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다시 시작되다
사황의 활활 타오르듯 새빨간 머리카락이 올올이 곤두서서 넘실거렸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짓밟아 버릴 것처럼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던 그가 분노의 살의마저 있는 대로 폭발시키자 일대의 대기가 황혼이 물 든 것처럼 붉게 변했다.
지금껏 화운이 사황에게서 본 적이 없던 엄청난 살의였다.
‘이건 마치 용의 역린을 건드려 놓은 것 같군!’
화운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자신이 붙여놓은 하오문의 사람들, 그들로 인해 사황은 지금껏 무해곡이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무해곡 앞에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것들이 감히 감시를 해?’
사황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그 모습을 본 화운은 침착하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했다.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주위를 한차례 둘러본 화운은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순간 사황의 전륜멸천의 파도가 성난 파도처럼 화운을 향해 몰려갔다.
하지만 화운은 순식간에 자리를 이동해 버렸다.
“내 경고를 무시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 무해곡으로······!”
소리치던 화운의 두 눈이 급격히 커졌다.
전륜멸천파가 방향을 틀어 도심 일대를 쓸어버린 것이다.
수많은 건물들이 부서져 날아가고 사람들마저 무참하게 휩쓸렸다.
“무슨 짓입니까!”
“버러지 같은 놈이 감히 본좌를 협박해? 천하를 쓸어 버려도 감히 그러는지 보겠다!”
사황은 화운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
다시 전륜멸천파를 일으켜 나머지 도심을 휩쓸려고 했다.
“이 미친 늙은이야 그만둬!”
화운이 달려들었다.
격해진 분노의 감정을 담아 절대검력을 펼쳤다.
사황이 전륜멸천파의 방향을 트는 게 보였다.
상관없었다.
이대로 전륜멸천파를 쪼개 버리고 흉신악살 같은 늙은이가 한 점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때까지 맹폭을 가하겠다.
화운의 눈빛에도 강렬한 살의가 요동쳤다.
콰-앙!
굉렬한 폭음이 터졌다.
전륜멸천파가 터져 버리고.
화운이 재차 절대검력을 펼친 순간 전륜멸천파의 뒤를 따라 더욱 거세진 전륜멸천파가 중첩하여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운이 더욱 단호하게 절대검력을 펼쳤다.
“······!”
서로의 기운이 충돌하기 직전!
화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황과의 일대격돌을 눈앞에 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의 전신을 옭아맸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힘은 화운의 정신까지 삽시에 지배하려고 들었다,
‘이건······!’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화운은 중단전의 내력을 있는 대로 동원하여 뇌리를 옭아매려는 기운에 맞섰다.
바로 이때 화운의 육신이, 화운이 바라보는 세상이 그리고 화운의 의식까지 강력한 힘에 끌려가듯 뒤로 확 꺼져 버렸다.
***
화운은 무한을 향해 정신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공공무영비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사미희는 정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화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운이 멈추었다.
사미희는 벌써 도착한 것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봤다.
아니었다.
자신들은 첩첩 산중 위 허공에 우뚝 멈추어 있었다.
“화 공자?”
사미희는 화운을 쳐다봤다.
화운은 뭔가에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경천보패······!”
“경천보패? 그게 뭔데요?”
사미희가 묻는 순간 화운이 다시 공공무영비를 펼쳤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호북성 무한.
하오문 총단 칠 층.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천옥당이 사황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사황의 발치에는 월영이 피투성이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뉘신지 모르나 본문은······.”
“닥쳐라. 한 마디라도 더 하면 이 자리에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사황의 으름장에 천옥당은 얼음구덩이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오한이 들어 깜짝 놀랐다.
풍백을 슬쩍 돌아보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신들이 상대할 사람이 아니니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다.
천옥당은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이 위기를 벗어날 방도를 궁리했다.
이때 사황은 좀 전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놈이 한 짓일까? 아니야, 그놈도 놀라는 표정이었어!’
그럼 누가 한 짓일까?
분명 시간이 뒤틀렸다.
그리고 자신은 일다경 쯤 전으로 돌아와 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신의 간섭이라도 있었던 걸까?
사황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멀리 하늘을 응시했다.
“신의 간섭이 아니라면······.”
사황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그가 아는 무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방금 겪었던 일을 파악하고자 했다.
무해곡은 말 그대로 무공의 바다와도 같다.
천하에 퍼져 있는 무학의 원류는 물론이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뻗쳐간 지류까지 총망라하여 그 근본이 되는 무학적 원리를 모조리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기록 어디에도 신의 간섭처럼 여겨지는 시간의 뒤틀림은 없다.
귀와 신을 부리고, 혼과 백을 다스리는 술법들조차 시간을 뒤틀지는 못한다.
하늘을 속이고, 비와 바람을 가두는 대법들조차 시간을 되돌리진 못한다.
시간은 인간을 지배하는 신의 권능이기에.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럼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정말 신의 간섭이란 말이냐?”
궁금증을 토로하던 사황이 시선을 돌렸다.
남서쪽을 향해서였다.
화운은 칠 층 창가에 서 있는 사황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리로 갔다.
사황은 화운이 오고 있음에도 공격은커녕 살의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화운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활짝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문주님!”
사미희가 소리친 순간 천옥당이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사미희가 놀란 눈으로 사황을 힐끔 경계할 때였다.
사황이 화운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너도 느꼈느냐?”
“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이 있었던 일입니다.”
“그 무슨 헛소리냐!”
사황이 소리친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시간이 되돌아갔다.
하오문 총단.
화운과 사황은 다시 만났다.
“신의 법보를 손에 넣은 자가 있습니다. 그자가 지금 그 법보의 권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법보?”
