사황이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건 감출 생각이신 겁니까?”

“그렇다.”

위험한 일이다.

과거 무해곡 덕분에 크게 일어선 무가들이 있다는 걸 아는 이들과 무해노인을 공격했던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시잖습니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도 잊어주겠다.”

반대로 해석하면 악의를 품고 온 자들은 몰살을 시켜주겠다는 뜻이다.

화운은 고민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사황이 정말 큰 결단을 내린 것임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렇다고 반길 수도 없어 심사가 복잡해졌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천하가, 인간들의 세상이 아수라에 의해 끝장날 수도 있는데, 이게 다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을 멈춘 화운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혈존과 사황을 번갈아본 후 한 마디만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알아서들 하십시오.”

화운이 그렇게 나가버리자 사황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어둠 위로 반으로 갈라진 달이 보였다.

밖으로 나온 화운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갓 스물을 넘은 나이.

지금의 육신이 열다섯 살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겪느라 스물한 살에서 멈춰 버린 나이였다.

아직 어리다면 어릴 수도 있는 나이.

자신의 뜻을 세우고 스스로 걸어갈 나이임에야 맞겠지만, 세상을 홀로 책임질 나이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선택을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정말이지 동분서주하며 살아온 삶이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렇게 살아야할지 모르는데, 살만큼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고 있다.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해하면서도 맥이 빠지고 짜증이 나기도 한다.

“젠장! 그냥 용서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반달 아래 잔뜩 짜증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화운.

땅만 보고 걷느라 정처 없이 걷고 있던 그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

화운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남을 용서하는 게 더 힘들다고 했어요.”

“연······.”

“많이 심란한가봐요.”

어둠 속에서도 백리연의 얼굴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화운은 고개만 끄덕였다.

“좀 걸을래요?”

화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백리연은 천천히 걸었고, 화운은 그녀와 보폭을 맞춰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사황이 맞죠?”

“맞아.”

“무해곡의 방대한 지식으로 우리들을 강하게 만들려는 거죠?”

“응.”

“우리가 상대해야 할 마귀들이 그렇게 강한가요?”

“강해.”

화운은 사천혈사를 떠올리며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세히 말해줄 순 없나요?”

“강기로만 상대할 수 있는 마귀들이 수만이야. 최소 사오만은 될 거야.”

“······!”

놀란 백리연이 걸음을 멈추고 멍청히 쳐다봤다.

마치 그런 숫자를 우리가 어떻게 상대하느냐고 쳐다보는 것 같았다.

“사천혈사,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화운이 모두의 앞에서 경천보패와 관련하여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할 때 사천혈사에 대해서는 대충 이야기 하고 넘어갔다.

다들 아직 어렸기에 사기를 위해서라도 자세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해달라고 했다.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얼굴로.

화운은 당시의 처절했던 싸움을.

사천무림에 화산파가 이끄는 섬서무림까지 가세하고도 대패를 하고 말았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처참했던 싸움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백리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괜히 말한 건가?”

화운이 중얼거렸다.

동그랗게 뜬 눈에 놀람을 잔뜩 채워 자신을 쳐다보는 백리연.

화운은 걱정 말라는 듯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만반의 준비가 되기 전에는 그런 싸움에 내몰지 않을 테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았으면 해.”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

화운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리연이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대체 그런 싸움을 얼마나 많이 한 건가요?”

“응?”

“처음에 살고자 발버둥 칠 때와 마지막으로 마신 아수라를 상대할 때 외에는 그렇게 힘든 싸움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말했었잖아요.”

“힘들지 않은 싸움이 어딨겠어. 사황, 그 인간한테 당한 적도 있고, 천마랑 싸운 적도 있는데. 그래도 젤 힘들었을 땐 사천에서야. 그땐 정말······ 너무 미안했어.”

그때 당시에 사천과 섬서 무림인들은 일만에 달하던 숫자였는데 절반도 살아남지 못했다.

마귀들이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의 육신을 씹어 먹고, 찢어발겨놓았다.

- 잊지 말게. 이 싸움은 전초전일 뿐이네.

화산파의 장문인 임장홍이 일신의 기력을 모조리 쏟아내고 명왕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하기 직전에 보내온 전음이었다.

- 가거라. 화산 장문인의 말씀을 잊지 말고······ 살아남아라.

아미파의 금영신니는 인간이기에 지을 수 있는 미안함과 당부의 마음이 담긴 처연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남기고 죽었었다.

화운은 그들의 마지막을, 그날의 처참한 죽음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절절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진한 어둠 속에서 밤하늘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서도 쓰라린 아픔이 느껴졌다.

‘이 사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어! 어차피 다시 살아났을 텐데도······!’

바로 앞에서 지켜본 백리연은 화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와 자신은 어떤 관계였을까?

그 궁금증 때문에 하루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이유로 젖어들고 있었다.

‘안아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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