“경천보패라고 불립니다.”
“네놈은 그걸 어찌 아는 것이냐?”
“한때는 제가 가지고 있었던 법보이기 때문입니다.”
“······!”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사황의 궁금증이 그와 같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궁금증만 더 늘어났다.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신다면요.”
“뭐냐?”
“제발 불필요한 살상만큼은 자제해 주십시오.”
“닥쳐라! 네놈 따위가 무얼 안다고······!”
“무해노인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다 압니다. 그 업보가 사황께 전해졌다는 것까지도요.”
“네놈도 배덕자들의 후예로구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그깟 걸로 흥정을 하려고 들어! 주둥이를 찢어놓아야 닥칠 것이냐!”
“흥정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 년 동안 온 천하를 피로 짓밟았습니다.”
“뭐?”
사황의 분노와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한번 경천보패가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마자 또다시 발동되었다.
다시 하오문 총단.
화운은 사황과의 대화를 잠깐 미루고 하오문주 천옥당을 향해 말했다.
“문주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여기 차 좀 내주시고, 죄송하지만 모두 물러나 주십시오.”
하오문은 정보를 다루는 문파였다.
하지만 사황의 존재가 너무 무서웠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는 나중에 화운을 통해 얻을 수도 있다.
천옥당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천옥당이 수락하자 풍백이 월영을 짊어지고 먼저 밖으로 나갔고, 사미희가 화운을 힐끔 돌아본 후 뒤를 따라갔다.
이어서 천옥당마저 밖으로 나갔고, 잠시 기다리니 천옥당이 직접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져와 두 사람 앞에 한 잔씩 따라주었다.
“말씀들 나누세요.”
천옥당은 사황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사황은 싸늘한 표정 그대로였다.
“하오문에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부탁해서 그랬던 거니까요.”
“그럼 네놈을 죽여주랴?”
“먹히지도 않을 엄포는 그만 두십시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전 화운이라고 하며 무당검성께 검을 배웠습니다.”
“······!”
무당검성이 언급되자 사황의 눈빛이 한차례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고, 마음의 동요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의외, 놀람 그 정도에 불과했다.
“먼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시간의 회귀부터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화운은 경천보패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천마존의 비동에서부터 마신 아수라의 강림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사황이 알아야 할 부분은 전부 이야기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사황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가 받은 놀람도 적지 않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그는 마신 아수라를 상대로 자신이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경천보패가 다시 발동된 걸 보니 아수라가 보패를 인간들의 세상으로 다시 내보낸 모양입니다. 어쩌면 천마도 제가 시공을 거슬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천보패가 다시 이 땅으로 나오는 건 화운이 우려했던 바였다.
그 힘을 이용하여 누군가가 화운처럼 강해져 유마정을 부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경천보패가 이 세상으로 나온 건 확실해졌고, 그걸 손에 넣은 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졌다.
그자가 유마정을 부수는 데에 일조할 정도로 강해지기 전에 경천보패를 빼앗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천종천마교로 가야 한다.
물론 그전에 이곳을 먼저 정리해 두어야겠지만.
화운은 그렇게 자신의 행보를 결정했다.
이때 사황은 마신 아수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고수도 무인이고, 늙어도 무인이다.
제아무리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을 쌓아도 자신이 일초지적조차 되지 못했다는 말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황은 그 충격 그대로 마신 아수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실제 마신 아수라가 어떤 권능을 발휘하는지는 전혀 알 도리가 없었지만.
“마신 아수라가 이 땅에 강림하게 되면 끝장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의 권속으로만 존재하게 될 겁니다. 자유도 삶도 모조리 박탈당해 노예가 되고 말 겁니다.”
“나완 상관없다.”
“연리향, 그 아이는요? 지금 쯤 세 살쯤 되었으려나, 제가 만났을 땐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더군요. 아, 연리향 말고도 한 아이가 더 있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젖먹이였습니다만, 여튼 그 아이들이 있는데도 상관없다고 하실 겁니까?”
차갑기만 하던 사황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화운은 그 얼굴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그 아이들만큼은 더 밝은 곳에서 살게 해주어야지 않겠습니까. 어르신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분노를 참아주시면 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뒤를 잇는 아이들은 무해의 이름과 함께 태양 아래 가장 광명된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
“전 모릅니다. 어르신의 가슴속에 얼마나 큰 분노가 쌓여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크기조차 가늠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건방지게 말씀드리자면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앞서 살고 있는 어른들의 사명이지 않을까 합니다.”
사황은 침묵했다.
화운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화운의 말이 끝났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얼굴로 가만히 응시하기만 하더니 미간을 한차례 씰룩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천마를 합공하자는 걸 그렇게 장황하게 떠드는 것 같지는 않고, 뭐냐? 본좌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기에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차갑기만 하던 사황이 많이 누그러졌다.
천마를 치러 갈 때 겪어보았던 그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운은 기꺼운 마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함께 가시지요.”
“어딜 말이냐?”
“제가 건방지게 구는 이유, 저의 약점이기도 한 곳으로 함께 가시지요. 무해곡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
화운은 스승과 무영투 그리고 무공을 배우기 위해 모두가 모여 있는 곳으로 사황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는 사황만큼 적임자가 없다는 게 화운의 생각이었고, 그들을 수련시키는 건 처음부터 사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사황이 하오문의 총단을 박살을 내버렸을 땐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경천보패가 발동되면서 다시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물론 경천보패를 빼앗아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경천보패를 손에 넣은 자는 누굴까? 명왕 아니면 멸제나 마존? 그들도 아니면······ 혹시 천마?’